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 불사의 마법사 (3)
사슬낫의 사바흐.
다섯 살이 되던 해부터 하싸씬의 살수로 키워져.
‘아, 암살이다!’
‘뭐? 이렇게 조그만 녀석이 살수…… 크아아아악!’
여덟 살부터 시작된 임무를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성공시키고.
현재는 하싸씬을 대표하는 일곱 마스터 중 하나로 성장한 자.
‘새로운 마스터를 뵙습니다!’
그렇게 탄탄대로만을 걸어온 사바흐에게도 약점은 있었으니.
‘스승님!’
‘하하. 카스피.’
그의 귀염둥이 제자 카스피다.
‘흐어어엉. 스승니임.’
그런 사바흐에게 임무를 실패하고 돌아온 카스피의 상심은 제 살을 깎아 내는 것처럼 괴로운 일이자.
‘카스피가 임무를 실패했다고?’
믿기 힘든 사건이었다.
‘카스피의 실질 등급은 1급이다.’
어린 제자의 방심을 막기 위해 일부러 2급 살수에 머무르게 했던 것.
그런데.
‘흐어엉. 놈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어요. 함정부터 기습까지 완벽하게 들어갔는데도!’
‘진짜예요! 진짜라니까요 스승님!’
허풍 섞인 말이 분명했지만 상대가 보통내기가 아니란 것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도살자라.’
사바흐도 그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금사자 용병단의 샤를 아인하르트와 함께 급부상한 신흥 강자.’
그러던 중, 교단에 도살자 암살 의뢰가 재차 들어왔다.
‘가스코뉴 공작의 알현실에서? 정신이 나간 건가?’
제 발로 호랑이굴에 들어가란 소리.
암살에 성공한다 해도 빠져나오기가 결코 쉽지 않으리라.
물론 사바흐에겐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지만.
‘직접 가야겠군. 도살자란 자 역시 확인할 필요가 있으니.’
카스피가 이 의뢰를 알게 된다면 자신이 가겠다고 우길 게 뻔했다.
‘자식 같은 카스피를 사지로 보낼 순 없지.’
그러나 임무 허가를 위해 단주를 찾은 사바흐는 카스피가 이미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났다는 말을 듣고 절규했다.
‘카스피이이이!’
칼날처럼 벼려진 사바흐의 살기가 가스코뉴 공작성을 찾았다.
예상대로 카스피는 도살자를 상대로 고전을 시작했고.
‘저자가 도살자.’
직접 눈으로 확인한 도살자는 사바흐의 예상을 뛰어넘은 강자였다.
‘이대로면 카스피가 당한다.’
한 가지 의아한 점은 그가 카스피를 죽이려 들지 않는다는 것.
‘죽이지 않으려는 것뿐 아니라 상처조차 내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있다.’
왜일까.
카스피는 살수다.
자신의 목숨을 취하려 온 자를 어째서 녀석은 적대하지 않는 걸까.
‘이상하지 않아요 스승님? 녀석이 절 죽이지 않았다는 게. 심지어 사자왕도 기껏 쓰러뜨려 놓고 안 죽였다니까요?’
살생을 주저하는 자는 결코 아니다.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들이 그것을 증거한다.
그렇다면 왜.
‘설마!’
단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린 사바흐의 눈에 핏대가 불거졌다.
‘카스피의 몸을 노리는 건가!’
저 짐승처럼 우락부락한 덩치의 사내가 애제자를 노리고 있다.
사바흐에게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
‘심장을 꺼내 터뜨려 주마.’
그의 신형이 도살자의 등 뒤로 내려앉았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그야말로 귀신의 경지!
‘내가 왔다 제자야!’
느닷없이 등장한 스승을 보고 놀랐을 법도 하건만 카스피는 아무런 동요도 내비치지 않았다.
‘심중을 감추는 재주가 훌륭하구나. 머지않아 나를 뛰어넘는 초고수가 되겠지.’
사바흐는 일격으로 도살자를 처리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살수의 기본은 기습.
게다가 자신은 하싸씬에서 가장 강력한 일곱 마스터 중 하나였다.
‘끝이다.’
뱀처럼 은밀하게 사슬낫이 쏘아졌다.
도살자의 몸이 빙글 회전하며 사슬낫을 피했다.
그러고는 사바흐 앞으로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이. 사바흐.”
수없는 암살의 세월 속에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사바흐는 일순 몸이 굳었다.
‘어떻게. 게다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다고?’
카스피조차 알아채지 못한 이 찰나의 굳어짐은 상대의 공격을 허용하게 만들었고.
‘아차!’
교단의 절기인 ‘소멸(消滅)’을 시전해 회피하려 했지만 한발 늦은 대응이었다.
“스, 스승님!”
쇳덩이 같은 주먹에 가격 당한 사바흐가 벽에 꽂혔다.
* * *
‘꼼짝없이 당할 뻔했다.’
아틸라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는 걸 느꼈다.
과연 하싸씬의 7대 마스터.
아무런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다시 생각해도 소름 끼치네.’
카스피의 심언이 아니었다면 지금 바닥에 쓰러져 있는 건 자신이었을 것이다.
“감히 스승님을…… 꺄악!”
분노해 달려드는 카스피를 냅다 메다꽂은 아틸라는 서둘러 사바흐를 돌아봤다.
‘방금 그 기술이 소멸인가. 직접 눈으로 보니 장난 아니…….’
사바흐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젠장!’
위험 신호다.
놈이 은신했다.
‘어디로 숨었지? 지금 무기도 없는데!’
끼아옹! 펀치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오! 나이스 타이밍!’
아틸라는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펀치를 찾았다.
그러고는 버럭 소리쳤다.
“무기를 갖고 와야지 이놈아!”
용아귀는 기대도 안 했다.
아틸라는 펀치가 무휼을 물고 올 거라 생각했다.
‘돌겠네.’
주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펀치는 헥헥대며 거리를 좁혔고.
혹여 사바흐가 펀치를 노릴까 봐, 그렇다고 작센을 두고 펀치에게 갈 수도 없어 갈팡질팡하던 아틸라는.
‘그렇다면.’
사바흐의 약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널브러진 단검 하나를 쥐어 카스피에게 내리쳤다.
“네 이놈!”
역시나 귀신같이 등장한 사바흐가 단검을 튕겨 냈다.
‘좋아.’
은신이 해제됐다.
살수의 싸움이 아닌 전사의 싸움이라면 이쪽이 유리하다.
‘근데 무기가 없잖아.’
사바흐가 질풍처럼 맹공을 펼쳤다.
그 역시 아틸라에게 무기가 없다는 점을 적극 이용하고 있었다.
‘환장하겠네.’
사바흐의 사슬낫은 카스피의 것과는 달랐다.
더욱 길고, 예리하고, 또 변화무쌍했다.
‘맨손으로는 방어할 수 없어.’
그렇다고 사바흐 정도의 고수를 상대로 회피만 반복할 수도 없다.
아틸라는 바닥에 떨어진 단검들 쪽으로 이동하며 사슬낫을 피했다.
그러다 회피가 어려울 땐 단검을 집어 들어 막았고.
“어림없다!”
사바흐는 사슬낫으로 그것을 휘어감아 박살을 내 버렸다.
물론 아틸라의 악력에 부서진 단검도 상당수.
“무기가 다 떨어진 모양이군. 이제 어쩔 셈인가 도살자.”
사바흐의 말대로.
살수들이 흘린 무기는 모조리 박살 났다.
그냥 맨손으로 밀어붙여야 하나 생각하던 아틸라의 머릿속에 묘안이 떠올랐다.
‘지금이라면.’
자신을 향해 이글이글 타오르는 사바흐의 눈을 보며 아틸라는 확신했다.
‘심안!’
역시 심안은 먹혀들었다.
어마무시한 스텟창에 이어 사바흐의 머릿속 생각이 눈앞에 펼쳐졌다.
- 짐승 같은 놈.
- 감히 나의 카스피를 범하려 들다니.
- 고자로 만들어 주마.
‘뭐, 뭔 소리야 저건!’
- 교단에 돌아가면 카스피에게 불호령을 내려야겠군.
- 마음은 아프지만 이게 다 카스피를 위한 일이다.
- 크흡……! 벌써부터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구나!
‘미친 새끼! 어떻게 공격할지 예측 좀 해 볼랬더니 대가리 속에 카스피 생각밖에 없어!’
피하는 것도 슬슬 한계다.
아틸라의 몸에 크고 작은 상처들이 생겨났다.
그때 우연찮게 연막을 헤쳐 나온 비두킨트가 작센을 발견했다.
“이공자 거기 있었수?”
‘빌어먹을 설상가상이네!’
오토는 비두킨트를 막지 못한다.
펀치는 말할 것도 없고.
펀치야. 네가 무휼만 좀 물어왔어도…… 응?
‘저거 뭐야.’
아틸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펀치가 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녀석의 입안에 뭔가 낯익은 것이.
‘서, 설마!’
주저 없이 달렸다.
그 와중에 사바흐의 사슬낫이 몇 개의 상처를 추가했지만 무시했다.
“도망치지 못한다!”
사바흐가 무서운 속도로 쫓아왔다.
때마침 미카엘이 비두킨트의 덜미를 잡아당겼고.
“네 이놈 비두킨트!”
“염병 우라질.”
티격태격하던 두 사내는 다시 연막 너머로 사라졌다.
‘나이스 미카엘!’
작센의 언질대로였다.
미카엘은 작센을 보호하는 것에 주력하고 있다.
‘원작에서도 미카엘은 작센 가스코뉴 공작의 충신이지.’
한시름 놓은 아틸라는 펀치의 덜미를 잡아챈 뒤 다른 손으로는 입 밖에 튀어나온 것을 쥐었다.
“강아지를 무기로 쓸 셈인가!”
-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자로다!
- 강아지에겐 안 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지.
- 녀석을 고자로 만든 뒤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
사바흐의 심언이 멈췄다.
그의 눈이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것처럼 커다래졌다.
- 내,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아틸라의 입이 길게 찢어졌다.
[ 펀치의 인벤토리에서 용아귀를 획득합니다. ]
폭풍처럼 용아귀가 휘둘러졌다.
* * *
“저건 또 뭬이야?”
수정구를 들여다보던 바토리의 입이 쩍 벌어졌다.
“저 아이는 마법도 쓸 수 있는 겐가?”
저건 분명 아공간(亞空間) 마법이다.
마법사 중에서도 상당한 경지에 이른 자만이 시전 가능한 고위 마법.
“이해할 수가 없구나. 그런 기색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는데.”
수정구의 시점이 펀치에게 돌아갔다.
“설마 저 아이의 마법인가?”
바토리는 고개를 저었다.
영묘한 짐승인 ‘신수(神獸)’ 중에서도 아공간 마법을 시전할 수 있는 아이는 그녀가 알기로 없었다.
“멋쟁이 야만전사야. 넌 정말 보면 볼수록 날 미궁으로 빠져들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수정구의 시점이 또다시 바뀌었다.
이번엔 미친 듯이 깔깔대는 롤랑의 얼굴이었다.
바토리의 입술도 은근한 미소를 머금었다.
“참 신이 난 모양이로구나. 너도.”
* * *
사바흐는 난생처음 전율을 느꼈다.
‘이, 이자는……!’
방금 전까지도 충분히 강력한 전사였다.
하지만 도끼를 손에 쥔 지금은 이전과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이것이 도살자의 진정한 실력인가!’
사바흐는 자신이 방심했다는 걸 인정했다.
말려들었다.
끝까지 살수의 본분을 잊지 말았어야 했다.
‘녀석은 제 손에 맞는 무기를 들었고, 이제 정면승부로는 놈을 당해 낼 수 없다.’
초기화해야 한다.
다시금 몸을 숨기고, 살수의 전투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아틸라가 그렇게 두지 않았다.
“소멸 쓰면 카스피 죽일 거다.”
사바흐의 동공이 흔들렸다.
- 이자가 교단의 절기를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가.
-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 카스피를 죽이겠다고? 지금의 녀석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
- 안 돼애애애애애!
‘제자바보로 만들어 놓길 천만다행이네.’
물론 아틸라는 카스피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사바흐. 너도 아직 죽어선 안 된다. 카스피가 더욱 성장할 때까지는.’
원작에서 카스피는 머지않아 스승인 사바흐의 경지를 넘어서게 된다.
그건 사바흐의 전폭적인 가르침 없이는 불가능한 일.
다만 걸리는 점이 하나 있었는데.
‘하싸씬의 규율.’
하싸씬은 두 번 실패한 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카스피는 이미 한차례 실패했다.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파문. 그리고 죽을 때까지 추격자가 따라붙겠지.’
그에 대한 걱정은 사바흐 또한 마찬가지였다.
- 카스피가 실패하게 둘 순 없다.
- 도살자는 무조건 제거되어야 한다.
- 그렇다면.
사바흐의 눈빛이 살기로 타올랐다.
이어진 사바흐의 심언을 확인한 아틸라의 눈에 부릅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