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 불사의 마법사 (1)
퍼어엉! 샤를의 몸이 날아갔다.
수차례나 바닥을 구른 그의 몸이 시체처럼 늘어졌고.
그런 샤를을 향해 아틸라가 터벅터벅 발을 움직였다.
“……!”
공작군과 백작군의 병사들은 숨죽인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아틸라와 샤를이 검을 맞댄 이후 싸움을 중단했다.
어느새 그들은 전쟁에 참여한 병사가 아닌, 두 위대한 영웅의 결투를 지켜보는 관객이 되어 있었다.
“어이. 살아 있냐?”
대자로 뻗은 샤를에게 용아귀를 겨누며 아틸라가 말했다.
샤를의 능력치를 확인한 순간부터, 그리고 그와 본격적으로 검을 섞은 뒤부터 아틸라는 샤를이 아직 자신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마음의 결정을 내릴 시간이 필요했을 뿐.
무겁게 깔린 정적 속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도, 도살자가 사자왕을 쓰러뜨렸다!”
“저 사자왕 샤를 아인하르트를……!”
“오동나무가 금사자를 무찔렀다!”
“오, 오, 오 오동나무 용병단이여 영원하라아아아!”
마지막 외침의 주인공은 핏물과 피로가 뒤섞인 얼굴에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환히 웃는 오토였다.
* * *
베르트랑 영주성의 지하 감옥.
퀴퀴한 독방 안에서 창살 너머의 하늘을 올려 보던 촌장 리베르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포도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여전하네. 리베르.”
갑작스레, 더욱이 그것이 자신 외엔 아무도 없던 실내에서 들려온 목소리였음에도 리베르는 놀란 기색이 없었다.
네모반듯한 하늘에 술병을 부딪으며 리베르가 말했다.
“봐줄 것 하나 없는 촌이지만 이것만큼은 제법이거든.”
“그래서, 어땠지?”
“네 말대로 재밌는 아이더군.”
술병을 비운 리베르가 무언가 중얼거리자 마법처럼 병 안이 액체로 채워졌다.
그의 시선이 찰랑이는 수면에 고정됐고, 점차 한 사내의 얼굴이 그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긴 금발에, 바다처럼 푸른 눈을 가진.
“동쪽에도 흥미로운 녀석이 등장한 모양이던데.”
그 말에 상대가 다소 과장스럽게 눈동자를 키웠다.
“흐응? 태평하게 술이나 퍼마시며 허송세월하는 줄 알았더니.”
“그 자유로운 생활도 이제 끝낼 때가 온 것 같군.”
“촌장 놀음은 질린 게야?”
리베르가 처음으로 상대를 돌아봤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설산처럼 희끗했던 머리칼과 주름진 얼굴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긴 흑발에 심연처럼 깊은 눈을 가진 젊은이가 흥미 가득한 얼굴로 입가를 올렸다.
“그럴지도.”
그 말을 끝으로 푸드득, 날갯짓 소리와 함께 리베르가 사라졌다.
그가 남긴 검은 깃털 하나를 허공에서 잡아챈 바토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는가 싶더니 그녀의 몸도 자취를 감췄다.
* * *
사자왕이 도살자에게 패했다는 소문은 날개 돋친 듯 퍼져 나갔다.
“사자왕 샤를이 졌다고?”
“난 그를 본 적이 있어. 정말 귀신같은 검술이었다고!”
“그런 사자왕을 이겼다는 건……!”
자연스레 사람들의 관심은 도살자와 그가 소속된 오동나무 용병단에 쏠렸고.
“도살자는 어디 출신이지?”
“오동나무 용병단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야?”
“그 정도의 용병단이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다니.”
덕분에 오토는 매일매일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
“이거 이번 전쟁만 끝나면 몸값이 아주 제대로 오르겠습니다 아틸라 님. 으하하하하!”
“더러우니까 입에 침 좀 닦아라.”
“이참에 왕사자 새끼 한 번 더 발라 버리죠? 운이 좋았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헛소문도 잠재워 버릴 겸 말입니다.”
“운이 좋았던 건 사실이야.”
지금의 샤를은 전성기에 비하면 어린아이 수준과 같았으니까.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제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단 말입니다. 아틸라님이 그 무지막지한 도끼를 양손에 들고 풍차처럼 팔을 휘두르는.”
그 모습을 흉내 내며 오토가 양손을 휘적휘적 돌려댔다.
“아 그만두쇼!”
“대장! 무슨 허수아비 같소!”
부하들의 야유에도 오토는 그 괴상한 동작을 멈추지 않았고.
그러자 눈치 빠른 세 기사 중 하나가 그것에 얻어맞는 시늉을 하며 대자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기다렸다는 듯 오토가 검을 뽑아 겨누며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이. 살아 있냐?”
콧구멍까지 벌렁이며 내뱉은 그 말에 자리에 있던 용병들이 배를 잡고 쓰러졌다.
오토도 자신의 연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손뼉을 치며 킬킬댔다.
한 대 쥐어박고 멈추게 할까 생각하던 아틸라는 그만두었다.
언제 죽을지 모를 전장 위에 피어난 웃음꽃을 굳이 꺾을 필요는 없으리라.
“근데 사자왕 말입니다. 아틸라 님께 그렇게 터지고도 아주 말짱한 모양입니다.”
오토의 말대로.
부상에서 회복한 샤를은 이전과 다름없이 전장을 휩쓸고 다녔다.
‘그리 쉽게 나을 상처가 아닌데. 역시 타고난 신체가 개사기급이야.’
원작에서도 샤를은 전장을 종횡무진하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는 못한다.
가스코뉴 공작군이 지닌 거대한 군세는 뛰어난 영웅 한 명의 손에 무너질 만큼 약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공작 역시 샤를의 존재 탓에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아군 병력을 좌시할 수만은 없었고.
‘휴전을 제안하는 바요.’
결국 수개월간 이어진 전쟁은 휴전으로 마무리된다.
이번에도 그래야 하는데.
‘빌어먹을 샤를이 너무 강해졌어.’
루악을 비롯한 금사자 단원들을 상당수 쓰러뜨렸지만.
반대로 샤를 개인의 무력은 이 시기의 원작보다 강해졌다.
문주크와 아틸라와의 대결이 그를 더욱 성장시킨 것.
‘어쩌지. 또 한 번 놈들을 흔들어야 하나.’
그러나 이번엔 정말로 위험했다.
‘루악과 부하들을 죽인 걸 보고 이를 갈고 있을 테니까.’
또한 샤를이 강해진 만큼 피핀도 강해진 건 당연한 수순이고.
무엇보다 샤를은 더 이상 용병단을 분리 운용하지 않았다.
‘녀석과 다시 부딪치면 이번엔 정말 어찌 될지 몰라.’
승부도 장담할 수 없었고, 설사 이긴다 한들.
‘녀석을 더욱 강해지게 만들 뿐이지.’
결국 아틸라는 이전처럼 금사자 용병단을 피해 유격전을 펼쳤고.
점점 세를 불린 오동나무 용병단과 문주크의 야만 부족은 샤를에게 당한 아군과 비례하는 적군을 섬멸하며 전쟁의 균형을 유지했다.
그러던 중.
“뭐?”
원작에서는 없었던 엄청난 사건이 아군 진영을 뒤흔들었다.
“가스코뉴 공작이 죽었다고?”
* * *
‘아버지를 독살한 건 형님이다. 틀림없어!’
가스코뉴 공작의 둘째 아들 작센은 아버지의 비보를 듣고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후계구도에 변화가 생긴 걸 눈치채고 선수를 치다니! 내가 너무 안일했어!’
작센이 문주크와 야만 부족의 힘을 끌어들이지 못했다면 공작군은 큰 낭패를 봤을 것이다.
그래서 가스코뉴 공작은 첫째인 롤랑에게 주려던 후계 지위를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러던 중 음식에 탄 독을 먹고 급사하고 만 것.
‘빌어먹을.’
이런 전쟁 중에 군주의 자리를 장기간 비워 놓을 수는 없다.
당연히 롤랑의 측근들은 그를 새로운 군주로 추대할 것이고.
후계 싸움에서 밀린 자신의 앞날은 불 보듯 뻔한 것.
‘아버지와 같은 꼴을 당하겠지.’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고, 작센은 생각했다.
손에 닿을 듯했던 후계 자리를 뺏길 생각도 없었다.
그날 밤 소수의 부하만을 거느린 작센이 어디론가 말을 달렸다.
* * *
“롤랑 가스코뉴를 없애 달라고?”
이른 새벽, 자신을 찾아온 작센을 보며 아틸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소. 그가 아버지인 가스코뉴 공작을 독살한 게 틀림없소.”
“증거는 있소?”
그렇게 물었지만 아틸라 역시 롤랑이 범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증거는 없소. 그러나 그는 그런 인물이오. 검은늑대 부족의 블레다처럼 말이오.”
작센은 검은늑대 부족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검은늑대의 아틸라. 당신 역시 나와 비슷한 처지였으니 이해해 줄 거라 믿소만.”
도살자를 추적해 그가 문주크의 아들 아틸라란 것을 밝혀내고.
그 정보를 문주크에게 흘려 그와 그의 부족이 전쟁에 참여하도록 부추긴 건 모두 작센의 솜씨였다.
‘어차피 작센 녀석을 돕긴 해야 하는데.’
원작에서 가스코뉴 공작이 죽고 새로이 공작 자리를 차지하는 건 롤랑이 아닌 작센이다.
겉과 속이 다른 롤랑의 면모를 가스코뉴 공작이 어떠한 계기로 알아채기 때문인데.
아무튼 공작이 죽는 것은 당초 이렇게 이른 시기가 아니었으니 후계 자리라도 작센이 차지하도록 만드는 게 역사 왜곡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방법이리라.
‘그래도 공짜로 해 줄 순 없지.’
“조건이 있소.”
아틸라의 말에 작센은 기쁨 반 두려움 반의 표정이 되어 물었다.
“말해 보시오.”
“첫째. 서쪽 야만족의 땅을 그들의 자치령으로 인정해 주시오.”
문주크는 놀란 얼굴로 아틸라를 돌아봤다.
아틸라의 요구는, 문주크를 가스코뉴 공작이나 아키텐 백작과 같은 ‘일국의 군주’로 인정하고 대우하라는 의미였다.
물론 지금도 야만족의 땅이 가스코뉴 공작령에 속해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것과 독립국으로 대우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작센에겐 팔 한 쪽을 떼 주는 것만큼이나 뼈아픈 일이지.’
“아틸라 공. 그건 왕의 윤허가 필요한 일이오.”
작센의 말대로다.
이 요구는 절차적으로 왕의 윤허가 필요한 일.
그럼에도 아틸라는 웃었다.
“날 바보로 아는 거요?”
“그게 무슨.”
“이곳은 황제에게 모든 힘이 집약된 북부 대제국이 아니지 않소.”
작센의 얼굴이 흠칫했다.
“남부의 패자라 불리는 가스코뉴의 군주가 입김을 넣는다면, 그런 형식적인 절차쯤이야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을 텐데.”
아틸라의 눈이 작센을 똑바로 향했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작센 가스코뉴 ‘차기 군주’께서는.”
아틸라는 작센을 이공자가 아닌, 차기 군주라 불렀다.
그것의 무게감에 작센은 쉬이 입을 열 수 없었다.
아틸라는 침착하게 작센의 대응을 기다렸다.
‘이 요구 사항은 반드시 받아 내야 한다.’
원작에서 야만족의 땅을 섬멸하는 건 다름 아닌 가스코뉴 공작군이니까.
“……알겠소. 두 번째는 뭐요.”
“베르트랑 남작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소. 전쟁이 끝난 뒤 이자를 새로운 영주로 임명해 줬으면 하오.”
멍하니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오토는 모든 이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기겁을 하며 일어났다.
“지, 지지지, 지금 내 얘길 하는 거였습니까?”
“그럼 너지. 너 원래 영주였잖아.”
“그, 그건 오래전 얘긴데. 게다가 지금 오동나무 용병단도 꽤 잘나가고 있고.”
“그래서 싫어?”
“아아니 누가 싫댔수? 거참 성미도 드럽게 급하시네. 당최 생각할 시간을 안 주신다니까.”
오토가 머릿속에서 주판을 두들기는 동안 아틸라는 다시금 작센을 마주 보았다.
“두 번째는 딱히 어려운 조건도 아니군. 세 번째는 없소?”
“왜 없겠소.”
“……말해 보시오.”
아틸라가 씩 웃었다.
“건강하고 날랜 말 한 필과, 금화나 두둑이 챙겨 주시오.”
“그거야말로 어렵지 않은 일이군.”
“계약은 성사된 거요?”
작센은 미소 띤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아틸라가 그 손을 마주 잡았다.
* * *
며칠이 지나지 않아 전쟁은 종료됐다.
가스코뉴 공작의 대리인 자격으로 롤랑은 아키텐 백작을 만났고, 계속되는 소모전에 지친 두 사람은 휴전에 합의했다.
‘휴전은 성립되었소.’
이제 롤랑에게 남은 건 눈엣가시 작센을 처리하는 것과, 아버지의 오랜 숙원이던 서쪽 야만족의 땅을 정벌하는 일뿐.
‘오동나무 용병단과 도살자 역시 싹을 잘라 두는 편이 좋겠지.’
공작 살해범 작센 가스코뉴를 현상수배한다는 포고문을 내린 롤랑은 직위 승계를 앞둔 어느 날 오동나무 용병단을 불렀다.
구실은 전쟁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한 용병단의 노고를 치하한다는 것이었지만.
롤랑의 흑심을 아틸라가 모를 리 없었다.
“잠깐. 무기를 소지한 채 들어갈 수 없다.”
완전무장한 거구의 성문지기가 아틸라와 용병단을 가로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