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화. 욕 먹는 자리 (5)
“초구는 바깥쪽, 지켜보는 군요.”
“하퍼 선수가 올 시즌 병살이 19개가 있는데, 저는 이게 더 무서운 기록이라고 봅니다.”
병살이 나오는 상황은 이유는 대략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타자의 타구 속도가 빠르던가, 아니면 투수가 땅볼 타구를 유격수나 2루수 방향으로 유도하는 능력이 탁월하던가.
분명한 건 야구의 본고장 메이저리그에서 땅볼 유도형 투수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거다.
땅볼이 투구 수를 줄이고 병살을 유도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현실, 실제로 투수가 투구수 관리에 실패하는 요인은 땅볼 유도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볼넷을 많이 내주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타구 속도가 빠른 메이저리그에서 타격을 허용한다는 건 그만큼 위험한 일, 땅볼 유도 투수가 점차 찬 밥 신세를 받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KBO는 어떨까.
이인영은 그동안 경기를 지켜보면서 의도적으로 땅볼을 유도하는 투수들이 많다는 걸 알아챘다.
정말 땅볼 유도가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은 건가. 어쨌든 의도와 다르게 땅볼이 병살타로 이어지는 경우는 정말 드문 편이다.
‘똑딱이에 발이 느리던가, 아니면 타구가 운 좋게 야수 정면으로 가던가’
KBO에는 발도 느리면서 장타도 못 치는 타자들의 제법 많다.
이런 선수들 상대로는 땅볼을 유도해야 병살 확률이 높아지는 건 당연, 하지만 지금 타석에 선 에밋 하퍼는 그런 유형은 아니다.
타구를 강하게 치기 때문에 병살이 나오는 유형,
이런 선수를 상대로 땅볼을 유도해 병살 플레이를 만들겠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웃으면 되는 거다.
올 시즌 병살 19개를 쳤지만 홈런 31개와 119타점을 퍼붓고 있는 하퍼, 병살 유도 작전은 정말 효과적이었나?
땅볼을 유도하겠다면 말릴 생각은 없었다.
“2구도 지켜봅니다. 카운트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하퍼 선수가 4월과 달라진 게 이거죠. 4월에는 이런 공도 팔을 뻗어주면서 건드렸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삼진을 당할지언정 이런 공은 손을 안 대고 있습니다.”
“그래서 루킹 삼진도 많은 편이지만, 타격이 되면 결과는 확실하죠. 공 하나 하나가 살얼음 판입니다.”
3구(볼)를 지켜본 하퍼는 4구를 힘껏 잡아당겼다.
삼유간으로 날아드는 타구, 정상적인 2루 송구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몸을 좀 더 일찍 열어줘야 2루 송구를 할 수 있는데, ST 위너스의 유격수 이민호는 그런 유연성이 부족, 안전을 택하면서 병살타로 이어지진 않았다.
아웃은 됐지만 하퍼의 현재 위상을 보여준 타격, 하지만 많은 팬들은 그 가치를 이해하지 못했다.
따악~!!
“아~!!”
“병살이잖아!!”
다음 타석에서도 하퍼는 유격수 땅볼을 때렸다.
6 – 4 – 3으로 이어지는 병살 플레이, 포스트시즌이 걸린 이 중요한 경기에서 3번 타자가 땅볼만 때리고 있다.
팬들의 원망이 쏟아지는 건 당연, 반면 이인영 대표는 별 다른 표정 변화 없이 경기를 지켜봤다.
‘병살이 무서우면 출루를 하지 말아야지.’
병살은 절대 때리지 말라고 아우성인 팬들, 그런데 병살이 싫으면 출루를 안 하면 된다.
그게 병살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 아닌가? 병살은 치지 말라면서 역전 홈런이 나오길 바라는 팬들, 야구를 모르니까 할 수 있는 말들이다.
저런 사람들이 인터넷에서는 전문가들처럼 행세하고 다니겠지, 이인영은 그게 싫었다.
야구를 정말 잘 아는 건 코칭 스태프와 선수들, 우리가 저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어야 하나?
일부 팬들은 라이온즈 구단을 두고 팬의 목소리를 무시한다고 하는데, 이치에 맞는 소리를 해야 들어주든 말든 할 거 아닌가.
병살은 싫고 홈런은 좋다니, 그런 이중적인 잣대는 무시해버렸다.
[따악~!!]
“아~ 이번에도 2루수 정면, 유격수를 거쳐 다시 1루에서 아웃입니다. 오늘 라이온즈는 병살만 4개를 기록하는 군요.”
“적극적인 타격을 하는 건 좋은데 오늘은 영 경기가 안 풀리네요. 조금 더 신중한 타격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날 라이온즈는 안타 11개를 때리고도 1득점도 올리지 못했다.
살다 보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날도 있는 법, 타자들의 무능함을 질책해야 하나 아니면 운이 없었음을 한탄해야 하나.
어쨌든 이날 라이온즈는 ST 위너스에게 4대 0, 패배를 당했다.
선발 이창구가 6이닝을 1실점으로 버텨줬지만 타선이 버텨주지 못하면서 패전, 여기에 불펜까지 붕괴되면서 추격을 하지 못했다.
리그 7위를 유지하면서 포스트시즌 마지노선인 5위와의 격차는 3경기, 라이온즈 팬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라이온즈는 스몰 볼을 할 줄 모르는 건가?]
[한 점이라도 쫒아가는 경기를 했어야지, 어떻게 한방만 노리는 야구를 하냐?]
-> 주자 나간 상황에서 홈런 외친 사람이 누구더라? 팬들 아니었어?
-> 나도 이런 말 하는 사람들 이해를 못 하겠다. 무슨 1~ 2점차 상황도 아니고, 불펜 무너져서 4대 0인데, 보내기 번트로 아웃 카운트를 늘리라고?
-> 비판을 하고 싶으면 정당한 근거를 대, 오늘은 운이 없었을 뿐이야.
-> 광신도 납시셨네. 이러다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해도 찬양할 거지? 머리가 몇 번 깨져야 정신 차릴래?
-> 아직 탈락한 거 아니거든? 병살 4개를 친 타선보다 졌다고 바로 돌아서는 네 그 가벼움과 이중성이 더 경악스럽다.
다른 경기보다 유독 뼈아팠던 패배, 라이온즈 팬덤은 반으로 갈렸다.
기대가 컸던만큼 실망도 컸겠지, 하지만 어쩌겠나.
잃은 것만 따지면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세상, 이인영은 다음 경기도 직관에 나섰다.
“병살 쳐도 되니까 다들 기죽지 말라고”
경기 시작 전, 선수들을 다독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땅볼만 때리던 작년에 비하면 훨씬 나아진 타선, 작년보다 나아지면 된 거 아닌가. 팬들의 목소리도 중요하다고? 야구를 모르는 사람들의 참견에 휘말리면 그게 프론가?
자네들은 아마추어가 아니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래, 나는 프로다. 아마추어가 아니라고’
라이온즈 타자들은 어제처럼 강한 타구에 집중했다.
돈은 많은데 야구는 모르는 어정쩡한 대표라면 어제 패배에 불같이 화를 냈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인영 대표는 뭔가 달랐다.
고집스럽게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 고집과 뚝심을 오가는 태도는 선수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따악~!!]
“2구 타격!! 내야를 빠져 나갑니다!! 김찬성 선수의 안타!! 선두타자가 출루합니다.”
“다른 건 모르겠고 라이온즈 타선이 적극적으로 변한 건 사실이네요. 결과는 둘 째 치고 재미있는 야구를 하고 있습니다.”
이 날도 라이온즈는 보내기 번트는 대지 않았다.
타자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 올라와야 가능한 일, 강하게 칠 줄 모르는 선수들이 널려 있는데 강공을 할 수 있나?
어제 득점권에서 병살 포함 땅볼만 2개를 친 에밋 하퍼도 꿋꿋하게 배트를 돌렸다.
따악~!!
“와아아아~!!”
1사 주자 1 – 2루에서 좌중간을 꿰뚫는 타구, 시즌 120번째 타점을 올린 하퍼는 박수갈채를 받았다.
단일 시즌 120타점은 이인영이 메이저리그로 떠난 2027년 이후 13년 만의 대기록, 다음 타자 게릿 앤더슨도 좋은 흐름을 이어받았다.
[따아악~!!]
“당긴 타구가!! 외야 깊숙한 곳으로 날아갑니다!! 우익수!! 중견수!! 누구도 잡지 못하는군요!! 그 사이 2루 주자는 홈으로!! 타자 주자도 여유 있게 2루에 안착합니다!! 연속 2루타!! 라이온즈가 2대 0으로 앞서나갑니다!!”
“하퍼 선수도 그렇지만 앤더슨 선수의 위용도 만만치 않네요. 어제는 4타수 무안타로 침묵했지만 오늘도 타점을 추가합니다.”
“더 놀라운 건 46경기 밖에 안 뛰었는데 13홈런, 33타점이에요. 라이온즈가 올해 용병 농사는 참 잘 지었습니다.”
찬스에서 병살만 치던 어제와는 다른 분위기,
이날 라이온즈는 장단 15안타를 퍼부으며 10대 4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리그 6위 NA 자이언츠도 승리하면서 7위 자리를 유지, 다만 리그 5위 타이거스가 패배하면서 격차는 3경기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라이온즈에게 주어진 경기는 5게임 뿐,
전문가들은 사실상 힘들다는 진단을 내렸지만 이인영은 선수들에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주문을 넣었다.
ST 위너스는 올 시즌 리그 2위를 달리는 강팀, 작년 시즌에도 상대전적 4승 12패로 절대열세를 기록했다.
반면 올 시즌은 7승 8패로 거의 대등, 내일만 이기면 백중세로 시즌을 마무리 한다.
약팀에게 승리를 강탈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강팀을 이기지 못하면 우승도 멀어지는 법, 마지막까지 근성을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 * *
“자기야, 오늘 일찍 들어올거지?”
“별 일 없으면, 그런데 왜?”
“왜냐니, 오늘 자기 생일이잖아.”
“아, 그랬었나? 되도록 빨리 올 게.”
이곳은 대구의 평범한 가정집, 이인영은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포스트 시즌 진출은 아깝게 실패했지만 라이온즈는 70승 4무 70패, 6년 만에 5할 승률로 시즌을 마무리 했다.
시즌이 끝났으니 이제는 전력을 유지 - 보강할 차례, 생일도 잊고 바쁜 나날을 보냈다.
“대표님, 보고서입니다.”
“음, 수고했네.”
출근하자마자 회계팀이 올린 자료부터 살폈다.
작년 시즌 라이온즈는 매출 774억을 올렸지만, 영업적자 14억 7천 만 원을 기록했다.
모기업이었던 성운 그룹이 영업전선에서 철수한 게 원인으로 작용, 그런데 올해는 작년과 비슷한 매출을 올렸고 영업이익 5억을 기록했다.
매출액에서 티켓이나 기념품을 팔아 올린 수익은 얼마 안 된다.
대부분 모기업에서 스폰서를 받은 자금이 매출에서 큰 지분을 차지하는데, 특히 성운 그룹 자본에 절대적으로 의존해 왔던 라이온즈는 작년 시즌 큰 적자를 기록했다.
그나마 손해를 줄일 수 있었던 건 FA 계약을 최소화 하고, 광고수입 - 사업수익을 끌어 올린 덕분,
모기업 자금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예전과 달리 광고 – 사업 수익으로 60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하지만 한국에서 야구구단을 운영하며 수익 올리는 건 정말 힘든 일,
라이온즈 지분 12%를 가지고 있는 이인영 대표는 올해 4천 만 원 정도의 수익을 받았다.
겨우 이거 벌자고 시즌 내내 팬들에게 욕 먹어가며 구단을 운영했겠나.
정말 야구를 좋아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 내 피 같은 돈까지 투자하며 선수들을 잡았다.
“대표님, 올해는 돈 좀 버셨잖아요? 좋게 생각하세요.”
“벌면 뭐합니까? 다 선수 영입으로 나가는데요.”
그래도 조금 억울했는지 다른 투자자들 앞에서 불만을 쏟아냈다.
팬들은 내가 주식으로 137억, 부동산 사업으로 32억을 벌었다는 소문에만 귀를 기울이지, 구단 운영에 얼마나 많은 돈을 쓰는지는 알아주지 않는다.
칭찬을 받기 위해 시작한 일은 아닌데 조금 서운한 것도 사실, 그래도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 아닌가.
손해를 보든 팬들에게 욕을 먹든 다 각오하고 시작한 일, 그래도 결과가 나오면 나도 뿌듯한 마음이 들지 않겠나.
좋게 생각하며 다음 시즌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