020. 수해의 괴물 (1)
사바흐는 고심하고 있었다.
‘진짜 롤랑의 의뢰였다는 게 확인됐다.’
즉, 이 의뢰는 무효화할 수 없는 것.
카스피의 파문을 막으려면 의뢰는 완수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사바흐는 주저했다.
‘이길 수 있을까.’
자신할 수 없었다.
‘연막이 펼쳐져 있다면 다르겠지만.’
다시금 연막술을 시전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도살자가 그러도록 내버려 둘 리도 없다.
신경 쓰이는 건 또 있었다.
‘저 검.’
마법사의 무시무시한 일격을 종이 자르듯 갈라 버린 저 검.
저것이 연막술마저 분쇄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냥 힘으로 맞붙는다면.’
카스피와 짝을 이뤄 공격하면 승산은 있다.
다만 자신보다 약한 카스피는 큰 부상을 입거나, 최악의 경우 사망할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안 돼. 최우선 고려 사항은 카스피의 안전이다.’
사바흐의 눈이 창밖의 검은 것을 향했다.
‘검은 것’ 역시 이쪽을 똑바로 마주 보고 있었다.
‘장난질을 칠 수도 없는 상황이고.’
그때 새로운 생각이 사바흐의 머리를 스쳤다.
사바흐는 전투 자세를 풀었다.
“스승님?”
“전투는 포기한다.”
“네?”
카스피가 놀라 물었다.
“왜요? 스승님의 실력이면 도살자 따위는 낫질 한 방에 그냥 콱.”
“나는 정면승부로 저자를 이길 수 없다.”
카스피의 눈이 흔들렸다.
“그, 그럼 저하고 연계 공격을 펼치면……!”
“카스피.”
사바흐가 다시 말했다.
“전투는 포기한다.”
그러자 카스피도 입을 다물었다.
아틸라 역시 예상한 일이었다.
제자바보인 사바흐가 이런 위험한 전투를 자처할 리 없으니까.
‘롤랑의 입만 다물게 하면 가짜 롤랑의 의뢰였다고 둘러댈 수 있을 테니.’
아틸라를 돌아보며 사바흐가 말했다.
“네놈은 더욱 강해져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않으면?”
“내가 널 죽일 것이다.”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할 수 있으면 해 봐.”
사바흐와 카스피는 그대로 종적을 감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까마귀 한 마리가 푸드득 창밖을 날아올랐다.
* * *
작센은 순조롭게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롤랑이 가스코뉴 공작을 독살하는 데 사용한 독극물과 살해 방법, 협조자 등이 적힌 쪽지와 각종 증거품들이 보란 듯이 발견됐기 때문이었다.
누구의 소행일지는 뻔했다.
‘까마귀 군주 이 새끼.’
새로이 알게 된 사실도 있었다.
문주크가 남부 전선에 등장했다는 정보를 알린 건 라시드가 아니었다.
“네? 전 그런 전갈은 보낸 적이 없는데요?”
그건 리베르의 까마귀였다.
어쩌면 리베르 본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알았으면 그때 모가질 비틀어 버렸어야 했는데.’
관조자들이 자신에게 무얼 원하는지 아틸라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녀석들이 바라는 대로 움직여 줄 생각은 없다.
“으힉! 내, 내가 다시 영주가 되다니!”
약속대로 작센은 오토에게 봉토를 수여했다.
기사에서 도적이 되었다가 다시 남작으로 승격한 오토는 눈앞의 현실이 쉬이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그건 그를 따르던 세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다시 기사가 될 줄이야!”
“대, 대장님 만세!”
“아틸라 님 만세에에!”
그들은 그렇게 ‘진짜’ 기사로 돌아왔다.
일이 마무리된 뒤 아틸라는 영주성을 떠났다.
오토에겐 제법 빚을 지워 놨으니 훗날 도움 될 일이 있을 것이다.
‘공국의 군주가 된 작센 역시 마찬가지.’
물론 작센은 아틸라가 제시한 세 가지 요구 사항을 모두 지켰다.
그러나 롤랑의 손에 꼼짝없이 죽을 뻔했던 그는 아틸라의 은혜를 잊지 못할 것이다.
‘작센은 그런 녀석이니까.’
떠오르는 붉은 해를 아틸라는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에겐 새로운 목표지가 생겼다.
‘까마귀 군주의 둥지.’
오토가 영주가 된 뒤, 아틸라는 지하 감옥의 촌장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가 변장한 모습이었을지는 뻔했다.
‘빌어먹을 까마귀 새끼. 깃털을 전부 뽑아낸 뒤 산 채로 가죽을 벗겨 주마.’
그러나 까마귀 군주의 둥지를 찾으려는 건 녀석을 잡아 족치겠다는 이유에서만은 아니었다.
녀석들은 알지도 몰랐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
관조자는 세계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자들.
게다가 웬만한 요정보다도 강대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
‘요정섬은 샤를이 찾도록 보험으로 두고, 난 관조자들을 찾아야겠어.’
관조자들의 둥지는 요정섬과 마찬가지로 쉬이 찾을 수 없다.
말 그대로 세계의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
‘하지만 녀석이 꼬리를 드러냈다.’
아틸라는 무휼을 꺼내 정신을 집중했다.
[ 관조자의 마력을 감지합니다. ]
우우웅, 소리를 내며 무휼의 검신이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무휼은 리베르의 마력을 기억했고, 그것을 나침반처럼 추적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가자. 펀치.”
끼아옹! 답하는 펀치의 머리를 쓰다듬은 아틸라는 느긋하게 말을 몰았다.
작센이 준 이 말은 지금껏 타 본 것 중에 가장 훌륭했다.
신선한 새벽 공기를 음미하며 마을 입구에 다다랐을 때, 아틸라는 생각지도 않은 이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말도 없이 갈 생각이었수?”
오토와 세 기사.
그리고 이제는 오토 영주의 직속 근위병이 된 오동나무 용병단원들이었다.
“섭섭합니다 아틸라 님!”
“언제 돌아오시는 겁니까!”
“저 바보 같은 대장을 혼내 줄 수 있는 건 아틸라 님뿐이란 말입니다!”
오토가 발끈했다.
“바, 바보라니! 감히 영주에게!”
“영주는 무슨! 밀린 급료나 지불하쇼!”
“밀린 게 어딨어! 다 줬잖아!”
“그럼 상여금이라도 주쇼! 그동안 못난 대장 따라다니느라 죽을 고비가 몇 번이었소!”
“맞소! 오토 영주는 상여금을 지급하라!”
“지급하라!”
“이 빌어먹을 놈들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오토는 웃는 얼굴이었다.
모두의 얼굴을 하나하나 돌아본 아틸라는 말없이 그들을 지나쳤다.
고래고래 인사하는 목소리가 한동안 등을 울리고, 작아지더니, 마침내 사라졌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고 있을 때였다.
“잠깐! 잠깐만 기다리쇼! 아틸라 님!”
의외의 목소리에 아틸라는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오토가 쫓아오고 있었다.
“뭐야. 왜 따라와.”
“나, 나도 함께 갈 거요!”
“미친놈이. 넌 영주잖아. 영주가 지 영지 비우고 어딜 간다고.”
“라, 라시드가 알아서 해 줄 거요! 나름 기사인 세 녀석도 있고.”
“이거 진짜 정신 나간 놈이네.”
“흥. 맘대로 말하쇼. 난 죽어도 따라갈 테니까.”
촉촉하게 젖은 오토의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아틸라는 다시 말머리를 돌렸다.
“맘대로 하든가.”
쏜살같이 말을 달렸다.
오토도 히죽 웃으며 뒤를 따랐다.
“내 말 어떻소! 작센 가스코뉴 공작께서 특별히 하사하신 거요!”
오토의 말대로 퍽 좋은 말인 것 같았다.
전력으로 질주하는 자신의 말에 뒤처지지 않는 걸 보니.
“이제 어디로 가는 거요! 거 목적지나 좀 알고 갑시다!”
아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흔들리듯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그저 크게 웃었다.
언제나처럼 펀치가 우렁차게 포효했다.
* * *
아틸라와 오토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샤를이 피식 입가를 올렸다.
피핀이 물었다.
“정말 녀석을 금사자에 영입할 생각이야?”
“왜. 안 돼?”
“아니 뭐……, 샤를 네가 그렇게 하겠다면 하는 거지만.”
“녀석은 날 쓰러뜨렸어.”
피핀이 펄쩍 뛰며 소리쳤다.
“그건 샤를! 네가 무리한 강행군으로 지쳐 있었기 때문이잖아!”
샤를은 알고 있었다.
도살자와 마주했던 당시, 자신의 몸은 불가사의하리만치 완벽한 상태였음을.
“대족장 문주크의 아들, 아틸라.”
샤를은 직감했다.
녀석을 자신의 울타리 안에 넣어 두지 않으면 언젠가 가장 까다로운 적으로 만나게 될 거라는 걸.
“뒤쫓을 거야?”
샤를은 고민했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는 원하고 있다.’
동료로서가 아닌,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강대한 대적자로서 녀석과 조우하게 될 날을.
그리고 그땐.
‘지난번과 같은 결과는 결코 벌어지지 않으리라.’
샤를은 결정했다.
녀석을 동료로 받아들이는 것은 쓰러뜨리고 난 뒤다.
녀석 또한 자신보다 약한 자에게 머리를 숙일 리 없을 테니.
“샤를?”
“돌아간다.”
명령과 함께 십여 기의 기마부대가 말머리를 돌렸다.
* * *
“뭐요. 이렇게 계속 남쪽으로 갈 거요?”
“아니 한참을 서쪽으로 달리다 북쪽으로 바꾸더니 이젠 남쪽? 대체 무슨 기준으로 움직이는 거요?”
“밥 안 먹고 갈 거요? 배고파 죽겠수다.”
오토의 징징거림을 들으며 아틸라는 고개를 들었다.
무성한 잎사귀로 조각 난 하늘 위로 별이 떠올라 있었다.
“여기서 야영이다.”
아틸라가 말을 세우자 오토는 헤벌쭉 웃으며 땔감을 구해 왔다.
숲길을 달리고 있었기에 태울 것은 주변에 널려 있었다.
콜록콜록, 불을 피우는 오토를 바라보며 아틸라가 물었다.
“걍 거기 있었으면 호의호식하며 살 텐데 왜 따라와서 그 고생을 하고 있냐.”
“이게 무슨 고생이오. 몸에 맞지 않는 자리에 앉아 펜대나 굴리는 게 고생이지.”
“영주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었나?”
“되고 싶었수. 이놈의 도적질이란 게 막상 해 보니 오히려 영주짓 할 때가 그리워지지 뭐요.”
검댕 묻은 얼굴로 오토가 히죽 웃었다.
“근데 말이우. 난 태어날 때부터 귀족이라면 치를 떨던 놈이라 그런지 다시 영주가 되고 보니 영 못 해먹겠지 뭐요. 그래서 차라리 아틸라 님과 세상을 둘러보는 게 체질에 맞겠다 생각한 거요.”
“차라리? 이 새끼 봐라. 내가 무슨 꿩 대신 닭이냐?”
“꿩 대신 닭? 그건 또 무슨 괴상한 말이우?”
“넌 몰라도 돼.”
평소와 달리 오토는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그 대신.
“험험. 그리고 말이오 아틸라 님.”
검댕 가득한 콧등을 긁적대며 말을 끌었다.
“뭐야. 뭔데 그렇게 콧구멍을 벌렁거려.”
“흠흠.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말이우.”
“빨랑 말하던가 불이나 마저 피워라. 도적질로 먹고살았다는 놈이 불도 제대로 못 피우냐.”
“말할 거요! 말할 건데, 한 가지만 먼저 약속해 주쇼.”
“뭘.”
“때, 때리지 않겠다고.”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습관처럼 오토를 쥐어박았다.
아무리 약하게 쳤다지만 이 용력에 그간 얼마나 아팠겠는가.
“알았으니까 말해 봐.”
“정말이우? 말 바꾸기 없기요!”
“알았다니까.”
“그…… 우리 이만하면 서로 말 놓을 때도 되지 않았수?”
“난 처음부터 놓고 있었는데?”
오토가 분통이 터진다는 듯 제 가슴을 후려쳤다.
“아니! 나 말이오 나! 이제서야 말하지만 나 37살이오! 게다가 이젠 귀족 나으리고 말이오!”
“그 귀족 내가 되게 해 준 거잖아.”
“……!”
“일어서.”
급변한 아틸라의 목소리에 오토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왜, 왜요 아틸라 님? 설마 또 때리시려고…….”
먼저 일어선 아틸라가 용아귀를 쥐어들자 오토는 털썩 무릎까지 꿇으며 빌었다.
“자, 잘못했소! 내 다시는 그런 불경한 소릴 입에 담지 않……!”
“헛소리 그만하고 무기나 들어.”
아틸라는 숲의 암흑을 노려봤다.
갈라진 어둠 속에서 시커먼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펀치가 가시처럼 털을 세우며 으르렁댔다.
아틸라의 입가가 야수처럼 찢어졌다.
“손님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