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도적기사용병단 (1)
[ 대륙 공용어 패치가 완료되었습니다. ]
“방 하나 주시오. 식사와 술도.”
야만 숲을 벗어나 수 일 만에 처음 도착한 마을.
아틸라는 여관 주인을 향해 유창한 공용어를 구사했다.
“엥? 서쪽의 야만족인 거 같은데 공용어를 할 줄 아는 거유?”
주인장의 물음에 아틸라는 자신감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곧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으니.
“그러니까 지금,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거유?”
“……그렇소.”
“그럼 꺼지쇼.”
여관 주인은 퉁명스럽게 말한 뒤 제 할 일로 돌아갔다.
‘이런 젠장.’
간만에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조리된 음식에 술 한잔한 뒤, 시트 깔린 침대에서 늘어지게 자고 싶었건만.
‘오늘도 빌어먹을 야영인가.’
투덜대며 여관을 나서려 할 때였다.
험상궂은 사내들이 들어오다 아틸라와 부딪쳤다.
“똑바로 안 보고 다녀!”
“엥? 야만족? 말도 안 통하는 짐승새끼가 뭐 한다고 여까지 기어 나오고 지랄이야!”
“이 개새끼는 또 뭐야.”
사내 하나가 새끼곰에게 발길질을 했다.
하지만 상대는 숲의 재앙이라고까지 불렸던 그리즐리의 핏줄.
공격을 회피한 새끼곰이 덥석 사내의 발목을 물었다.
“으아아아! 이 개새끼가!”
아틸라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새끼곰도 만족한 듯 혀를 헥헥대며 돌아왔다.
여관문을 벗어나려는데 험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서. 이 야만족 새끼야.”
아틸라의 발이 멈췄다.
굶주린 야생짐승을 연상케 하는 눈빛이 뒤를 향하자 사내는 흠칫하며 단검을 뽑았다.
“뭐, 뭘 꼬나봐 이 짐승새끼야. 넌 오늘 팔 하나는 내놓고 가야 할 거다. 아울러 저 개새끼의 모가지까지.”
대답은 없었다.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사내가 피식거렸다.
“하긴 야만족 새끼가 공용어를 알아먹을 리도 없…….”
“뒈지고 싶지 않으면 무기 넣어라.”
짧은 정적이 일었다.
“……엥? 뭐야. 공용어를 할 줄 알잖아?”
“이거 놀랍군. 부락에서 글공부 좀 하셨나 봐? 으하하하하!”
“망토 위로 튀어나온 건 도낏자루인 모양이지? 어디서 나무라도 베다 오셨나?”
사내들의 비아냥에 아틸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딱 손봐주고 나가려는데 아무래도 곰탱이가 더 화가 났나 보다.
사내의 가슴팍으로 뛰어오른 새끼곰이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으악! 이 개새끼가 진짜!”
머리끝까지 화가 난 사내는 새끼곰을 향해 단검을 휘둘렀지만 아틸라가 두고 볼 리 없었다.
부드득, 하는 소음에 이어 찢어지는 비명이 여관을 울렸다.
“손……! 내 손이……!”
사내의 손은 아틸라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기묘하게 뒤틀린 손가락을 보고 울부짖던 사내가 뒤를 보며 소리쳤다.
“뭐, 뭐해! 모두 공격해!”
그제서야 뒤에 있던 세 남자가 허둥지둥 검을 뽑았지만 질풍처럼 달려든 아틸라의 주먹에 차례로 바닥에 꽂혔다.
쯧쯧, 혀를 차며 아틸라가 말했다.
“그러게 무기 넣으라니까.”
* * *
그날 밤.
아틸라는 여관 주인의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뭐 더 필요한 거 없으십니까요, 전사님. 헤헤.”
빈 그릇과 술병들이 쌓여 갔다.
포식한 새끼곰은 볼록한 배를 드러내며 탁자 위에 잠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아까 그놈들이 도적단의 일원이란 말씀이오?”
“예예. 수시로 마을에 들어와 약탈을 일삼는 아주 악질적인 놈들입죠.”
“그 실력으로 말이오?”
“아이고 전사님. 좀 전의 놈팡이들 정도야 마을 자경단으로도 충분히 혼내줄 수 있습죠. 아니 자경단까지 갈 것도 없이 제가 삼 년만 젊었어도 확 그냥.”
물끄러미 여관 주인을 바라보던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그럼 뭐가 문제요.”
“그게……, 두려운 건 도적단 두목과 그 부하들입니다요.”
내용인즉슨 놈들의 우두머리는 어느 자그만 영지를 다스리던 기사 출신이고, 지금은 부하들과 함께 도적단을 꾸려 근방 마을을 약탈하며 살고 있다는 것.
영지를 잃은 기사가 도적으로 돌변해 양민을 습격하는 일은 패영전 세계관에서 흔한 일이었다.
지금의 대륙은 혼돈, 그 자체였으니까.
‘그리고 녀석이 나타나지.’
패영전의 주인공이자 훗날 남부의 패왕으로 불리게 될 인물.
‘샤를 아인하르트.’
애정을 듬뿍 담아 창조했던 주인공의 모습을 상상하며 아틸라가 기분 좋은 상념에 잠겨 있을 무렵 노인 한 명이 여관으로 들어왔다.
자신을 촌장이라 소개한 그가 아틸라 앞에 마주 앉았다.
“주인장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실로 엄청난 무력을 지닌 전사님이라고…….”
“본론만 말씀하시오.”
물론 무슨 말을 할지는 짐작이 갔다.
“부탁드립니다. 도적단을 괴멸시켜 주십시오.”
“그게 야만족 전사 하나로 가당키나 한 일이라 생각하는 거요?”
물음과 달리 아틸라는 자신이 있었다.
아틸라는 핏물도끼 부족과의 전쟁에서 무려 오십 명이 넘는 적군을 도살했다.
그리즐리의 동굴 근처에서 죽였던 활잡이들을 제외하고서도 말이다.
“이 나이 먹도록 사람 보는 눈 하난 제대로라 자부하며 살았습니다. 그런 제 눈이 전사님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위대한 대전사라 말하고 있군요.”
노인네 혓바닥 참 기네.
“그게 다요?”
“아, 그것만은 아니고…….”
촌장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전사님이 오늘 그 놈팡이들을 흠씬 두들겨 패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녀석들은 두목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고할 테고, 내일이면 이 마을은 쑥대밭이 될 겁니다.”
아. 그런 건가.
그제야 촌장의 표정 한구석에 담긴 불유쾌함을 엿본 아틸라는 멋쩍은 얼굴이 되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한데?
“위에선 뭘 하고 있는 거요. 도적들이 이렇게 날뛰는 동안.”
“영주님은 지난번 도적단과의 전투에 앞장서다 큰 부상을 입으셨습니다.”
“그럼 대영주는?”
이곳은 남부의 패자라 불리는 대영주, ‘가스코뉴 공작’의 직영지 중 하나다.
가스코뉴는 군디카를 꼬드겨 서쪽의 야만 부족을 통합해 자신의 군대로 만들려는 개수작을 부렸던 자이기도 했는데.
실제로 원작에선 부족 통합에 성공한 군디카가 그와 봉신의 계약을 맺게 된다.
‘그리고 샤를 아인하르트한테 처발리지.’
“그러지 않아도 관리인께서 보고를 드리러 가신 참입니다. 며칠 안으로 토벌 부대가 당도하겠지요.”
그렇군. 녀석들이 내려오기 직전의 상황인 건가.
고개를 끄덕이던 아틸라가 물었다.
“대가로는 뭘 지불하시겠소?”
“그게 무슨…….”
“놈들을 괴멸시키면 내게 무얼 줄 수 있는지 묻고 있는 거요.”
멍하니 아틸라를 쳐다보던 촌장은 탁자에 가죽 주머니를 올렸다.
“제가 드릴 수 있는 전부입니다. 은화와 동화가 섞여 있지만 합치면 금화 한 닢은 될 겁니다.”
금화 한 닢.
목욕을 포함한 하루 숙박과 두 끼 식사 비용이 은화 세 닢이었으니 나쁘지 않은 금액이다.
그래도 목숨 값으론 좀 싼데?
“도적단의 규모를 알고 있소?”
대답은 여관 주인이 했다.
“제대로 된 장비로 무장한 이가 대략 열 명. 아까의 풋내기들까지 포함한다면 아마도…….”
“두당 반 닢으로 계산해서 금화 다섯 닢. 풋내기들은 무료로 치워 주겠소.”
다섯 배로 껑충 뛰어오른 의뢰비에 촌장은 해쓱한 얼굴이 되었다.
대답을 기다리며 아틸라는 느긋하게 술병을 비웠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이건 계약금. 나머진 의뢰를 완수한 뒤에 받겠소.”
주머니를 끌어당긴 아틸라는 동전 한 줌을 꺼내 탁자에 뿌려 놓고는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술병을 들이켰다.
잽싸게 그것을 챙긴 주인장이 환히 웃는 얼굴로 술상을 대령했다.
* * *
이튿날.
마을 어귀에 선 아틸라는 십여 마리의 말이 부연 먼지 속을 달려오는 모습을 보며 몸을 풀었다.
‘저 말 잡아다 팔면 돈 좀 되겠는데.’
어젯밤 맛있는 술과 음식으로 배를 채운 아틸라는 푹신한 침대에 누워 머릿속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요정왕국으로 가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
그런 게 있다면 참 좋으련만.
요정왕국의 존재는 지금 시점에선 인간들에게 알려지지도 않았다.
결론만 말하자면 정확한 위치는 아틸라도 몰랐다.
‘바보같이 정확한 위치를 설정하지 않았거든.’
- 요정들의 성역. 그 아름다운 공중섬은 크리엘도라 대륙 북해의 하늘 위에 고고한 자태로 떠 있었다.
원작에 쓰인 문장이다.
설령 정확한 위치를 특정했다 해도 마땅한 비행 기술이 없는 이 세계에서 물리적인 방법으론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
‘그것뿐이면 다행이지.’
북쪽 바다로 가려면 필연적으로 거인과 설인의 땅을 지나야 한다.
그곳 너머의 불길한 존재들 또한 그 이상의 거대한 장벽이었고.
‘그렇게 어찌어찌 북해에 도달한다 해도.’
심지어 공중섬은 하늘 위를 움직이기까지 했고, 그곳에서 뿜어지는 강력한 마력의 영향으로 섬 근해엔 미로 같은 결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런 빌어먹을 곳에 있었다 요정들의 성역은.
왜 그런 곳에 있냐고?
그래야 신비로워 보이니까.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렇게 안 썼지!’
하지만.
‘그러니까 가 볼 가치가 있는 거다.’
말 그대로 공중에 떠 있고 움직이기까지 하는 섬이다.
살아 있는 거대한 마력 덩어리!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초월적인 힘이 존재한다면 그곳 말고는 생각할 수 없다.
문제는 가는 방법인데.
‘녀석을 만나는 수밖에 없나.’
샤를 아인하르트.
녀석은 어릴 적부터 요정왕국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결국 몇몇 동료들과 함께 그곳에 도달하는 것에 성공한다.
하지만 아틸라는 가능하면 샤를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놈은 진짜 무지막지하게 강하거든.’
패영전 세계관 최강의 검사.
문주크의 강함을 100이라 표현한다면, 샤를은 300을 거뜬히 넘을 거다.
영웅 문주크보다 세 배 이상 강한 게 말이 되느냐고?
달리 주인공이겠는가.
‘물론 지금이야 그 정도로 강하진 않지만.’
껄끄러운 이유는 또 있었다.
샤를의 행보는 패영전 스토리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다.
공연히 녀석을 만나 역사를 뒤틀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눈에 띄지 말고 당분간은 몸 사리자.”
군디카의 야망이 무너진 탓에 대륙의 역사는 벌써 바뀌기 시작했다.
녀석이 이끄는 야만전사들은 가스코뉴 공작이 벌인 전쟁에서 상당한 수완을 발휘할 예정이었으니까.
‘귀찮지만 그것에 대해선 사후 처리를 해 놔야겠지.’
그때 새끼곰이 아틸라의 발을 톡톡 건드렸다.
새끼곰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 보던 아틸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언젠가부터 녀석의 표정이 읽히는 것 같다.
“뭐? 몸 사려 봐야 눈에 띄지 않을 리 없다고?”
새끼곰은 맞는다는 듯 헥헥 혀를 내밀었고.
이제는 얼굴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가까워진 도적단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아틸라가 말했다.
“재수 없는 소리 마.”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기다란 창을 든 무장 도적이 앞장서 쇄도했다.
“네놈이냐! 공용어를 쓴다던 건방.”
정면으로 몸을 날린 아틸라가 지면을 박차며 뛰어올랐고.
“진 야만……!”
폭풍처럼 휘둘린 용아귀가 말과 함께 그의 몸을 반으로 쪼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