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욕 먹는 자리 (3)
[에밋 하퍼, 한국 입국]
[배은성의 빈자리 채울 수 있을까]
해를 넘긴 1월 27일, 라이온즈가 선택한 용병 에밋 하퍼가 대구 공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10년 프랜차이즈 스타를 내보내고 영입한 선수, 라이온즈 팬들의 반응은 기왕 온 거 잘 했으면 하는 반응과 어디 한 번 두고 보자는 쪽으로 나뉘었다.
[조강지처 내보내고 첩년 들인 거나 마찬가지, 얼마나 잘 하나 두고 보자]
-> 무슨 비유가 그러냐? 프로야구 구단과 선수 관계가 남편과 아내 사이였니?
-> 나도 배은성 나간 건 아니지만 이건 좀 오버 같다.
[그런데 이 듣보잡은 뭐냐? 영입한 이유가 있는 거야?]
-> 메이저리그에서 데뷔 시즌에 63경기에서 20홈런도 쳤던 선수다. 찾아보면 나오잖아.
-> 게으른 기자가 기사에 써 놨으면 내가 이런 질문 했겠냐 XX아?
-> 기자가 기사에 다 써 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 욕부터 하는 거 보니 인성 나오네.
배은성이 몸 값 못 할 때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욕을 하더니, 작년에 조금 해줬다고 다시 돌아선 여론, 이게 원래 팬들의 반응 아니겠나.
어쨌든 이인영은 전지훈련을 지켜보기 위해 미야자키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메이저리그 경력만 따져도 2000안타, 440홈런을 넘긴 전설의 등장, 라이온즈 선수단은 구단주가 뭔가 대단한 비법이라도 전수해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 구단주는 보호막으로 쳐 놓은 그물망 뒤에서 건강용 주스에 빨대를 꽂았다.
훈련을 지켜볼 뿐 이래라 저래라 관심도 없는 태도, 코치 한 명이 그물망 쪽으로 다가가 뭔가 얘기를 하는 모습이 포착됐지만 그게 전부였다.
“정말 구단 운영에 관심 없는 거 아냐?”
“관심 없으면 여기까지 왔겠어?”
이제는 선수들도 혼란스러울 정도, 배은성과 계약을 하지 않은 것도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운 거 아닌가.
하지만 에밋 하퍼는 메이저리그에서도 파워는 검증을 받은 선수, 첫 프리 배팅부터 좌측 그물망을 넘기는 대형 홈런을 때려냈다.
선구안과 외국인에게 엄격히 적용되는 한국식 스트라이크 존에 발끈하지만 않는다면 어떻게든 되겠지.
훈련이 끝난 후 이인영은 에밋 하퍼에게 덕담 아닌 덕담을 건넸다.
“자네, 와이프가 아주 미인이던데?”
뜬금없이 내 아내는 왜 건드리는 건가. 하퍼는 잠시 당황했지만 그러려니 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예, 저에겐 아주 과분한 사람이죠.”
“야구 못하면 자네보다 와이프가 더 유명해 질 거야. 그런 일은 없게 하라고”
한국 팬들은 외국인 용병 와이프에게 관심이 많은 편, 실제로 야구는 못해도 아내가 예쁜 용병은 팬들에게 ‘구단이 야구 실력이 아니라 마누라 보고 뽑았다.’라는 조롱을 받곤 한다.
그런 일은 절대 없어야 하는 시즌, 그제야 구단주의 뜻을 이해한 에밋 하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잘하고 와이프도 칭찬 받으면 되는 거죠.”
“그게 내가 원하는 시나리오네. 꼭 좀 그렇게 하라고.”
이인영은 하퍼의 어깨를 툭 툭 쳐줬다.
적응만 한다면 30홈런 이상은 쳐 줄 수 있는 선수, 다른 선수들에게도 형식적으로나마 기대를 한다는 덕담을 건넸다.
‘큰 저택도 기초공사가 중요한 법, 신중하게 가자.’
하짐나 성운 라이온즈는 일본 프로야구 팀과의 연습 경기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사카이 라이노스와의 경기는 8대 2 대패, 그나마 에밋 하퍼의 솔로 홈런이 없었다면 영봉패를 당했을 거다.
승부가 결정 난 상황에서 나온 한방이었지만 팀에서 그나마 거포 노릇 해 줄 수 있는 타자, 믿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자, 미야자키 캠프에서 치러지고 있는 2040 시즌 KBO 전지훈련 경기를 생중계로 보내드립니다. 1회 초 성운 라이온즈의 공격, 김찬성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작년 시즌 성적은 타율 0.226 - 홈런 없이 - 3타점, 경북고를 졸업하고 2037년에 성운 라이온즈에 입단했습니다.”
“라이온즈가 유망주를 못 키운다는 평가를 받은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닌데요. 김찬성 선수도 입단 당시 즉시 전략감이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도무지 성장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작년 시즌은 1군에서 겨우 21경기 뛰었거든요. 이런 식이라면 스쳐지나가는 선수로 남을 뿐입니다.”
계속되는 연습경기, 이인영은 외야에 자리를 잡고 경기를 지켜봤다.
유망주가 넘쳐나는 미국은 있는 선수도 버리면서 전력을 충원할 수 있지만 한국은 재기불가 판정을 받은 선수도 어떻게든 고쳐 쓰려 한다.
그런데 그게 어긋난 애정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게 문제, 고쳐도 자기 입맛대로 고치려는 코치들이 있다.
땅볼을 쳐야 하는 선수에게 뜬공을 치라고 가르치면 맞는 방식인가. 그걸 아는 이인영은 선수들에게 자기 노하우를 전수하지 않았다.
내겐 맞는 방식이지만 받아들일 조건과 준비가 안 된 선수들에겐 오히려 잘못된 상식을 주입할 수도 있겠지, 그래서 훈련에 끼어들지 않은 것뿐이다.
그걸 팀에 관심이 없다고 오해한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 타석에서 타자는 외부와 고립되는 존재다.
누구도 도움을 줄 수 없고 자기 힘으로 난관을 해결해야 하는 입장, 본인이 하고 싶은 야구를 하도록 내버려 뒀다.
도움을 청하고 아니고는 그 다음의 문제, 김찬성은 초구부터 건드렸지만 뜬공으로 물러났다.
내 방식대로 했을 뿐인데 이상하게 눈치가 보이는 기분,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더그아웃에 들어섰다.
3년 동안 1군과 2군을 오간 탓에 누구 앞에서 드래프트 1라운드로 뽑혔다는 말을 하기도 부끄러운 입장,
착잡한 얼굴로 동료들의 타격을 지켜봤다.
‘답이 없으면 차악을 밀어주는 것도 방법’
한편, 경기를 지켜본 이인영은 생각을 정리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리빌딩만 반복하고 있는 라이온즈,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선수가 교체되고 사라졌겠나.
유망주를 기용하기로 했으면 잘 하든 못 하든 끝까지 지켜봐줬어야 했는데, 교체 주기가 너무 짧았다.
지금 전력에선 김찬성을 대체하는 선수를 찾아내는 건 어려운 일, 경기가 끝난 후, 이인영은 감독에게 김찬성을 밀어주는 게 어떻겠냐고 권했다.
“대표님, 그 녀석은 선구안이 안 좋고 성급한 타격을 합니다.”
“글쎄요. 기록은 조금 다른 말을 하는 것 같은데요?”
김찬성은 작년 2군에서 45경기 동안 14삼진 볼넷 11개를 얻어냈다.
1군 성적은 10삼진 4볼넷, 확실히 볼넷을 잘 골라내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그런데 1번 타자에게 요구되는 게 볼넷일까.
안타든 볼넷이든 1루를 밟으면 그만, 김찬성은 어쨌든 치고 나가려는 적극적인 자세는 보여줬다.
선구안을 볼넷을 골라내는 능력으로 오해하고 있는 감독,
1라운드 드래프트를 받았다는 건 라이온즈도 그만큼 기대를 걸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당장의 성적을 위해 1군과 2군을 오르내리게 한 건 구단의 잘못된 정책 아닐까.
말 한 마디가 법인 구단주, 그 권위를 인정한 감독은 김찬성을 꾸준히 1번 타자로 밀어줬다.
이러다 못하면 구단주가 책임을 지겠지, 어쨌든 이렇게 일본 전지훈련과 시범경기 일정을 마친 라이온즈 구단은 새로운 시즌을 맞이했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김찬성은 왜 넣는 거야?]
-> 나도 이해가 안 돼, 이번 시범경기에서 타율 2할 3푼이었잖아? OPS는 6할도 안 된다고, 하위 타순에 넣을 선수를 1번으로 기용해도 되나?
-> 그럼 다른 대안이라도 있냐? 김호성 시범경기 타율 1할에 OPS 0.484, 박규하 2할 3푼에 OPS 0.525다. 너라면 누구 넣을래? 욕을 할 거면 알아보고 하던가.
-> 하아~ 요약해 준 건 고마운데, 진짜 이렇게 보니까 라이온즈 타선 답 없다.
-> 오히려 좋지, 희망고문은 안 해도 되니까.
사실상 자포자기 상태의 팬들, 이럴 거면 돈을 좀 쓰더라도 배은성을 잡는 게 낫지 않았나.
하지만 이미 출항식까지 올린 배, 오프 시즌 동안 나름 바쁘게 움직였던 이인영도 시즌이 시작되자 눈과 귀를 닫았다.
[에밋 허프, 극심한 부진]
[개막 이후 타율 0.184, OPS는 5할 4푼]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그나마 시범경기에서 타자 구실을 했던 에밋 허프는 개막전에서 홈런 하나 기록하고 침묵,
4월 12일에는 4타수 무안타를 기록하며 시즌 타율이 1할 밑으로 떨어졌다. 다음 날 경기에서 3안타를 때려내며 살아나는 듯싶었지만 2할도 안 되는 타율과 하나만 걸려라 스윙으로 팬들의 뒷목을 잡게 했다.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어. 상황은 얼마든지 나빠질 수 있었는데]
-> 이인영 구단주 책임져라. 배은성이라도 잡았어야 했어.
-> 머리에 든 게 돈 밖에 없으니 야구에 관심이나 있겠냐? 나라도 2500억 있으면 구단주 노릇 하다 적당한 시기에 팔아넘기겠다.
-> 혹시 하퍼 와이프 보고 뽑은 거냐? 하긴 얼굴하고 몸매는 좋더라, 구단 홍보용으로 쓰려고 뽑았나?
-> 너 이거 명예훼손 감이다. 캡처 해 둘 게
혼란에 빠진 라이온즈 팬덤,
작년 시즌은 첫 20경기에서 8승 12패를 했는데, 올 시즌은 4승 16패, 말 그대로 바닥을 기고있었다.
설마 더 나빠질까 했던 팬들은 충격과 공포에 할 말을 잃은 상황, 그러건 말건 이인영은 상황을 지켜봤다.
“대표님, 일단 2군으로 내려 보내는 게 어떨까요?”
“내려 보내면? 다른 대안이라도 있나?”
“뭐 … 그건 아니지만 … ”
“대안이 없으면 그런 보고는 나한테 올리지도 말라고, 자네도 우리 팀 사정 뻔히 알면서 왜 그러나?”
코칭 스태프는 하퍼를 2군으로 내려 보내려 했지만 이인영은 칼같이 끊었다.
대안도 없이 비판만 하면 그것도 무책임한 행동, 김찬성과 하퍼가 올 시즌 죽을 쑤면 욕은 내가 먹으면 되는 것 아닌가.
책임을 물어 자르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겨우 20일 지켜보고 2군 행을 결심한 감독, 이인영은 최소 석 달은 지켜보라는 시지를 내려 보냈다.
따악~!!
“와아아아~!!”
그렇게 흘러간 4월, 5월 들어 분위기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4월 한 달 동안 타율 0.202 - 홈런 3개 - 7타점에 머물렀던 에밋 하퍼의 반등, 하퍼는 5월 14경기에서 타율 0.357 – 출루율 0.444 – 장타율 0.585를 기록하며 라이온즈 타선에 안착했다.
다만 5월 들어 홈런이 2개 밖에 없는 건 조금 아쉬운 일, 17일 열린 ST 위너스 전에서 에밋 하퍼는 시즌 5호 홈런을 정조준했다.
“오늘은 바람이 저쪽으로 강하게 부는데?”
“그러네”
“너도 저 쪽을 노리고 스윙해 봐,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경기를 앞두고 김찬성은 하퍼에게 참견 아닌 참견을 당했다.
홈런은커녕 안타도 못 치는 선수에게 홈런을 노리고 스윙을 하라니, 지금 날 놀리는 건가.
개막전 이후 계속 선발로 출장하고 있지만 이렇다 할 결과가 없다 보니 가벼운 농담도 웃어넘기지 못할 정도로 여유가 없는 입장, 그렇다고 잘나가는 용병한테 화를 내서 어쩌겠나.
실력이 없는 프로는 놀림감 밖에 안 되는 법, 경기 시간이 되자 대기타석에서 가볍게 몸을 풀었다.
어쨌든 개막 이후 34경기 연속 선발 출장, 프로 데뷔 이후 내게 이만한 기회가 주어진 적이 있었을까.
이게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했다.
“자, 1회 초 성운 라이온즈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선두타자는 김찬성 선수, 올 시즌 타율 0.244, 홈런 없이 5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쓰자니 애매하고 라이온즈 입장에선 버리기도 아까운 선수거든요. 어쨌든 … ”
[따아악~!!]
“자!! 초구 타격!! 우익수는 계속 뒤로!! 뒤로~ 오!! 담장을 넘어갔습니다!!!! 김찬성 선수의 솔로 홈런!! 초구를 잡아당겨 벼락같은 한 방을 날립니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한 방, 홈런을 친 김찬성은 얼떨떨한 얼굴로 그라운드를 돌았다.
무려 2년 만에 맛 본 1군 무대 홈런, 그제야 에밋 하퍼의 충고를 농담으로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