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6화 (6/425)

006. 새로운 세계로

붉게 타는 검은늑대의 부락을 바라보며 군디카는 만족의 웃음을 머금었다.

블레다가 문주크를 사냥하러 떠난 사이, 그는 약속을 깨고 검은늑대를 습격했다.

‘쳐라! 모든 것을 불태워라!’

핏물도끼 부족과 3개 부족이 연합한 대군.

그들은 문주크 없는 검은늑대를 순식간에 제압했다.

군디카는 자신의 야망을 이룰 날이 지척까지 다가왔음을 감각했다.

“네 이놈 군디카아아!”

머릿속을 흐르는 만족감과는 별개로, 작금의 상황에도 투지를 잃지 않은 검은늑대의 한 전사를 보며 군디카는 윗입술을 핥았다.

군디카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만 포기하는 것이 어떤가 옥타르. 지금이라도 내게 온다면 중히 써 줄 것을 약속하지.”

“닥쳐라 군디카! 위대한 검은늑대의 전사는 죽어서도 부족을 배반하지 않는다!”

“아쉽지만 별수 없군.”

군디카가 도끼를 움켜쥐었다.

“뜻대로 해 주겠다.”

군디카의 도끼가 옥타르에게 쏘아졌다.

그의 실력은 옥타르보다 몇 수는 위.

게다가 수많은 핏물도끼 부족의 전사들을 상대하며 기력을 소진한 옥타르는 온전한 몸 상태도 아니었다.

“크하하하! 뭐 하는 것이냐! 네가 말하던 검은늑대의 전사는 혓바닥만 위대한 것이었더냐!”

옥타르는 분전했지만 상황을 반전시킬 수는 없었다.

군디카의 파상공격을 버티지 못한 옥타르의 양손도끼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 순간 옥타르의 뇌리에 떠오른 이는.

‘아틸라가 있었다면……!’

문주크가 아닌 아틸라였다.

그 사실에 놀라워하며 옥타르는 웃었다.

허리춤의 손도끼를 뽑아들었다.

“와라! 군디카!”

군디카의 일격이 쇄도했다.

양손도끼로도 불가능했던 일을 손도끼가 해낼 리 없었건만 옥타르는 후회 없이 몸을 날렸다.

그때였다.

질풍처럼 날아든 거대한 날붙이가 군디카의 도끼에 부닥친 것은.

“크허억……!”

날붙이가 노린 건 군디카의 목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향한 가공할 살기를 감지한 군디카는 휘두르던 도끼의 방향을 틀어 그것을 막았다.

아니, 막은 줄 알았다.

“끄어어어억……!”

군디카의 머리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았다.

그의 도끼는 정체불명의 날붙이와 부딪치는 것까진 성공했지만 충격을 흡수하지는 못했고, 우악스럽게 밀쳐 들어온 그것은 군디카의 이마를 가른 뒤 지면에 처박혔다.

그리고 그건 군디카에게도 낯익은 무기였다.

‘요, 용아귀! 문주크가 살아왔는가!’

조금 전까지의 자신감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군디카는 이마를 부여잡으며 용아귀가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핏물에 잠긴 시야 속으로 보이는 건 문주크를 등에 업은 우람한 덩치의 사내가 자신을 향해 또 다른 도끼를 휘두르는 모습이었다.

‘이, 이 녀석이 바로……!’

군디카는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그것을 막았다.

그러나 전신을 뒤흔드는 무지막지한 공격은 두 번, 세 번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네 번째 공격에 이르렀을 때 군디카의 도끼는 주인의 손을 떠났다.

군디카의 얼굴에 절망이 스쳤다.

“이런 시……!”

시뻘건 내장을 와르르 쏟아 내며 군디카의 몸이 반으로 갈렸다.

* * *

군디카의 죽음과 아틸라의 맹활약으로 전황은 급격하게 변했다.

3개 부족 족장들은 차례로 항복 의사를 전했다.

저항을 계속하던 핏물도끼 부족도 머지않아 무기를 내던졌다.

‘무조건 항복하겠소.’

그렇게 전쟁은 끝났다.

문주크는 3개 부족 족장들에게 책임을 물었고, 아틸라의 난데없는 주장에 힘입어 전쟁에 참여했던 5개 부족의 대족장 자리에 올랐다.

‘문주크 대족장 만세!’

‘위대한 검은늑대 부족이여, 영원하라!’

모든 것이 마무리된 후 아틸라는 부족을 떠났다.

5개 부족의 힘을 갖게 된 지금의 검은늑대는 쉽사리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 * *

“후우…….”

숲길을 걷던 아틸라는 저만치 앞에 서있는 그림자를 보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결국, 올 것이 왔구나.

“……그냥 돌아갈 순 없는 거요?”

“그럴 수 없다는 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잖니.”

“난 잘 모르겠소.”

아틸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누이를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소. 그리즐리를 유인한다는 숙부의 계획은 나와 아버지가 그곳을 향한다는 사실과 도착시각을 알지 못한다면 실행할 수 없는 것이니까.”

일레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활잡이들을 죽이고, 그리즐리의 목을 따고, 마지막으로 숙부의 몸을 갈가리 찢어놓으면서도 그 생각뿐이었소. 그리고 만신창이가 된 숙부의 시신을 보며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

약간의 틈을 두고 아틸라가 말했다.

“누님이 숙부와 한배를 탔다는 것을.”

“……처음부터는 아니야.”

“알고 있소. 내가 되살아나 곰 세 마리를 맨손으로 찢어 죽인 뒤겠지.”

일레크는 답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긍정을 의미한다는 것을 아틸라는 모르지 않았다.

“족장이 되고 싶었소?”

일레크는 족장을 꿈꿨고, 실제로 차기 족장 후보의 한 사람이었다.

지금은 은띠 전사였지만 몇 년 내로 금띠를 달 자신이 있었고 옥타르보다, 그리고 블레다 숙부보다 강해질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

“그날 난, 아무리 노력해도 넘어설 수 없는 존재를 두 눈으로 확인했어.”

“난 족장이 될 생각이 없었소.”

이렇게 말하면서도 아틸라는 변명으로 들릴 거라는 걸 알았다.

그 정도의 힘을 갖고 있으면서 족장의 자리를 탐하지 않는다니, 검은늑대의 전사로서는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생각이니까.

내가 반쪽짜리라서 그렇소. 누님.

“아버지께서 슬퍼하실 거요.”

“아버지는 네가 부족을 떠난 것에 더욱 슬퍼하실걸.”

이 세계로 떨어지기 전의 아틸라, 아니 김도현에겐 아버지의 기억이 거의 없었다.

문주크가 아틸라와 대화하는 것을 즐거워했듯.

그 역시 문주크와, 그리고 토끼 사냥을 나섰다가 사고로 죽은 어머니 대신이었던 일레크와의 삶에 행복했다.

“게다가 난 이미 아버지를 죽이려는 자를 도왔어. 그게 내 의지와 무관한 것이었다 해도.”

“검은늑대를 떠나는 방법도 있소.”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일레크가 도끼를 뽑았다.

“난 영원한 검은늑대의 전사야.”

아틸라도 용아귀를 손에 쥐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일레크가 섬광처럼 손도끼를 휘둘렀다.

속도도, 힘도, 곰 사냥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모습.

그 순간 아틸라는 그녀의 실력이 비로소 금띠 전사에 도달했음을 감각했다.

그리고 용아귀가 휘둘러졌다.

멈춰 선 아틸라의 어깨를 스치듯 일레크의 몸이 무너졌고, 한발 늦게 그녀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있는 거 알고 있소.”

바스락, 하는 소리와 함께 수풀 속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는 저벅저벅 아틸라 앞으로 다가와 일레크의 시신을 내려 봤다.

“복수하실 거요?”

옥타르는 대답 대신 일레크의 몸과 머리를 안고 일어섰다.

부릅뜬 눈을 감기고,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한 뒤에도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내려 보던 그는 뒤돌아 부락을 향해 걸어갔다.

아틸라도 말없이 발걸음을 이었다.

* * *

며칠 걸으니 슬슬 숲의 영역도 끝이 보였다.

그리고 숲을 벗어난다는 건 십여 개 부족으로 이루어진 대륙 남서부 야만족의 땅을 완전히 벗어난다는 의미였다.

머리 위로 차오른 달을 확인하며 아틸라는 야만 숲에서의 마지막 야영 준비를 마쳤다.

“언제까지 따라올 거냐.”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 위에서 노릇노릇 구워지는 토끼 두 마리를 보며 아틸라가 말했다.

“난 내일 이곳을 벗어날 거다. 너도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편이 좋아.”

하긴, 돌아갈 곳을 없애 버린 게 나였지.

“며칠 동안 제대로 못 먹었을 텐데 이거라도 먹고 가라.”

아틸라는 잘 익은 토끼 한 마리를 등 뒤로 던졌다.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는 없었다.

대신 으적으적 그것을 씹는 소리가 앙증맞게 들려왔다.

“잘도 처먹네.”

아틸라도 토끼를 들어 으적으적 씹었다.

김치찌개, 삼겹살, 햄버거 등의 음식이 그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원주인의 기억 덕분인지 아틸라는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뼈째로 토끼 한 마리를 순삭한 아틸라가 투덜거렸다.

“젠장. 괜히 줬네.”

평소 두세 마리씩 먹던 토끼를 하나만 먹으니 배가 차지 않는 건 당연지사.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아틸라의 발밑에 반쯤 먹다 남긴 토끼가 슬그머니 놓였다.

그 위에서 조그만 새끼곰이 동그란 눈망울을 반짝이며 아틸라를 올려 보고 있었다.

“그렇게 보지 마.”

그러거나 말거나 새끼곰은 아틸라를 보며 헥헥 혀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토끼 반쪽을 아틸라에게 툭툭 밀어내더니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두껍고 짤막한 검, 무휼의 냄새를 킁킁 맡았다.

“그래. 여기서 엄마 냄새가 나겠지.”

아틸라는 새끼곰을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자신의 손으로 숙부를 처단하기 위해 그리즐리의 팔을 찢고 모가질 따 버렸을 때.

녀석의 잘린 목이 말했었다.

- 저주를 풀어준 것에 감사한다.

또 자신의 몸뚱이를 뒤져 무휼을 가져가라 했다.

화살의 저주가 완전히 퍼지기 전에 삼켜두었노라고.

아틸라는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찾아낸 건 무휼만이 아니었다.

끼엥……! 끼아옹……!

블레다를 처리하고 돌아가는 길에 새끼곰은 그리즐리의 동굴 안에 넣었다.

문주크를 업고 부락으로 달리는 내내 새끼곰의 울음소리가 등 뒤를 울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먹이를 들고 동굴을 찾았다.

녀석은 냠냠거리며 잘도 먹었고, 며칠 만에 다람쥐 같은 자그만 동물을 사냥할 정도로 건강해졌다.

이후 아틸라는 동굴을 찾지 않았다.

“그렇게 좋냐. 엄마 냄새가.”

새끼곰은 무휼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

아침이 되자마자 아틸라는 야영의 흔적을 지우고 발을 움직였다.

새끼곰이 헥헥대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무심하게 말했다.

“안 오면 두고 간다.”

새끼곰이 방방대며 달려왔다.

발치까지 다가온 녀석을 들어 어깨에 올린 아틸라는 숲의 경계에 서서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눈앞에 펼쳐진 이 세계가 어쩌면 나의 현실일지 모른다고.

그렇게 새로운 세상을 향해 첫 발을 내디딘 순간 상태창이 떠올랐다.

[ 튜토리얼이 완료되었습니다. ]

[ 그동안의 경험치를 일괄 정산합니다. ]

[ 레벨이 올랐습니다. ]

[ 레벨이…… ]

이 세상이 현실일지 모른다는 착각에 빠져들 무렵 반박하듯 떠오른 메시지에 아틸라는 크게 웃었다.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겼다.

헤아릴 수 없는 디지털 신호와 픽셀이 현실로 화해 세상 속에 녹아드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마침내 아틸라는 달리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어깨 위에서 새끼곰이 빼액빼액 포효했다.

* * *

어두운 방.

그들의 모습을 수정구를 통해 들여다보는 이가 있었다.

“흐응. 저주의 화살을 무시하게 만들 만큼 강력한 야만전사라. 이런 멋쟁이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걸까.”

붉은 로브에 후드를 눌러쓴 새하얀 피부의 여자.

수정구에 손을 얹은 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대던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뭐라? 전사신 아레스조차 그의 정체를 모른다 했다고?”

어둠 아래 드러난 핏빛 입술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재밌어지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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