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14화 (14/425)

014. 패왕 VS 도살자

오토 일행이 사라진 뒤 카스피는 요리조리 몸을 움직여 포박을 풀어냈다.

“저런 괴물이 있었을 줄이야.”

조금 전 싸웠던 사내의 무지막지한 무력을 떠올리던 카스피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라시드는 몰랐지만 카스피는 1급 살수의 경지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던 중 라시드로 의심되는 자가 가스코뉴 공작과 아키텐 백작 간의 영지 전쟁에서 허가 없이 활동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고.

카스피는 자진해서 임무를 맡았다.

“아틸라, 라고 했던가.”

‘아틸라 님!’

그녀는 오토가 외쳤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근데 왜 날 죽이지 않은 거지.”

고개를 갸웃대던 카스피가 휘익, 손피리를 불었다.

잠시 후 수풀을 헤치며 그녀의 말이 달려왔다.

“어디 한번 확인해 볼까.”

말에 오른 카스피는 남쪽으로 달렸다.

* * *

도끼가 검에 닿은 순간 폭발적인 기운이 사방으로 뻗쳤다.

그 바람에 아틸라의 투구가 벗겨졌고, 한결 시원해진 시야를 뚫고 등장한 건 예기치 않은 메시지창이었다.

[ 시스템 경고 ]

[ 시나리오의 주인공과 조우했습니다. ]

[ 주인공과 원작자의 두 세계가 충돌을 일으킵니다. ]

찌릿한 두통이 아틸라를 덮쳤다.

머릿속에서 폭풍 같은 마찰이 이는 게 느껴졌다.

‘크윽……! 이거…… 뭐야……!’

그간 수많은 전투를 치러 온 아틸라로서도 참기 어려운 통증.

그때였다.

[ 원작자 보호 프로그램 발동 ]

[ 전지적 권능 코드를 입력합니다. ]

‘전지적…… 권능 코드……?’

기묘한 감각이 몸 안에서 꿈틀댔다.

수십 개의 다리를 지닌 벌레가 장기 속을 기어 다니는 듯한.

낯설면서도, 익숙한 이 감각은.

‘……이건.’

아틸라는 그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패영전의 게임화 계약을 마친 뒤, 그 빌어먹을 꼬마에게 당해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던 날.

땅속에 매장돼 있던 자신의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 시스템 경고 ]

[ 산소가 부족합니다. ]

이어 메시지의 틈새에서 모습을 드러내 자신의 입안으로 밀고 들어왔던.

길고 시커먼 벌레.

‘빌어…… 먹을……! 그게 꿈이 아니었던 건가……!’

아틸라는 심장을 움켜쥐었다.

그날처럼 몸을 움직이던 벌레는 잠시 후 어딘가 안착하듯 똬리를 틀었고.

메시지가 생성됐다.

[ 전지적 권능 코드 입력 완료 ]

[ 원작자의 뇌내 충격이 크게 완화됩니다. ]

그 말처럼 아틸라는 두통이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이 빠르게 상대를 훑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에겐 10초 이상으로 길게 느껴졌던 고통이 실제론 1초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는 것을.

‘녀석은 느끼지 못한 건가.’

샤를에게선 아무런 특이점도 감지할 수 없었다.

하긴 게임처럼 상태창이 보이고 경험치를 쌓아 레벨업 하는 것 역시, 패영전 세계에서 오직 자신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이리라.

[ 두 세계의 충돌이 새로운 권능을 일깨웁니다. ]

‘뭐?’

[ 원작자 권능이 개방됩니다. ]

[ 두 번째 권능 ]

[ 심안(心眼) ]

새로운 상태창이 떠올랐다.

이름, 레벨, 직업을 비롯해 근력, 민첩, 체력, 마력 등의 스테이터스들.

그건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샤를의 능력치?’

상세 능력치를 살펴보려는 순간 샤를의 검이 난입했다.

아틸라는 용아귀를 들어 방어했다.

양손으로 막았는데도 어깨가 흔들릴 만큼 매서운 기운.

‘빌어먹을 주인공빨.’

아틸라는 한 손으로 용아귀를 드는 것을 포기했다.

쌍수만의 변화무쌍한 이점은 날아갔지만 양손으로 파지한 용아귀의 견고함은 샤를의 연속 공격을 안정적으로 막아 냈다.

‘이제 좀 살펴볼까.’

날아드는 검날을 방어하며 아틸라는 틈틈이 능력치를 확인했다.

기본 스테이터스를 지나 추가 특성을 파악하던 아틸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 내가 만들긴 했지만 너무 심각하게 잘났네.’

그러다 맨 아랫줄을 확인한 아틸라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응?’

- 이자가 도살자인가.

- 과연. 문주크 이상의 괴력이로군.

‘이건 뭐지?’

설마.

‘심안은 상대방의 머릿속 생각까지 읽어 낼 수 있는 건가!’

- 문주크는 이자를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가.

- 전투 방식이 유사하다. 커다란 도끼를 사용하는 것도. 지금 보니 분위기마저 닮았군.

- 그렇다는 것은.

아뿔싸.

문주크와 부자지간인 게 들켜 버렸다.

앞으로 뭔가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 둘은 형제지간이 틀림없다.

“아니야 이 새끼야!”

아틸라가 벼락같이 소리치며 용아귀를 휘둘렀다.

문주크의 나이는 마흔여덟.

얼마 전 오토와 나눴던 대화가 머리를 스쳤다.

‘그놈의 어르신 소리 좀 집어치워. 나 열여섯 살이다.’

‘응? 열여섯? 마흔여섯이 아니고?’

“빌어먹을 놈들!”

샤를은 민첩한 몸놀림으로 용아귀를 회피하고 재차 날아오는 공격마저 거리를 벌려 피했다.

샤를이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 역시 힘겨루기로는 상대를 당할 수 없다는 걸 직감한 것.

- 왜 이렇게 흥분한 건가.

- 그렇군. 내가 녀석의 동생을 쓰러뜨렸기 때문에.

“우라질 놈의 새끼. 반드시 쳐죽여 주마.”

풀어진 긴 머리로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는 아틸라의 얼굴을 샤를은 제대로 식별할 수 없었다.

지저분하게 자란 수염과 문주크보다 커다란 덩치, 보다 뛰어난 실력 탓에 형이라 어림짐작했던 것.

물론 아틸라는 그런 속사정을 몰랐다.

“흐아아압!”

질풍처럼 용아귀를 휘둘렀다.

샤를은 교묘히 힘 싸움을 피하며 모든 공격을 비껴 냈다.

‘무시무시한 완력이다. 정면으로 받아 냈다간 그길로 몸이 두 쪽 나겠군.’

그러나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아틸라의 파상적인 공세를 점점 더 손쉽게 막아 내고 있었다.

‘느껴진다.’

샤를은 자신의 몸을 둘러싼 어떤 절대적인 존재의 가호를 감각했다.

자신에 찬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도 난, 강해지고 있다.’

* * *

“흐응?”

어두운 방 안에서 수정구를 들여다보던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아틸라를 제쳐두고 한참 동안 샤를을 주시했다.

“저 아이. 설마 전사신 아레스의 종복인 겐가.”

다시금 아틸라에게 시선을 돌린 바토리가 재미있다는 듯 입가를 올렸다.

“쯔쯔쯔……. 이를 어찌할꼬 야만전사야. 이번만큼은 너도 고전을 면치 못하겠구나.”

* * *

바토리의 예상대로.

호각세를 이루던 접전은 점차 샤를 쪽으로 기울었다.

“오늘은 운이 좋군. 이런 대단한 전사를 둘씩이나 상대하게 될 줄이야.”

아틸라는 언젠가부터 말이 없었다.

그저 이를 악다문 채 샤를과 팽팽한 공방을 이어갔다.

“갑자기 벙어리라도 된 것인가.”

그렇게 말하던 샤를은 눈앞의 사내에게서 묘한 끌림을 느꼈다.

그동안 만나 온 적들, 단의 동료들, 오랜 친우인 피핀에게서 느껴지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확연히 다른,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 보는 신기한 감각.

샤를은 그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난 녀석을, 호적수로 받아들인 것인가.’

샤를이 아틸라에게 끌림을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패영전 시나리오의 창조자와 그것을 이끄는 주인공.

두 사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으니까.

“재미있군.”

샤를은 웃었다.

전쟁고아.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생명을 앗으며 살아야 했던 소년.

그에게 검이란 생존이었고, 새로운 세상을 향한 출구였다.

“너를 쓰러뜨리고.”

그의 검세가 더욱 매섭게 변했다.

“난 패왕의 길에 서겠다.”

아틸라는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음을 감각했다.

굳이 몸으로 느낄 것도 없었다.

상태창에 표기된 샤를의 능력치가 뚜렷하게 상승하고 있었으니까.

‘빌어먹을.’

어금니를 깨물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어선 안 된다.

‘하지만.’

샤를은 원작자인 자신의 내면이 누구보다 깊게 투영된 인물.

다시 말해 아바타와 같은 존재.

‘샤를……. 넌 고귀한 분의 피를 이어 받았단다……. 절대 그걸 잊지 말렴…….’

‘엄마……! 흐흑! 엄마아!’

그가 겪은 불행을 샤를도 겪었고.

‘요, 용서해 주세요.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더러운 전쟁고아 주제에 감히 내 빵을 훔쳐? 어디 맛 좀 봐라!’

그가 지나온 가시밭길을 샤를도 지나왔으며.

‘하하하. 눈빛이 아주 독기로 가득 찬 꼬마로구나. 네 이름이 뭐냐.’

‘샤를…… 아인하르트.’

‘난 레온이다. 금사자 용병단의 단장, 레온 마그누스.’

만족스럽지 않은 현재를 보란 듯이 극복한 뒤.

‘검을 들어라!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마라!’

마침내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남부의 패왕 자리를 거머쥐는 자.

‘나는 크리엘도라 대륙 최초의 통일 제국을 세울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꿈꾸던 이상향이었고, 그가 써 내린 수백만 자의 활자 속에서, 샤를은 이뤘다.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그가 샤를이었고 패영전의 주인공이었다.

광활한 대륙을 탐험하고, 동료를 만나고, 적과 싸워 이겼다.

그렇기에.

그런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이를 쓰러뜨린다면.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모든 꿈이 잘게 조각날 것만 같은 두려움에 아틸라는 망설였다.

조금 전까지는.

시이이이잇!

샤를의 손끝에서 지금껏 본 적 없는 예리한 검로가 그어졌다.

인간의 한계를 극명하게 넘어선 그 움직임에 문주크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맛봤다.

‘저런 검세를 누가 막아 낼 수 있단 말인가!’

문주크는 무너져 가는 몸에 힘을 주었다.

움직여야 한다.

아틸라를 도와야 한다.

환청과도 같은 속삭임이 들린 건 그 순간이었다.

‘아버지.’

문주크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했다.

그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아틸라는 웃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똑바로 펼쳐진 아틸라의 왼손을 본 순간 문주크도 웃었다.

“도살자!”

샤를의 검이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아틸라의 목젖으로 쇄도했다.

그것을 막으려던 용아귀는 머리 위로 튕겨난 상태.

물론 도낏자루는 여전히 아틸라의 손에 쥐여 있었지만 턱밑까지 근접한 공격을 막아 내긴 역부족이었다.

‘이것으로 끝이다!’

샤를은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검이 도살자의 목젖을 꿰뚫고, 그곳의 틈새로 분수처럼 선혈이 튀어 오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였다.

파아앙!

묵직한 타격음이 샤를의 팔 아래를 울렸다.

시선을 내리깐 샤를은 문주크의 도끼가 어느새 도살자의 왼손에 틀어 잡혀 있는 것을 확인했고.

‘양손도끼를 한 손으로?’

힘차게 날아든 범아귀의 운동에너지를 이용하며 도살자가 풍차처럼 팔을 휘둘렀다.

“으아아아아!”

파캉! 샤를의 검이 머리 위로 튕겨났다.

그것은 아틸라의 목젖을 꿰뚫는 대신 아슬아슬 그의 이마를 스쳤고.

‘빗나갔다고?’

흩날리는 검은 머리칼 사이로 야수처럼 입을 찢어 웃는 아틸라의 얼굴이 극적으로 가까워졌다.

‘어느 틈에!’

샤를은 재빠르게 발을 놀려 물러났다.

그러나 극한까지 단련된 아틸라의 하체는 도주하는 샤를에게 한 걸음 더 접근하며 더욱 강한 회전을 머금었고.

‘위, 위험해! 이건 정말로……!’

샤를의 검에 튕겨난 것에 더해 범아귀의 관성까지 흡수한 용아귀의 칼등이.

“이거 맞고 그만 찌그러져 있어라!”

샤를의 흉부를 포탄처럼 강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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