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 무기가 없으면 맨손으로 찢는다
곰 사냥을 재개하기 앞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했던 건 이 몸의 주인인 아틸라에 대한 것이었다.
‘아……!’
녀석의 정체는 금세 유추할 수 있었다.
문주크의 동생이자 자신에게는 숙부가 되는 ‘블레다’의 계략에 죽임당한 비운의 캐릭터.
‘그 녀석이구나.’
블레다의 입을 통해 딱 한 번 언급되었을 뿐이라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은 엑스트라.
그게 바로 아틸라였다.
‘이름이 낯설게 느껴졌던 이유가 있었어.’
블레다가 아틸라를 제거한 이유는 문주크가 누구보다 사랑하는 자식이 아틸라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블레다는 문주크의 평정심을 흩트릴 필요가 있었고, 계획은 멋지게 성공했다.
‘드디어 죽어주었구려 형님! 크하하하하!’
고대하던 문주크 암살에 성공하고 마침내 족장 자리를 차지했으니까.
그런 블레다를 도운 사람이 아이바르였다.
‘그래서 죽이진 않으려 했는데.’
아틸라의 부활로 검은늑대 부족의 역사는 바뀌었다.
블레다가 원작과 같은 방법으로 문주크를 암살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
‘아이바르를 통해 블레다의 차후 계획을 알아볼까 했지만.’
아이바르는 죽었다.
다름 아닌 아틸라의 손에.
‘상관없다.’
갑자기 등장한 곰.
그 모습에 까무러치게 놀란 아이바르.
그것이 의미하는 건 자명했으니까.
‘빠르게도 손절 당했구나. 아이바르야.’
털썩, 머리 없는 아이바르의 몸뚱이가 허물어졌다.
피에 젖은 손도끼를 아틸라는 무심히 바라봤다.
‘야만족의 기억 때문인가. 아니면 이것이 내가 창조한 패영전(패왕영웅전기)의 세계관이기 때문에?’
난생처음 경험한 살인.
그럼에도 아틸라의 심장박동은 조금도 빨라지지 않았다.
‘재미있군.’
아틸라의 입가가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아틸라! 이게 무슨 짓이냐!”
경악한 얼굴로 달려드는 두 형제.
그들을 누이가 가로막았다.
“너희들은 눈 뜬 장님이더냐. 아이바르가 먼저 공격했다.”
“하지만 누님!”
“부족의 규율을 잊었느냐!”
누이의 일갈에 두 형제는 입술을 짓씹으며 물러났다.
아틸라를 향해 뽑힐 뻔했던 두 자루 도끼는 방향을 바꿔 곰에게 겨눠졌다.
누이도 양손에 도끼를 꺼내들었다.
“싸울 수 있겠니. 아틸라.”
무의미한 물음이었다.
아틸라의 날랜 몸이 곰에게 돌진했다.
* * *
수풀 속에 은닉해 때를 기다리던 블레다는 아이바르의 죽음을 보며 실소를 흘렸다.
‘뭐, 어차피 죽일 작정이었으니까.’
차라리 잘 됐다.
손 하나가 아쉬운 상황에 상대는 전력을 잃었고, 은띠 전사 하나와 동띠 전사 둘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세 마리 곰을 제압할 수 없다.
‘하긴 아이바르 녀석이 살아 있어 봐야 달라질 것도 없겠지만.’
변수는 아틸라였다.
블레다의 눈빛이 깊어졌다.
‘가능성 따위가 아냐. 녀석은 틀림없는 대무신왕의 환생이다.’
아니라면 죽었던 사람이 어떻게 하루 만에 상처를 수복하고 부활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래 봐야 이제 성년식을 치른 애송이일 뿐. 미쳐 날뛰는 어미곰 세 마리를 당할 순 없다.’
블레다의 입가에 확신에 찬 비소가 그려졌다.
그가 아틸라를 살해한 방법은 이랬다.
‘녀석을 어떻게 죽였냐고? 굴속에서 자고 있던 새끼곰들을 어미 없는 틈에 몰살한 뒤 녀석의 체취가 묻은 옷가지를 흩뿌려 놨지.’
‘그다음은 간단해. 아이바르가 토끼를 몰아 녀석의 도주로를 제한했거든. 녀석은 스스로 어미곰의 입안으로 뛰어든 셈이지. 크하하하하!’
오늘 역시 큰 줄기는 같았다.
달라진 점은 새끼를 잃은 어미곰이 세 마리로 늘어났다는 것과, 놈들이 맡은 인간의 체취가 아틸라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
‘한 놈도 남김없이 죽여주마.’
곰과 인간의 무리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최초의 격돌은 선두의 곰이 내지른 앞발과 그것을 향해 휘두른 아틸라의 도끼였다.
우지끈, 하는 소음과 함께 도낏자루가 부러졌고 방해꾼이 사라진 곰의 앞발이 아틸라의 안면을 직격했다.
* * *
‘아. 뭐야.’
나무 기둥에 처박힌 아틸라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정통으로 맞았다.
마치 중장비에라도 가격 당한 듯 눈앞이 암전 되고 뇌가 흔들렸다.
‘빌어먹을.’
아틸라는 오른 주먹을 펴고 그 안의 파편들을 내려 봤다.
도낏자루가 부러진 건 곰 때문이 아니었다.
[ 권능: 용력 ]
‘미친. 손아귀 힘만으로 아작을 내버렸잖아!’
어처구니가 없었다.
‘조금 힘을 줬다고 도낏자루를 박살 내? 이래갖고 어디 무기 들고 싸울 수나 있겠나.’
그러나 투덜거릴 틈은 없었다.
딱 봐도 그의 형제들은 곰 세 마리를 상대로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고전하고 있었으니까.
‘저러다 진짜 죽겠군.’
몸을 일으킨 아틸라는 무기로 쓸 만한 게 없나 주변을 둘러봤지만 마땅한 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맨몸으로 뛰어들었다.
* * *
일레크는 점점 초조해졌다.
‘내가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아틸라도 죽었고, 동생들은 결코 저 곰을 쓰러뜨리지 못한다.’
그녀는 아틸라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곰의 앞발이 아틸라의 면전에 꽂힌 순간 우레가 치는 듯한 폭음이 울렸고, 그런 엄청난 공격을 맞고 살아 있을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또 지켜주지 못했어.’
주먹을 부르쥐던 그녀의 시선이 동생들을 향했다.
예상대로 둘은 곰 한 마리를 상대로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우어어어어!
그 순간 광분한 곰의 앞발이 일레크에게 쏘아졌다.
조금 전 아틸라의 머리통을 깨부쉈던 가공할 공격.
일레크는 비스듬히 도끼를 뻗어 그것을 흘려 넘기고 추가 공격도 회피했다.
‘기회다!’
그녀의 허벅지 근육이 꿈틀대며 놀라운 힘이 발산됐다.
순식간에 곰의 팔을 타고 어깨 위로 올라간 일레크가 무방비한 상대의 목젖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그러나 그녀는 잊고 있었다.
자신이 상대하던 곰이 한 마리가 아니라는 것을.
“누, 누님!”
등 뒤에서 튀어나온 또 다른 곰의 이빨이 일레크의 종아리를 깨물었다.
예기치 못한 공격에 도끼는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대로 다리를 분질러 버리겠다는 듯 곰은 마구잡이로 고개를 휘둘렀다.
“크흐으으윽……!”
그녀의 세상이 풍차처럼 회전했다.
목표물이었던 곰이 뒤돌아 앞발을 휘두르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 끝인가…….’
그런데 곰의 앞발은 자신을 가격하지 못했다.
녀석의 팔이 붉은 실처럼 길게 늘어나며 허공으로 치솟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하늘 위의 어떤 불가해한 존재가 힘껏 잡아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저건……!’
이유는 금세 알 수 있었다.
붉은 실처럼 보인 것은 절단된 곰의 어깨에서 분출된 핏물이었고, 가공할 힘의 작용에 뜯긴 녀석의 팔은 중력을 거스르며 하늘로 쏘아졌다.
일레크의 눈이 커졌다.
“아틸라!”
곰의 반대쪽 팔이 같은 형상을 그리며 몸에서 분리됐다.
이어 양팔을 잃은 놈의 머리를 비틀어 던져 버린 아틸라가 자신을 향해 팔을 뻗었고, 그 무시무시한 광경에 일레크는 태어나 한 번도 내본 적 없는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악!”
그러나 아틸라의 목표는 일레크가 아니었다.
그의 손이 곰의 아래턱을 움켜쥐고 우악스럽게 뜯어냈다.
폭포수처럼 피를 쏟는 곰의 어깨 위에 오른 아틸라는 녀석의 머리통을 향해 포탄처럼 주먹을 내질렀다.
퍼어엉!
그렇게 그녀의 몸이 자유를 되찾았다.
널브러진 곰의 어깨 위는 뇌수와, 뼛조각과, 기타 찢어진 잔해만을 남긴 채 증발해 있었다.
일레크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그런 목소리도 낼 줄 아셨소?”
평소 같은 높임말이 아니었지만 일레크는 의식조차 못했다.
대답할 새도 없이 아틸라는 나머지 곰에게 달려갔고, 녀석은 변변한 저항 한 번 못한 채 앞선 두 마리와 비슷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저, 전사신 티르시여……!”
일레크와 두 형제는 괴물이라도 보는 듯한 얼굴로 아틸라를 바라보았다.
* * *
“어, 어떡할까요 대장. 공격합니까?”
“아틸라가 저렇게 강해졌을 줄이야……!”
“매, 맨손으로 곰을 찢어 죽이다니, 저런 건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형편없는 놈들.’
블레다는 혀를 찼다.
이리도 겁먹은 놈들을 데리고 지금의 아틸라를 제압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리라.
이제 다음 수를 꺼낼 차례다.
“철수한다.”
* * *
아이바르의 장례는 조촐하게 치러졌다.
다른 부족과의 전투나 사냥 중에 발생한 명예로운 죽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음……. 그랬단 말이지. 아이바르가.”
누이와 형제들의 일관된 진술 덕에 아틸라는 문책 받지 않았다.
오히려 사냥한 곰에게서 발생된 풍족한 고기로 그의 성년식 통과를 축하하는 잔치가 벌어졌다.
“아틸라가 곰 고기를 잔뜩 가져왔다!”
“크하하하! 배 터지게 먹고 마셔 보자고!”
부락으로 돌아오기 전 아틸라는 새끼곰들이 살해된 동굴에 들렀다.
그곳에선 자신과 누이를 비롯한 형제들의 옷가지가 발견되었다.
전말을 알게 된 문주크는 크게 노했다.
“이, 이놈을 당장……!”
하지만 블레다와 그의 측근들은 이미 종적을 감춘 뒤였다.
그리고 아틸라는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었다.
‘핏물도끼 부족.’
아틸라는 웃었다.
‘그 블레다가 이 정도로 포기할 리 없지. 슬슬 다음 일을 대비해야겠군.’
이튿날 저녁 아틸라는 문주크의 부름을 받았다.
“부르셨습니까 아버지.”
문주크는 아틸라를 연무장으로 데려갔다.
아틸라의 손에 날이 번쩍이는 손도끼를 쥐여 준 문주크는 나무 몽둥이를 손에 들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보면 모르겠느냐. 네게 한 수 가르쳐 주고자 한다.”
“근데 왜 그런 허접한 빠따 나부랭이를 들고 계신 겁니까.”
“빠따?”
“아. 몽둥이 말입니다.”
눈을 동그랗게 뜬 문주크는 곧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웃었다.
“으하하하하! 일레크의 말대로구나! 아주 하루아침에 전사가 다 됐어!”
“검은늑대 부족원은 태어날 때부터 전사가 아닙니까.”
“그렇지! 암 그렇고말고. 크하하하하!”
문주크의 웃음이 멈췄다.
“네 용맹에 관한 내용은 일레크에게 들었다. 곰 세 마리를 혼자서 격파했다고?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넌 알고 있느냐.”
그럼. 알다마다.
“아직 자신이 이룩한 업적에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구나. 설명해 주마. 우리 위대한 검은늑대 부족의 금띠 전사가 한 번에 사냥할 수 있는 곰의 숫자가 몇일 것 같으냐.”
세 마리다.
“그래. 이제 성년식을 마쳤을 뿐인 네가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지. 답은 세 마리다. 즉 한 번에 세 마리의 곰을 사냥할 수 없는 전사는 결코 금띠 전사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야.”
문주크는 은근한 눈빛으로 아틸라를 바라봤다.
품 안에 숨겨온 금띠를 연신 조물락거리며.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그 말인즉슨, 네가 바로 금띠 전사가 될 자격을 갖추었다는 말이다. 아들아!’
그러나 그의 기대와 달리 아틸라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도끼를 내버린 뒤 빠따 하나를 집어 들 뿐이었다.
“아들아. 뭐 하는 거냐?”
“실수로라도 아버질 죽일 순 없잖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