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 패왕의 등장 (1)
그리 긴 시간을 이곳에서 보낸 건 아니었지만, 아틸라는 소설과 현실이 다소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소설을 원작 삼아 만든 게임처럼.’
큰 줄기는 같지만 자잘한 세부 사항에서 차이가 나는 느낌이랄까.
이를테면 도적기사용병단장 오토는 원작에선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은 채 가스코뉴 공작군에 토벌된다.
그래서 아틸라는 패영전 역사의 개입에 더욱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럭저럭 아직까진 큰 무리 없이 가고 있는데.”
이 세계에 떨어진 후 일으킨 가장 큰 변화라면 역시, 군디카의 야망이자 가스코뉴 공작의 계획을 무산시킨 일.
원작에서 가스코뉴 공작은 그의 막강한 군세와 군디카의 야만 부족을 이용해 아키텐 백작령을 공격한다.
그는 아키텐 백작을 자신의 상대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 정도로 두 진영의 전력 차이는 극심했으니까.’
그러나 압승을 예상했던 가스코뉴 공작의 생각과 달리 전쟁은 치열한 접전을 이어 가게 되는데.
이유는 아키텐 백작의 군세 속에 엄청난 인물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샤를 아인하르트.’
녀석의 이름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전쟁.
그것이 바로 향후 벌어질 가스코뉴 공작과 아키텐 백작 간의 영지 전쟁이다.
그런 샤를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가스코뉴 공작은 야만 부족을 손에 넣지 못한 것에 상관없이 군대를 일으켰고.
그것이 불러일으킬 결과는 그야말로 명백한 것이었다.
‘완패.’
이대로라면 가스코뉴 공작은 아키텐 백작에게 완패한다.
‘그렇게 되면 역사는 크게 바뀌겠지.’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가스코뉴 공작의 힘을 강화시킬 필요가 있다.
딱 군디카가 이끌던 야만 부족만큼의 전투력을.
그래서 아틸라는 베르트랑 영주를 통해 원하는 답을 얻어 냈다.
‘그대도 이번 전쟁에 참여하도록 하라.’
아틸라는 웃었다.
자신이 계획한 방식으로 적과 싸우려면 영주의 뒷배가 반드시 필요했으니까.
그리고 지금부터 그 막중한 임무를 수행해야 할 사람은 아틸라와.
“흐에엑. 아, 아키텐 백작이라니! 제가 그런 대전쟁에 나가야 한단 말입니까!”
오토였다.
“아니면 걍 참수당하든가.”
“아이고 어르신! 살려주십시오!”
“그놈의 어르신 소리 좀 집어치워. 나 열여섯 살이다.”
“응? 열여섯? 마흔여섯이 아니고?”
“이 새끼가 진짜.”
아틸라는 오동나무 용병단의 일원으로 참전할 생각이었다.
‘그래야 눈에 덜 띌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용병단에 속해 있다 한들 서쪽의 야만 부족에서 건너온 아틸라의 외모가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었고.
그래서 아틸라는 제대로 된 용병 행색을 갖추기 위해 방어구점에 들렀다.
흥정은 오토에게 맡겼다.
“이런 시벌. 이깟 허접한 투구가 뭐? 얼마?”
“맙소사! 이따위 체인 메일을 그 가격에 팔겠다니! 내가 물구나무서서 대충 발가락으로 조물대도 이거보단 촘촘하겠다!”
오토의 수완(?) 덕에 아틸라는 그럭저럭 저렴한 가격에 괜찮은 장비로 무장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얼굴을 완전히 가릴 수 있는 투구가 마음에 들었다.
‘좋은데?’
그런 아틸라의 옆에 달라붙어 오토는 이곳의 무기점에선 양품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고 진정한 기사의 방어구라면 역시 플레이트 아머인데 그건 대륙에서 가장 저렴한 물건을 찾는다 해도 금화 100닢은 거뜬히 호가할 것이며 무엇보다 물건 자체를 구하기 어려운 탓에 아직까지 자신도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 기회만 된다면 꼭 갖고 싶다는 원대한 포부를 밝혔다.
“……너 원래 그렇게 말이 많았냐?”
“아이고 아틸라 님. 이제 영락없는 오동나무 용병단의 일원이 되셨습니다. 하하하.”
“그래? 제법 평범한 용병처럼 보이나?”
“그 곰 같은 덩치로 평범한 건 무리죠. 하지만 빌어먹을 야만족 새…… 아니, 야만 부족 출신 전사로 보이진 않습니다.”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을.”
공작의 군대가 오기 전까지 아틸라는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오동나무 용병단원을 불러 모아 훈련을 시작한 것.
박박 긁어모으니 얼추 서른 명은 되었다.
“아틸라 님! 제발 살살 좀 해 주십쇼!”
“엄살 부리지 말고. 명색이 기사였다는 놈이.”
“아이고 언제 적 이야길 하십니까! 이젠 내가 기사였는지도 까먹었다니까요!”
말은 저렇게 했지만 오토는 생각 이상으로 잘 훈련된 기사였다.
‘이 정도면 지휘관 급 아닌가?’
일전에 겨뤘던 세 기사와는 확연히 달랐다.
‘하긴. 한때 영주였다 했었지.’
게다가 배움에 대한 소질도 좋았다.
물론 아틸라가 잘 가르친 덕이 컸지만.
[ 보조 스킬, 검술 교육이 활성화됩니다. ]
아틸라의 주무기는 도끼였지만 검을 비롯한 다른 무기 사용법도 꾸준히 배워 왔다.
그는 아키텐 백작과의 전쟁에서 검으로 싸울 생각이었다.
‘이 시대의 기사나 용병들이 도끼 들고 싸우는 일은 흔치 않으니까.’
가스코뉴 공작의 군대를 최대한 조력하고,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다.
그게 아틸라의 목표였다.
‘내 존재가 샤를에게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녀석이 가만있을 리 없지.’
물불 안 가리고 죽이려 들 거다.
그때 새끼곰이 아틸라의 발을 톡톡 건드렸다.
녀석의 얼굴 표정을 읽은 아틸라가 투덜대듯 말했다.
“재수 없는 소리 말라니까.”
* * *
“검이라면 제가 좀 볼 줄 알지요. 아틸라 님은 그냥 이 오토에게 딱 맡기고 가만히만 계시면 된다 이 말씀입니다.”
오토는 한때 영주였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위엄이란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하긴, 저러니 그리 시원하게 말아먹었겠지.’
아틸라는 적당한 검을 찾기 위해 무기점에 이어 대장간까지 샅샅이 뒤지는 중이었다.
“아틸라 님. 이 검은 어떻습니까.”
오토가 고른 검을 아틸라는 가볍게 쥐어 보았다.
‘일단 그립감은 좋은데.’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금방이라도 칼자루가 부서질 것처럼 덜걱거렸다.
“손잡이가 더 단단한 건 없나?”
“아까부터 왜 그렇게 손잡이 타령을 하십니까. 검은 당연히 날을 봐야죠. 설마 날을 쥐고 손잡이로 두들겨 팰 생각은 아니실 테고 당최 이해를 못 하겠네.”
구시렁대던 오토는 아틸라의 서늘한 표정을 보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그 뒤로 몇 개인가의 검을 더 만져 보았지만 별반 차이가 없었다.
“무쇠처럼 단단한 손잡이를 원하신다면 드워프 대장장이를 찾으셔야 할 겁니다. 그중에서도 장인 칭호를 가진 자들의 무기 중엔 날끝부터 손잡이까지 드워프 강철로 제작한 신박한 것도 있다 하더군요.”
오토의 말대로 이 세계관에서 가장 훌륭한 무기와 방어구를 제작하는 건 드워프들이다.
“물론 드워프가 만든 무기를 갖는다는 건 플레이트 아머를 손에 넣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죠. 하긴 정통 플레이트 아머 역시 고도로 정제된 드워프의 기술력으로만 제작 가능하고 인간이 만든 건 그것을 흉내 낸 모조품에 지나지 않으니 어쩌구저쩌구…….”
끊임없이 재잘대는 오토의 수다를 아틸라는 한 귀로 흘렸다.
그리고 이 마을에선 제대로 된 무기를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무휼을 쓰고 싶진 않은데.’
심지어 무휼은 도끼처럼 널찍한 너비에 비해 길이는 단검처럼 짧아서 전투에 유용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맨몸으로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쩔 수 없군.’
대안을 꺼낼 때가 왔다.
뉘엿뉘엿 기우는 해를 바라보던 아틸라는 오토에게 부하들을 데리고 여관으로 오라 말했다.
“왜요?”
“그간 다들 고생했으니 늘어지게 술판 한 번 벌여 보게. 왜. 싫어?”
“그, 금방 다녀오겠수!”
오토는 귀 끝까지 입을 찢으며 뛰어갔다.
* * *
“으하하하하! 아틸라 님이 사주시는 술이라 그런지 아주 꿀처럼 촥촥 목에 감기는군요! 안 그러냐 너희들!”
“맞습니다! 하하하!”
식당은 얼마 전까지 도적단이었던 오동나무 용병단원들로 가득했다.
“주인장! 여기 술 더 가져와!”
“예예. 조금만 기다리십쇼.”
술판은 늦은 시간까지 계속됐다.
쓰러져 잠드는 자들이 생기고, 마지막까지 수다를 떨어 대던 오토마저 엎어져 코를 골 무렵에야 아틸라는 소음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잠든 새끼곰의 배를 간질이며 술잔을 기울이던 아틸라에게 여관 주인이 말했다.
“아이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전사님.”
“별거 아니오.”
“근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내 살다 살다 이렇게 술을 잘 드시는 분은 처음 봤습니다요.”
검은늑대 부족 최고의 말술이라 불리던 문주크도 찍어 누른 아틸라였다.
높은 체력 스텟 덕분일까, 아틸라는 생각했다.
“아키텐 백작령과의 전쟁에 참여하신다 들었습니다. 전사님이라면 분명 큰 공을 세우실 테지요. 돌아오시거든 꼭 다시 한번 들러 주십쇼. 오늘처럼 잔뜩 마셔 주시면 더 좋구요. 하하하.”
“전쟁에 참여한다는 건 어떻게 아셨소?”
“촌장님께 들었습죠.”
“촌장은 아직 감옥에 있을 텐데?”
“아아. 면회를 갔었습니다요.”
“촌장은 면회 금지 처분을 받았소.”
공기가 변했다.
아틸라는 표정 없는 눈으로 여관 주인을 바라보았다.
“야만인이라 경계를 소홀히 하는 거요?”
입가를 씰룩이며 말했다.
“아니면 날 시험하는 건가.”
여관 주인의 얼굴이 하얘지다 못해 가면을 쓴 것처럼 변했다.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마치 무생물 같은 얼굴.
무생물이 입을 열었다.
“누구냐 넌.”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시는군.”
아틸라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싸씬의 2급 살수. 라시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여관 주인, 라시드의 몸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아틸라의 목에 단검이 드리워졌다.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뭐냐. 정말 서쪽의 야만족인가.”
“글쎄. 반은 맞다고 해 두지.”
아틸라는 태연한 얼굴로 술잔을 들이켰다.
“나에 대해 어떻게 알았지?”
“말해 주고 싶지 않은데.”
“지금이라도 목에 바람구멍을 내 줄 수 있다.”
“칼자루만으로?”
아틸라가 어깨 위로 왼손을 흔들었다.
손가락 사이엔 깔끔하게 부러진 검날이 들려 있었고, 그걸 본 라시드의 눈이 부릅떠졌다.
“어느 틈에!”
라시드는 다른 단검을 꺼내려 했지만 할 수 없었다.
어느새 의자에서 일어선 아틸라가 그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으윽……!”
가공할 완력에 라시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른 손으로 암기를 꺼낼까 고민하던 라시드는 그만두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지금껏 자신을 살아 있게 해 준 건 다름 아닌 예민한 감각과 판단력이었다.
‘인정해야 한다.’
자신은 이 야만인을 이길 수 없다.
“딱히 널 어쩌려는 건 아냐. 부탁할 게 두 가지 있다.”
“부탁? 웃기는군. 들어주지 않겠다면 어쩔 셈인가.”
“네 목뼈가 부러지겠지.”
“……말해 봐라.”
아틸라가 손에 힘을 풀자 라시드의 얼굴도 원래의 표정 없는 것으로 돌아갔다.
“첫 번째 부탁은 네가 가진 검 중 하나를 빌려 달라는 거고.”
“검이라고?”
“그래. 내게 맞는 걸 영 찾을 수가 없어서 말이야.”
대륙 최고의 암살교단 하싸씬의 무기는 드워프의 그것만은 못하지만 상당한 고급품이다.
“……좋다. 두 번째는 뭐냐.”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며 라시드가 물었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이어 가던 아틸라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