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나는 전설이다 (2)
‘당신이 그걸 해 냈다고?’
어느새 8월에 접어든 시즌,
출근 길에 오른 존 피어슨은 라이온즈 파크 외부에 걸린 전설들의 얼굴에 눈을 돌렸다.
다른 선수들은 모르겠지만 유독 눈에 띄는 한 명, KBO 단일 시즌 최다홈런 기록 보유자이자 메이저리그에서 2000안타 400홈런을 달성한 선수 아닌가.
시즌을 앞두고 기자들 앞에서 이인영 대표의 62홈런을 깨겠다고 한 건 솔직히 한국 야구 수준을 얕잡아보고 한 말이 맞다.
존 피어슨은 현재 타율 0.348 - 홈런 38개 - 107타점, 도루를 제외한 타격 전 부문에서 선두권을 달리는 중, 그런데 62홈런은 너무 멀어보였다.
앞으로 남은 경기는 35경기, 25홈런을 채울 수 있을까. 산술적으로 거의 불가능, 여기에 투수들의 집중 견제를 받으면서 홈런을 칠 기회는 더 줄어들었다.
“혹시 그때 몰아주기 한 거 아닌가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 약간 그런 의심이 들거든요.”
존 피어슨은 임완수 코치를 붙잡고 늘어졌다.
임완수 코치는 한 때 이인영과 테이블 세터진을 이뤘던 선수, 지금은 구단 대표가 됐지만 당시 후배였던 이인영은 팬들은 물론 동료들의 뇌리에도 엄청난 임팩트를 선사했다.
하지만 상대는 이인영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 알 리 없는 이방인, 임완수 코치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왜? 당시 투수들이 대표님한테는 정면승부 해줬을 것 같아?”
“아닌가요?”
“정말 정면승부 했다면 80홈런도 쳤을 걸?”
임완수 코치는 그때의 추억에 잠겼다.
라이온즈 파크가 홈런이 잘 나오는 구장이라 가능했던 기록이다? 당시 이인영 대표의 홈런 평균 비거리는 124m가 넘었다.
어느 구장에서든 홈런이 나왔다는 뜻, 심지어 가장 넓은 상암동 구장을 기준으로 해도 59홈런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많은 팬들은 그 기록에 어떻게든 흠집을 내려 노력했지만, 이인영은 메이저리그에서 12년 동안 세운 기록으로 모두의 입을 다물 게 했다.
라이온즈에서 기록한 성적이 과대평가 된 기록이 아니었다는 걸 스스로 증명한 것, 이인영의 KBO 성적은 거품 논란에서 이미 해방된 일이다.
그런데 그걸 외국인 용병이 건드릴 줄이야. 임완수 대표는 자네 주제를 알라는 식으로 충고를 이어갔다.
“자네가 뛰어난 타자인 건 인정하는데, 그 분은 논외로 취급하는 게 좋을 거야.”
“논외라고요?”
“그래, 미안하지만 자네는 거기에 빗댈 수준이 아니야. 상대가 안 좋다고 생각하라고”
존 피어슨은 살짝 발끈했다.
메이저리그에서 7년 동안 활약한 피어슨은 이인영 대표와 잠깐이나마 같은 시대를 보냈다.
대단한 선수라는 건 인정했지만 그때는 피어슨도 2년 차 시즌 만에 MVP 후보에 올랐을 정도로 잘 나가는 선수였다.
다만 부상과 FA 한파까지 겹치면서 잠시 외도를 하고 있을 뿐, 그래서 이인영 대표의 기록에 더욱 집착했다.
그 기록을 넘어선다면 MLB 구단이 날 다시 보는 계기가 되겠지, 이날부터 기록에 더욱 집착하는 성향을 보였다.
[따악~!!]
“내야를 빠져나가는 안타!! 2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면서 N 플렉스 라이온즈가 3대 0으로 앞서나갑니다!! 오늘 존 피어스는 2타수 2안타!! 순도 높은 득점권 타율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본인은 지금 뭔가 마음에 안 들죠. 공이 떠야되는데 계속 땅볼이 되고 있거든요.”
하지만 최근 7경기에서 장타는 2루타 3개가 전부, 존 피어슨은 타구를 띄우는 유형이다.
이게 안 된다는 건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 경기를 지켜보던 임완수 타격 코치는 그 이유로 배트 스피드를 꼽았다.
골프 뿐만 아니라 멀리 날리는 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한 건 힘이다.
기본적인 근력이 돼야 볼에 힘이 전달될 것 아닌가. 그런데 타격은 투포환과 달라 본인의 힘도 중요하지만 원심력을 이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 능력에 한계를 보이는 선수는 장타 능력이 오락가락,
실제로 ST 위너스의 김한율 선수는 2032시즌 44홈런을 치고 다음 시즌 14홈런으로 급감해버렸다.
장타율 하락 폭은 무려 0.131(0.631 -> 0.401), 1년 만에 다른 선수가 돼버렸다.
김한율 뿐만 아니라 모든 장타자들에게 요구되는 숙제, 1년 내내 힘과 원심력을 동반한 스윙을 유지할 수 있는 선수가 몇 명이나 될까.
그런데 17년 전, 이인영 대표는 그 짓을 해버렸다.
1년 내내 떨어지지 않는 장타력과 일정하게 유지되는 스윙, 타격에 대한 감각은 타고 났다는 설명 외엔 해석할 방법이 없다.
그런 기술적인 자세를 1년 내내 유지한다는 건 운동신경도 따라준다는 뜻, 존 피어슨은 그 범주에 포함되지 않았다.
툭 튀어나온 배와 한 눈에 봐도 상체에 비해 가느다란 다리, 기술보다 힘에 의존하는 타격을 하는 스타일이다.
장타에서 슬럼프가 오면 길어지는 유형, 당분간 장타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2번에 배치하는 건 어떨까요?”
“2번에?”
“예, 지금 자세로 타격을 계속하면 병살만 늘어날 겁니다. 타격감을 회복할 때까지 2번에 두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 ”
“내가 무슨 힘이 있겠나. 대표님께 허락을 구해야지.”
임완수 코치는 고심 끝에 감독에게 타순 변동을 요구했다.
하지만 로스터 변동은 구단주의 권리, 이인영은 라이온즈를 매입할 때 운영권은 내가 쥐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감독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로스터 이동, 임완수 코치는 대표에게 직접 건의를 했다.
“타순 변동이 문제가 아닐 텐데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친구 그렇게 계속 치면 부상당해요.”
이인영은 무심한 척 하면서 틈틈이 경기를 지켜봤다.
시즌 초반에 비해 무너진 자세, 왜 피어슨은 메이저리그 마지막 시즌과 일본 무대에서 연달아 어깨 부상을 당한 걸까.
잘 나갈 때는 힘과 기술이 동반된 스윙을 하는데, 그게 안 될 때는 힘만 앞세우는 스윙이 되고 있다.
처음부터 하체를 잘 쓰는 폼은 아니었고, 결국 모든 힘이 상체로 쏠리고 있는 것, 이러니 어깨에 탈이 안 나겠나.
거기다 한 번 다친 부위를 계속 다치는 건 본인에게도 치명적,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타순 조정보다 필요한 건 자세 교정이죠. 코치님이 신경 좀 써주세요.”
“알겠습니다.”
임완수 코치는 대표의 지시를 받아들였다.
알아서 자세를 수정할 때까지 2번에 둘 생각이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
하지만 메이저리그 문화에 익숙한 피어슨은 임완수 코치의 참견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저 메이저리그에서 MVP 후보에도 올랐던 선수라고요.”
“이건 자네와 팀 모두를 위해서야. 그러지 말고 좀 더 일찍 나와서 나와 훈련 할 생각은 없나?”
“사양하겠습니다.”
피어슨은 끝내 임완수 코치의 조언을 무시했다.
불안불안하게 이어지는 나날, 그렇게 시간은 흘러 9월 21일이 밝았다.
피어슨은 최근 24경기에서 타율 0.277에 그치고 있지만 홈런 10개를 추가했다(시즌 48호).
라이온즈 역사상 가장 많은 홈런을 날린 우타자가 된 것, 자신감을 회복한 피어슨은 오늘도 강한 스윙을 계속했다.
뚝!!
그러다 허리에서 뭔가 둔탁한 느낌을 받았다.
말썽을 부리던 어깨가 아니라 본인도 당황, 일단 참고 스윙을 해 봤지만 이내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시즌 막바지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깜짝 놀란 의료진이 현장에 투입되면서 관중석은 그늘에 잠겼다.
“아~ 일어나질 못하는데요. 역시 어깨 부상인가요?”
“글쎄요. 어깨를 다친 거라면 일어나지 못할 이유가 없죠. 제가 볼 때는 허리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허리라고요?”
“예, 풀 스윙을 할 때 허리에 가해지는 힘이 1톤 정도로 알려져 있거든요. 근력이 받쳐주는 프로 선수라도 이런 스윙을 계속하면 탈이 날 수밖에 없는데, 최근 피어슨 선수가 워낙 강한 스윙을 반복하지 않았습니까. 결국 탈이 난 것 같네요.”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앉지도 눕지도 못하는 선수, 결국 피어슨은 들것에 실려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행복으로 끝날 뻔 했던 320만 달러 투자가 비극으로 바뀌는 순간, 현장에 있던 이인영 대표도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위안으로 삼을 게 있다면 김상표가 멀티 홈런 포함 4타점 경기를 펼치면서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
4년 전, 드래프트에서 관심도 못 받아 트라이 아웃까지 거쳐야 했던 선수가 이렇게 잘해 줄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나.
라이온즈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상규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유망주, 피어슨의 이탈은 안타까웠지만 김상표의 활약 덕분에 라이온즈는 별 위기 없이 리그 3위로 시즌을 마쳤다.
리그 3위로 시즌을 마무리 한 건 17년 만의 기록, 마지막 경기를 지켜 본 이인영은 구단 주주들과 악수를 나눴다.
잃은 게 크지만 잃은 것만 따지지 않는 게 기업인, 지난 4년 동안 기업인들과 많은 시간을 보낸 이인영도 그 특성에 물들었다.
“대표님, 피어슨의 이탈이 너무 크지 않나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김상표 선수가 공백을 메워줄 테니까요.”
“정말 그게 가능할까요?”
“미래가 불확실하다면 제 감을 믿어보세요.”
이인영 대표의 말은 무섭게 맞아 떨어졌다.
준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김상표는 4타수 무안타 2삼진을 기록하며 부진했지만, 2차전에서 3안타 포함 3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2연승을 이끌었다.
올 시즌 47경기에서 타율 0.266, 홈런 8개를 기록한 어린 선수의 반란,
김상표를 3번에 배치한 이인영 대표의 전략이 멋지게 맞아들면서 라이온즈는 플레이오프 본선에 진출했다.
“대표님, 본선에서도 김상표 선수를 3번에 배치하실 겁니까?”
“당연하죠.”
“3번에 배치하기엔 표본이 너무 부족한 선수라는 팬들의 지적도 있었는데, 대표님은 이런 결과를 예상하신 겁니까?”
“예상이라는 거창한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 선수에게 부족한 건 실력이 아니라 명성이니까요. 김창표 선수가 앞으로도 라이온즈의 일원이 되려면 그 자격은 본인이 증명 해야합니다.”
드래프트도 받지 못하고 트라이 아웃으로 라이온즈 일원이 된 선수, 아버지 인맥으로 선수가 됐다며 비아냥거리는 팬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인영은 힘을 쓸 줄 아는 김상표의 타격에 주목, 가능성을 보고 영입을 결정했다.
그리고 4년의 노력을 거쳐 쓸만한 선수로 성장, 이제 부족한 건 명성 뿐이다.
처음부터 명성을 얻고 시작하는 유망주가 몇 명이나 되나.
하지만 그 명성이 있어야 여론을 납득시킬 수 있는 세상, 이인영은 유망주에게 그 기회를 제공했을 뿐이다.
살리지 못한다면 다시 묻힐 뿐, 이인영 대표는 내 덕분에 김상표 선수가 빛을 봤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따아악~!!
“와아아아~!!”
ST 위너스와의 플레이오프 1차전, 김상표는 첫 타석부터 에릭 하머스의 초구를 받아쳐 좌중간을 넘어가는 홈런을 날렸다.
존 피어슨이 부상을 당하자 이제는 끝났다며 절망한 라이온즈 팬들, 다른 팬들도 너희는 이제 끝났다면 조롱을 이어갔다.
그런데 이런 기막힌 반전이 일어나다니, 라이온즈 주주들도 경악했지만 이인영은 차분한 얼굴로 경기를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