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 패왕의 등장 (5)
아틸라 일행은 부대 복귀를 위해 말을 달리고 있었다.
“후아, 진짜 꼼짝없이 뒈지는 줄 알았네.”
“넌 좀 상대를 봐 가면서 나대라.”
“그런 빼빼 마른 꼬맹이가 그 정도 실력을 갖고 있을 줄 내가 알았수? 미리 말이라도 해 주시던가.”
“구해 줘도 난리네. 걍 아까 뒈져 버렸어야 이딴 소릴 안 듣는 건데.”
“아 물론 구해 주신 건 감사합죠 헤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아틸라 님.”
아틸라는 오토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왜 샤를은 직전까지 유격대를 분리 운용하지 않았던 걸까.’
신경 쓰이는 일은 또 있다.
그들은 이런 늦은 시간에 무리해서 이동 중이었다.
‘말도 사람도 잔뜩 지쳐 있었지.’
그런 강행군 속에서 피로를 무릅쓰고 유격대가 따로 앞장선다는 것은.
‘남부 전선에 그 정도로 급한 불이 떨어졌다는 것.’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이 시기의 남쪽에선 별다른 일이 없는데. 젠장. 또 뭐가 바뀐 거지?’
그때 까마귀가 날아왔다.
“엥? 암살자 양반이 또 뭘 보내온 거유?”
까마귀의 발에서 쪽지를 꺼내 읽던 아틸라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 즉시 말머리를 돌려 남쪽으로 달렸다.
“이런 염병할 또 어딜 가는 거요!”
* * *
‘이런 사내가 아틸라 말고 또 있었단 말인가.’
문주크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렀다.
‘아직 성년식도 치르지 않은 듯한 앳된 얼굴. 게다가 저런 왜소한 몸으로 어찌 이토록 패도적인 검술을 펼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그건 야만근육돼지 문주크의 기준이었고, 상대는 한 명의 숙련된 전사로서 손색없는 몸을 갖고 있었다.
그 순간 검이 난입했다.
문주크는 범아귀를 들어 막으려 했지만 검은 미끄러지듯 방어를 뚫고 그의 어깨를 베었다.
“평범한 가죽옷이 아닌 모양이군.”
문주크는 그리즐리의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일반적인 곰과는 비교를 불허할 만큼 질기고 견고한 그리즐리의 가죽은 상대의 공격력을 크게 완화시켰다.
바꿔 말하면 방어구가 아니었다면 치명상을 입었을 공격.
‘귀신같은 일격이다.’
검은늑대의 전사들처럼 힘을 바탕으로 한 공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 이상의 강대한 기세가 느껴졌다.
마치 신력(神力)과도 같은.
‘설마 전사신 티르께서 저자를 가호하고 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문주크의 추측은 맞았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위대한 신의 가호를 품고 있었고, 마침내 개화했다.
다만 그것이 야만전사들의 신인 티르가 아니었을 뿐.
“네 이름을 알고 싶다.”
문주크의 어눌한 공용어 물음에 상대가 답했다.
“샤를 아인하르트.”
“검은늑대의 문주크다.”
“넌 내가 겨뤄 본 전사 중에서 가장 강하군.”
엷은 미소를 띠며 샤를이 말했다.
“대륙에 너만큼 강한 자가 또 있는가.”
“광활한 대륙에 어찌 나 정도의 전사가 없겠는가. 게다가.”
“게다가?”
“난 이미, 나보다 강한 전사를 알고 있다.”
그 말과 함께 범아귀가 휘둘러졌다.
샤를은 허리를 틀어 피해 낸 뒤 반격에 들어갔다.
한 치의 군더더기도 찾을 수 없는 깔끔한 일격.
‘빠르다!’
그러나 상대는 검은늑대의 영웅 문주크.
재빨리 범아귀를 회수해 막아 낸 문주크가 선풍처럼 도끼를 휘둘렀다.
카캉! 금속성 소음을 울리며 샤를의 몸이 주르르 밀려났다.
“대단…… 하군.”
샤를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피했다고 생각했지만 도끼의 움직임은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백작에게 하사받은 플레이트 아머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내장을 토해 내며 쓰러졌을 터.
그리고 깨달았다.
‘녀석은 완전한 몸 상태가 아니다.’
움직임의 균형이 미묘하게 맞지 않는다.
만약 완전한 몸 상태였다면 조금 전 반격은 더욱 깊숙이 들어왔을 테지.
‘위험했군.’
놀란 건 문주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완벽한 반격이라 생각했건만.’
스치는 것으로 끝났다.
게다가 방어구 탓에 상처조차 입히지 못했다.
‘드워프의 솜씨로군. 검 실력만으로도 적수를 찾기 어려울 터인데 저런 방어구까지 갖추고 있다니.’
검 또한 보통의 무기는 아닌 듯했다.
그렇게나 범아귀와 부닥쳤는데도 흠집 하나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최상급 방어구와 무기. 그것을 압도하는 검술 실력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을 손에 쥔 전사가 아닌가.
샤를의 눈빛이 변한 건 그 순간이었다.
“몸 풀기는 여기까지다.”
그의 검이 문주크에게 겨눠졌다.
“끝을 내겠다.”
* * *
아틸라는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우거진 숲의 녹음을 뚫고 떠오르기 시작한 해는 동녘 하늘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빌어먹을. 곰탱이한테 당한 상처나 돌보며 쉬실 것이지 여긴 뭣하러!’
문주크와 샤를이 만나는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한다.
문주크의 실력이라면 쉽사리 샤를에게 당하진 않을 테지만.
‘샤를 역시 피로도가 극에 달한 상태일 테니.’
문제는 패영전의 주인공 샤를이 지닌 특별한 힘이다.
결론만 말하자면 녀석은.
‘싸울수록 강해진다.’
더구나 문주크처럼 강한 상대라면 더더욱.
아틸라가 샤를과의 조우를 피했던 것엔 그 이유도 포함돼 있었다.
‘샤를 녀석이 필요 이상으로 강해지면 문제가 돼.’
앞으로 샤를이 싸워야 할 세력들이 너무 쉽게 무너질 테니까.
그러나 아틸라가 가장 염려하는 건 문주크의 안위였다.
‘샤를 이 빌어먹을 자식. 딱 기다리고 있어라.’
그때 어디선가 표창이 날아왔다.
아틸라는 손도끼를 휘둘러 쳐냈다.
‘젠장 바빠 죽겠는데 뭐야!’
이번엔 측면의 나무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환장하겠네!’
말에 박차를 가하며 아틸라는 그것들을 피했다.
그러자 말의 이동경로를 예측한 것처럼 지면에서 뾰족한 송곳이 돋아났다.
이번엔 아틸라도 크게 놀랐다.
‘피해야 해! 지금 말을 잃으면……!’
그때였다.
[ 갑작스러운 위기 상황이 숨겨진 종족 특성을 일깨웁니다. ]
‘종족 특성?’
[ 동방 민족의 스킬을 개화합니다. ]
[ 유목민의 승마술 ]
새로운 지식과 경험이 머리에 차오르며 아틸라의 팔다리가 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어 묘기에 가까운 승마술을 펼치며 아틸라는 함정들을 돌파했다.
‘오 이거 뭐야!’
로또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원작에서 검은늑대 부족의 시조로 소개됐던 동방의 민족.
이후 흐지부지되어 등장조차 하지 않는 그들의 승마술이 이렇게나 대단하다니.
‘이것이 말로만 듣던 인마일체(人馬一體)의 경지인가!’
신이 나서 외쳤다.
“좋아좋아! 달려라! 하하하하하!”
새끼곰도 덩달아 신이 모양이었다.
끼아오오옹!
이후 몇 개의 함정이 더 있었지만 유목민의 승마술을 탑재한 아틸라를 막을 순 없었다.
여유를 찾은 아틸라는 그제야 함정들을 보며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가만. 이건 분명 하싸씬의.”
“용케 알았네?”
귓가에서 들려온 속삭임에 아틸라는 반사적으로 도끼를 휘둘렀다.
“어맛! 깜짝이야!”
놀란 목소리와 달리 아틸라의 공격을 가볍게 회피한 상대는 긴 사슬을 휘둘러 말의 앞다리를 묶었다.
비명을 지르며 말이 고꾸라졌다.
‘이런 빌어먹을!’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고 일어선 아틸라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의 눈이 충격으로 흔들렸다.
“뭐, 뭐야. 너 설마 카스피?”
“응? 나 알아?”
빌어먹을 실화냐?
저 녀석이 왜 지금 여기 있는 거야!
‘아틸라 님. 이제 그만해야 할 것 같습니다.’
‘교단에서 사람이 나온 듯합니다.’
라시드의 목소리가 머리를 스친 순간 상황은 파악됐다.
‘교단에서 나왔다던 살수가 바로!’
카스피 앗 딘.
훗날 샤를의 동료가 되는 하싸씬의 초특급 살수이자.
라시드의 외동딸.
“넌 뭐지? 날 어떻게 알아?”
카스피가 여기 온 건 라시드도 몰랐을 거다.
알았다면 그렇게 담담한 반응이었을 리 없거든.
어찌 됐든 노닥거릴 시간은 없다.
“단번에 끝내 주마.”
카스피에게 몸을 날렸다.
* * *
“이쪽이 맞는 겁니까 대장?”
“잔말 말고 따라오기나 해!”
오토와 세 기사는 아틸라의 뒤를 쫓고 있었다.
“염병 어딜 가면 간다고 말이나 하고 갈 것이지.”
투덜대던 오토는 오래지 않아 무시무시한 함정들을 발견했다.
“뭐, 뭐야 이건. 다들 조심해!”
“흐엑, 이게 다 뭡니까!”
조심조심 함정을 돌파한 오토 일행은 다시 말을 달렸고 곧 찾던 이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틸라 님!”
반갑게 손 흔드는 오토를 보자마자 그를 끌어내린 아틸라는 말 위에 올라 남쪽으로 질주했다.
옆의 나무 기둥엔 웬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사슬에 포박돼 있었고.
분통을 터뜨리며 오토가 소리쳤다.
“아니 시벌 기껏 쫓아왔더니!”
머지않아 해는 중천으로 떠올랐다.
아틸라의 귓가에 전장의 북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넌 뭐냐!”
멋진 투구를 쓴 기병 하나가 다짜고짜 아틸라에게 검을 휘둘렀지만 도끼질 한 방에 목이 달아났다.
“꾸에엑!”
기왕 이렇게 된 거 아틸라는 지쳐 쓰러지기 직전인 말을 버리고 상대의 말 위로 훌쩍 올라탔다.
‘오. 제법 좋은 말 같은데?’
새로운 말의 발놀림에 만족한 아틸라는 그대로 남쪽으로 직진했다.
누군가의 외침이 아련하게 등 뒤를 울렸다.
“지, 지휘관께서 전사하셨다!”
한편 몸이 가벼운 부하 둘을 말 하나에 함께 태운 채 죽기 살기로 아틸라를 뒤쫓던 오토는 눈앞의 상황을 보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런 미친! 같은 편 지휘관을 죽여 버렸잖아!’
아틸라가 죽인 자는 아키텐 백작군이 아닌 가스코뉴 공작군의 지휘관이었던 것.
“어, 어떡합니까 대장!”
“아틸라 님은 너무 눈에 띕니다. 오동나무 용병단원인 게 금세 밝혀질 거라고요!”
“우, 우리 모두 참수당할 겁니다!”
“빌어먹을……. 어쩔 수 없지.”
불행인지 다행인지 주변은 아키텐 백작군으로 가득했다.
바닥을 뒹굴던 백작군의 투구를 주워 쓴 오토는 아까부터 지휘관이 죽었다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전령의 목을 냅다 베었다.
그리고 외쳤다.
“쳐라! 저 비열한 가스코뉴의 침략자를 처단하라!”
뜨겁게 타오르는 오토의 눈이 부하들을 향했고, 그사이 투구를 바꿔 쓴 세 기사도 ‘타도 가스코뉴!’를 부르짖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목격자 제거 작전의 시작이었다.
* * *
“대족장 문주크. 너의 몸 상태가 완전했다면 결과는 달랐을지도 모른다.”
범아귀를 깃대처럼 땅에 박은 채, 문주크는 가까스로 자신의 몸을 가누고 있었다.
그런 문주크에게 검을 겨누며 샤를이 말했다.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무엇을 말인가.”
“네가 말했던, 너보다 강하다는 전사에 대해 알고 싶다.”
문주크가 웃었다.
희미하게 시작한 웃음은 점차 큰 소리로 변했고, 대답 듣는 것을 포기한 샤를이 마무리 일격을 날리려던 순간.
“뒤를 봐라.”
몸에서 발산된 격렬한 위험 신호와 문주크의 목소리가 울린 건 동시였다.
샤를은 뒤를 돌았다.
그의 시야를 채운 건 쇄도하는 말 위에서 몸을 날린 거구의 사내가 자신을 향해 맹렬하게 도끼를 휘두르는 모습이었다.
“샤를 이 새끼야아아아!”
샤를은 한눈에 상대를 알아보았다.
“도살자!”
불꽃의 소음을 울리며 그의 검이 용아귀와 부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