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 불사의 마법사 (2)
오토가 너스레를 떨며 답했다.
“아아 물론입죠. 너희들! 무기 내려놓으라고!”
“단원들은 대기한다. 단장과 도살자만 입성하도록.”
“엥? 그래도 이 친구는 데려가야 할 것 같은데?”
오토가 히죽 웃으며 뒤에 있던 남자를 끌어당겼다.
“작센 이공자를 잡아 왔수다.”
* * *
대제국으로 통일된 북부와 달리 여러 왕국으로 잘게 쪼개진 크리엘도라 남부 대륙.
그곳에서 가장 거대한 세력을 지닌 나라는 발루아 왕국이다.
그 발루아 왕국에서도 가장 남쪽.
그러나 밝혀지지 않은 괴이로 가득한 수해(樹海)보다는 위.
그곳에 가스코뉴 공국이 자리하고 있다.
‘남부의 패자(霸者), 가스코뉴.’
서쪽의 야만 부족.
동쪽의 오랜 숙적 아키텐.
남쪽 수해의 불가사의한 괴물.
그리고 공국의 드넓은 곡창지대를 차지하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북쪽의 야심가들.
‘공국의 안전을 위해선 강력한 군대 육성이 필수적이다.’
가스코뉴 공작령이 막강한 군세를 보유하게 된 배경이었고.
그러다 보니 공국엔 영웅급에 근접한 달인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공국 최고의 기사라면 역시 붉은 기사단의 단장, 미카엘 경이지!’
‘수해의 수비대장인 스테판 변경백도 만만치 않을걸?’
‘무슨 소리! 공국 최고는 누가 뭐래도 북경 수비 총사령관 브누아 방백이다!’
그래서 공작의 알현실로 향하는 아틸라는 자신을 처리할 인물로 롤랑이 누구를 간택했을지 쉬이 짐작할 수 없었다.
‘떠오르는 인물이 한둘이어야지.’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자리를 쉽게 비울 수 없는 자들.
사실 누구라도 상관은 없다.
‘걍 쳐죽이면 되니까.’
그때 아틸라의 발목을 익숙한 감각이 톡톡 건드렸다.
“엥? 너 어떻게 들어왔냐.”
새끼곰이 자신을 올려보며 헥헥 혀를 내밀고 있었다.
“흐미, 이놈의 곰새끼. 깜짝 놀랬네.”
“곰새끼가 뭐냐. 천박하게.”
“아니 이름이나 지어 주고 그런 소릴 하십쇼. 아틸라 님도 ‘야’, ‘너’, ‘얌마’ 이렇게 부르시지 않습니까.”
오토의 말이 그럴싸하게 들린 건 처음이었다.
새끼곰도 맞는다는 듯 혀를 더욱 길게 빼냈고.
“흠. 이름이라.”
“곰새끼 어떻습니까.”
“뒤질라고.”
“……그럼 곰탱이?”
“넌 그냥 닥치고 있어라.”
아틸라는 새끼곰에게 어울릴 만한 이름을 생각해 보았다.
그의 입에 미소가 맺혔다.
‘곰이라면 역시 앞발.’
“펀치. 네 이름은 이제 펀치다.”
이름이 마음에 든 듯 펀치가 끼아옹! 하고 울었다.
그 소리에 안내를 맡은 병사도 펀치의 존재를 눈치채게 됐지만 다행히 그는 동물을 사랑하는 어리숙한 청년이었다.
[ 펀치가 이름을 얻었습니다. ]
‘응?’
[ 펀치가 환수로 등록되었습니다. ]
[ 그동안의 경험치를 일괄 정산합니다. ]
[ 레벨이 올랐습니다. ]
[ 레벨이…… ]
펀치의 스테이터스창과 함께 레벨업 메시지가 떠올랐다.
‘오. 능력치.’
펀치의 능력치는 제법 준수했다.
아직 조그만 강아지 정도 크기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오동나무의 세 기사 정도 무력은 될 듯했다.
‘하긴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그렇게 뛰어다녔으니.’
그동안 펀치에게 숨통을 끊긴 적들도 상당수.
펀치는 막타 치기를 좋아했다.
‘그게 다 경험치를 위한 본능이었던 건가.’
미소 짓던 아틸라의 표정이 희미하게 변했다.
펀치를 볼 때마다 지구에 두고 온 고양이가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잘 있겠지. 그래. 스트리트 출신이니 악착같이 살아 있을 거야.’
그러는 사이 일행은 알현실에 도착했고.
펀치는 눈치 좋게 아틸라의 망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대가 도살자인가.”
롤랑 가스코뉴는 벌써 공작이라도 된 것처럼 거만하게 앉아 있었다.
아틸라는 롤랑 주위로 도열한 이들을 살폈다.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기사단장 미카엘.’
예상대로 스테판 변경백과 브누아 방백은 보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주위를 살피던 아틸라의 시선이 한 사내 앞에 고정됐다.
‘비두킨트?’
* * *
비두킨트.
가스코뉴 공국과 북으로 국경을 맞댄 툴루즈 백작령에서 주로 활동하는 용병으로.
‘머리 가죽 수집가’라는 다소 웃기면서도 무시무시한 이명을 지닌 사내다.
‘그, 그만……!’
‘제발 자비를……!’
‘차라리 그냥 죽여 줘!’
그는 자신이 사냥한 자들의 머리 가죽을 산 채로 벗기는 것을 즐겼는데.
그렇게 모은 가죽은 평범한 교회 하나쯤은 틈새 없이 도배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다고 한다.
‘오. 신이시여!’
실제로 그의 장난질에 어느 마을 성직자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건 유명한 일화.
그런 그가 자신의 용병단을 이끌고 나타났다.
‘저자가 그 도살자란 말이지.’
지금이라도 달려가 머리 가죽을 벗겨 내고 싶다.
하지만.
‘참아야지. 여기서 난리를 피울 수는 없으니.’
이곳은 남부의 패자 가스코뉴 공국의 심장부.
제아무리 자신이라도 말썽을 부린다면 목숨 건지기 어려울 거다.
운 좋게 도주한다 해도 평생 추격자가 따라붙겠지.
‘그런 귀찮은 일은 사양이다.’
게다가 롤랑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키고 선 사내.
‘붉은 기사단의 단장 미카엘.’
그의 가문이 오랜 세월 가스코뉴 공작가의 충신이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
또한 미카엘의 검 실력이 자신에게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 역시 비두킨트는 숙지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하려 하면 바로 검을 뽑아들 테지.’
비두킨트가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가는 동안 롤랑과 작센은 어린아이 같은 말싸움을 시작했다.
“작센 네 이놈! 어찌하여 아버지를 독살한 것이냐!”
“지랄하지 마라! 네놈의 짓이라는 걸 길거리 개새끼 한 마리까지 다 알고 있으니!”
“공국의 군주 앞에서 무엄한지고!”
“아버지를 독살한 패륜아 주제에 군주라고? 까고 있네!”
“저런 발칙한……!”
새빨갛게 열이 찬 롤랑이 즉각 작센의 목을 벨 것을 명령했다.
“이, 일공자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측근들이 앞 다퉈 만류했지만 허옇게 눈알을 까뒤집은 롤랑은 요지부동이었다.
“쳐라! 당장 놈의 목을 치라고!”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작센은 재판을 받아야 하고, 형의 집행은 그 뒤에 이루어져야 한다.
제아무리 차기 군주의 명이라 해도 공국의 규율은 지켜져야 하는 법.
비두킨트가 나섰다.
“제가 목을 베어 오겠습니다.”
“무엄하다! 용병 나부랭이 주제에 감히 공국의 이공자를 해하겠다는 것이냐!”
미카엘의 노성에 비두킨트가 심드렁하게 답했다.
“방금 일공자께서 명하시지 않았습니까.”
비두킨트가 한 걸음 더 나서자 미카엘이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그 모습에 멈칫한 비두킨트가 롤랑을 돌아봤다.
“차기 군주께서 결정해 주시지요. 죽입니까 맙니까?”
“죽여라!”
“명 받들겠수.”
비두킨트가 표범처럼 몸을 날렸다.
미카엘이 소리쳤다.
“막아라! 놈이 이공자를 해하지 못하게 해라!”
병사들이 비두킨트에게 달려들었다.
비무장이었던 비두킨트는 앞장선 병사 하나를 주먹으로 쓰러뜨린 뒤 검을 빼앗았다.
난투가 시작됐다.
‘완전 개판이네.’
아틸라는 슬슬 자신도 무기를 들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망토를 들추며 속삭였다.
“펀치.”
끼아옹! 펀치가 어디론가 달려갔고, 교대하듯 비두킨트의 부하들이 알현실로 들이닥쳤다.
그야말로 아수라장.
“으아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요!”
혼비백산한 오토와 작센을 붙잡아 구석으로 이동하던 아틸라는 병사들 속에서 묘한 움직임을 포착했다.
그들은 언뜻 비두킨트의 부하들과 생사를 건 혈투를 벌이는 듯했지만.
‘싸우는 척만 하고 있다. 게다가.’
놈들의 시선이 희끗희끗 이쪽을 향한다.
녀석들이 주시하는 건 작센도, 오토도 아니었다.
‘나를?’
그들이 일제히 달려왔다.
어느새 놈들의 손엔 다른 무기가 들려 있었고 복장도 바뀌었다.
아틸라는 그들을 알아보았다.
‘하싸씬!’
쇄도하는 단검을 아틸라는 가볍게 피해 냈다.
그러고는 상대의 팔목을 붙잡아 분지른 뒤 목을 잡아 뜯었다.
“크헉……, 끄꺼꺽……!”
분수처럼 피를 뿜으며 살수가 쓰러졌다.
떨어진 단검을 주운 오토가 작센의 포승줄을 끊은 뒤 이리저리 단검을 겨누며 소리쳤다.
“저, 절대 내 뒤에서 도망치지 마쇼!”
‘어떻게 된 거지? 왜 하싸씬이. 설마 롤랑이 사주한 건가.’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니 무엇보다 이상한 건 롤랑이었다.
‘약이라도 처먹은 건가. 왜 저 난리를 피우는 거야!’
작센을 이 자리에서 죽이라 명령한 것도, 그걸 비두킨트 같은 용병에게 맡긴 것도 평소의 롤랑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행동.
‘애초에 비두킨트 같은 자가 여기 있는 것부터가 에러야.’
아틸라는 롤랑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비두킨트에게 일을 맡길 순 있을지언정 이런 자리에 초대할 리는 만무하다.
“끄꺼꺼억……!”
살수들의 목젖을 연이어 뜯어낸 아틸라의 시선이 롤랑을 찾았다.
검을 뽑아든 미카엘 뒤에서 작센을 죽이라며 고래고래 소리치는 사내.
그의 시선도 아틸라를 향했다.
‘어이. 재밌지?’
자신을 향해 입모양으로 속삭이는 그를 본 순간 아틸라는 그가 롤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심안!’
[ 권능, 심안을 활성화할 수 없습니다. ]
[ 심안은 원작자의 세계와 상대의 세계가 강한 교감을 일으켰을 경우에만 발동되는 제한적 권능입니다. ]
‘뭔 개소리야!’
첨예한 살기가 아틸라의 이마를 노리며 쏘아졌다.
아틸라는 반사적으로 목을 젖혔고, 방금 전까지 그의 머리가 있던 자리 위로 사슬낫이 지나갔다.
투덜대는 목소리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잘도 피하네 정말.”
“전부 네가 데려온 거냐?”
“임무니까.”
“의뢰인이 누구지?”
“설마 살수가 의뢰인의 신원을 밝힐 거라 생각하는 거야?”
카스피가 웃었고, 그걸 보며 아틸라도 웃었다.
“웃지 마 아틸라. 정드니까.”
“그 이름은 라시드에게 들었나.”
“네 뒤에 있는 얼간이에게 들었지.”
얼간이라는 말에 오토가 발끈했지만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물론 아빠한테도 들었고.”
“뭐라던가.”
“무슨 일이 있어도 아틸라라는 사내만은 상대하지 말라고.”
“듣는 편이 좋았을 텐데.”
“아까도 말했듯 임무니까. 게다가.”
사슬낫이 쇄도했다.
“아빠는 이제 하싸씬이 아니거든.”
퍼엉! 그녀 뒤의 배경이 하얗게 변했다.
‘연막술!’
사슬낫에 이어 단검이 쇄도했지만 아틸라는 모두 회피했다.
카스피가 분한 듯이 소리쳤다.
“덩치는 산만 한 게 미꾸라지처럼!”
타오르는 카스피의 눈빛 속에서 아틸라는 낯익은 감각을 포착했다.
얼마 전 만난 샤를에게서도 느껴지던 그것.
무언갈 깨달은 아틸라가 그녀에게 심안을 시전했다.
주르륵 상태창이 떠올랐다.
‘됐다!’
미래의 영웅답게 준수한 카스피의 능력치.
그 아래엔.
- 이 자식 진짜 괴물이네.
카스피가 내뱉는 마음의 소리, 심언(心言)이 있었다.
- 이 정도면 스승님보다도 강한 거 아냐?
- 하아닛 내가 무슨 불경한 소릴! 정신 차려 카스피!
- 절대 스승님보다 강할 리 없지! 암암!
그 말대로 카스피의 스승은 엄청난 강자다.
무려 하싸씬을 이끄는 7대 마스터 중 하나였으니까.
‘사슬낫의 사바흐.’
얼마큼 강하냐면.
이 시점의 샤를이라면 결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
‘심지어 기습을 허용한다면 샤를도 꼼짝없이 당하고 말 거다.’
한 마디로 사슬낫의 사바흐는 아틸라 역시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내.
청천벽력과도 같은 메시지가 떠오른 건 그때였다.
- 흐에에엣! 스승님이 왜 여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