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욕 먹는 자리 (1)
“쇼 케이스 21일부터 열리는 거 맞죠?”
[예 그렇습니다.]
이곳은 대구의 평범한 가정집, 김상규는 아들의 진로 문제를 두고 라이온즈 구단 관계자들과 접촉했다.
김상규는 라이온즈에서 15년을 뛰며 311홈런, 1112타점을 올린 레전드급 3루수, 17년 전 이인영과 함께 성운 라이온즈의 중심타선을 이룬 적도 있다.
최근 고민은 아들이 이렇다 할 주목을 끌지 못하고 있다는 것, 지금 상황에선 대학 졸업 후에도 드래프트 지명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때 필요한 건 아빠 찬스,
프로야구에서 이름 좀 날렸던 김상규는 프로구단 여기저기에 인맥이 꽤 있는 편이다.
얼마 전 라이온즈의 정식 구단주로 취임한 이인영과도 나름 친분이 있는 관계, 메이저리그까지 섭렵한 전설이 한마디 해준다면 스카우터들도 관심을 주지 않을까.
마침 2월 21일에 열리는 쇼 케이스, 김상규는 여기서 승부를 보기로 했다.
“이 대표님은 그 날 안 오십니까?”
[그건 저희도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기왕이면 와줬으면 좋겠는데 확신이 없는 구단주의 행보, 어쨌든 구단 관계자는 신경 좀 써 달라는 레전드의 부탁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 친구가 김상표라고 했나?”
“예”
보고를 받은 이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야구는 1라운더가 무조건 성공하는 종목이 아니다. 하위 라운더라도 기적이 일어나는 경우가 다수, 주목을 못 받은 구단주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일단 쓸어 담고 보는 게 우선이다.
뭣보다 김상규 선배는 현역 시절 괜찮은 수비와 장타력으로 이름을 날렸던 선수, 그 재능을 이어받았다면 뽑아줘도 괜찮지 않겠나.
젊은 선수들도 지켜볼 겸 간만에 시간을 냈다.
“이번 쇼 케이스는 풀타임으로 치르겠습니다. 참가자들이 마음껏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협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구단주의 지시에 따라 이날 쇼케이스는 풀타임 청백전으로 진행됐다.
이전까지의 쇼케이스를 한 줄로 요약하면 찔끔찔끔, 공을 수십 개라도 던져봤다면 탈락해도 억울하지는 않은데, 공 몇 개 던지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다수다.
공 몇 개와 글러브질 몇 번으로 어떻게 그 선수를 평가하나.
이인영은 일주일 정도 시간을 잡고 쇼 케이스를 진행, 이번에 새로 임명된 노영삼 2군 감독과 스태프까지 동원해 대대적인 행사를 추진했다.
그 축제에 정점을 찍은 구단주의 참석, 쇼 케이스 참가자들은 TV에서만 봤던 레전드에 등장에 바짝 얼어 붙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이번에 라이온즈 구단 대표에 오른 이인영이라고 합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구단주, 선수들은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저 입에서 어떤 말이 이어질까, 주위를 한 번 둘러본 이인영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이 어떤 입장인지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뭔가 보여줘야겠다는 압박 때문에 실력발휘를 못하면 어쩌나, 이런 걱정도 들겠죠. 그래서 이번 쇼 케이스는 풀타임으로 진행됩니다. 모든 선수들에게 동등한 기회가 주어질 테니, 마음 편하게 이번 테스트에 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시작하시죠.”
드디어 시작된 일주일의 시험 무대,
1차전 선발로 지목된 선수들은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아빠 찬스로 구단주 눈에 도장을 찍은 김상표도 그 중 한 명, 일단 대학리그에서 하던 것처럼 청백전에 임했다.
‘뛰어나진 않아도 쓸 만한 선수’
이인영은 김상표의 수비를 이렇게 요약했다.
아버지에 비하면 뛰어나다고 할 순 없지만 나쁘지 않은 실력, 뭣보다 수비는 재능보다 후천적인 노력으로 발전할 수 있는 능력이다.
3루수 수비는 가능성이 편, 가장 중요한 타격에 집중했다.
‘운동능력은 합격, 기본기는 물음표’
구단 마다 선수를 영입하는 기준은 다르다.
기본기를 중시하는 구단도 있지만 운동 능력이 뛰어나면 위험부담을 감수하고라도 계약을 하는 구단도 있는 법, 이인영은 김상표의 기본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지만 가능성은 있다고 평가했다.
그렇다고 저 유망주를 뽑기 위해 다른 유망주들의 기회를 박탈해선 안 되겠지, 어차피 뽑을 정원은 정해져 있고 스태프들과 논의해 최적의 선택을 했다.
[아빠!! 저 합격했어요!!]
“그래!! 잘 했다!!”
막다른 길에서 겨우 살아난 아들, 김상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인맥 작전이 통했던 건가.
상대는 후배지만 나보다 까마득한 위에 있는 존재, 고맙고도 미안한 마음에 전화 통화로 감사의 답을 대신했다.
[단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무리한 부탁을 드려서 … ]
“그런 말씀 마세요. 정말 무능력한 선수였다면 뽑지도 않았을 겁니다. 다만, 앞으로 프로에서 성공하려면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겠지만요.”
[그건 그렇죠. 다 본인 하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기회라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 조만간 얼굴 한 번 뵙죠.”
통화를 마친 이인영은 쓴 웃음을 지었다.
이것도 청탁이라면 청탁인가. 하지만 세상이 언제나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순 없는 법, 가끔은 인맥으로 인생이 결정되기도 한다.
뭣보다 내가 능력 없는 선수를 뽑아준 것도 아니고 나름 현명했던 판단,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 * *
“대표님, 라이온즈는 언제 우승할 수 있을까요?”
“저는 마법사가 아니라 모르겠습니다.”
시즌 개막을 앞두고 이인영은 기자들 앞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오랫동안 너무 깊은 그늘 속에 있었던 라이온즈, 정책 결정권자들의 연이은 실수와 리빌딩 실패로 명문 구단이 동네 북 신세로 전락했다.
하지만 이인영이 구단주에 올라서면서 팬들의 기대도 올라온 상황, 이번 시즌은 뭔가 다르지 않을까.
하지만 신임 구단주는 지금은 승리를 논할 때가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저는 일단 즐거운 야구장을 만들고 싶습니다. 물론 이겨야 경기가 즐겁겠지만, 차근차근 개선해 나갈 생각입니다.”
“일부 팬 여러분들은 대표팀이 선수로 뛰면 승률이 1할 정도는 올라갈 거라고 주장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글쎄요. 그런 주장에 동의한다면 우리 팀 선수들을 무시하는 것 밖에 안 됩니다. 뭣보다 저는 이미 은퇴한 몸입니다. 다시 유니폼을 입는 날건 시구할 때 정도뿐이겠죠.”
약간 기대를 해 봤는데 철벽을 치는 레전드,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최근 팬들과 소통하는 구단주가 인기를 끌고 있는데요. 대표님도 그렇게 하실 겁니까?”
“글쎄요. 대화는 해야겠지만 여론에 끌려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지도자에게는 이게 정말 옳은 일이라는 신념과 결단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욕을 먹는 것도 구단주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평가를 받든 받아들이겠습니다.”
하루 일과를 마무리한 이인영은 퇴근길에 올랐다.
‘현명하게 돈을 쓰자.’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고민은 계속됐다.
고민거리는 전력 유지, 최근 10년 동안 5위 안에 든 적도 없는 팀이 유지할 전력은 있을까.
구단주가 팬들과 가장 많이 충돌하는 건 재계약 문제, 성운 라이온즈는 이인영이 떠난 이후 주축 선수와의 재계약에 인색한 행보를 펼쳤다.
FA 자격을 얻은 선수를 팔고 보상금이나 쓸 만한 선수를 얻어 오는데 급급했던 정책, 그 결과가 이 모양 이꼴이다.
그렇다면 나는 팀 전력을 지키는 행보를 펼쳐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가장 큰 고민은 10년 동안 라이온즈의 주축 선수로 활약한 배은성,
포스트 이인영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배은성은 최근 9년 동안 평균 타율 0.295, 홈런 272개, 839타점을 올렸다.
올스타도 8번이나 뽑힌 라이온즈의 스타, 3년 전 라이온즈와 4년 90억 계약을 맺었고 올해가 계약 마지막 해다.
다시 한 번 4년 계약을 안겨줘야 하나? 그러기엔 매년 기량 하락이 뚜렷한 선수, 특히 장타력의 감소가 눈에 띈다.
2037년 19홈런, 2038년 18홈런, 그리고 작년 시즌은 27개, 겉보기엔 장타력이 일시적으로 회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타율이 0.258로 급락했다.
FA 기간 동안 거둔 성적은 연봉에 비해 처참한 수준, 올 시즌 반등할 수도 있지만 그건 지켜봐야 할 일이다.
선수시절에 비해 차가워진 머리, 그래도 가정에서는 가슴 따뜻한 아버지로 변했다.
“우리 애기 누구 딸이야?”
“아침에 말 했잖아요.”
“잊어버렸어. 누구 딸이야?”
“어휴~ 적어줄 테니까 잊어버리면 안 돼요.”
5살 된 꼬마 아가씨는 고사리 손으로 적은 이름표를 아빠 가슴에 댔다.
[나는 지혜 아빠]
정성껏 적은 이름표, 딸바보 아빠는 고개를 끄덕이며 리액션을 취해줬다.
“그래, 이거 달고 다니면 지혜가 아빠 떼놓고 가도 사람들이 아빠 지혜한테 데려다주겠지?”
“저는 아빠 안 떼놓고 가요.”
“그래? 나중에 커도 결혼 안 하고 아빠 옆에 있을 거야?”
“ … 방금 한 말 취소할 게요.”
오늘도 아빠를 들었다 놨다 하는 녀석, 딸의 사랑이 고픈 아빠는 언제 떠날지 모르는 아기 새를 품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마침 자리에 낀 아내, 이인영은 그 옆에서 끔찍한 말을 늘어놨다.
“구단주 하지 말고 농사나 지을걸 그랬어.”
“무슨 농사?”
“자식 농사, 한 그루 더 심어야 되나?”
혜진 씨는 몸을 떨었다.
올해 40인데 셋 째를 보겠다니, 징그러운 소리 좀 하지 말라며 튕겼지만 요즘 들어 치근덕거리는 남편이 싫지도 않았다.
“지혜야, 동생 데려오는 거 어떻게 생각해?”
“ … 데려올 거예요?”
데려오기만 해 보라는 눈빛, 아내의 암묵적인 허락은 받았는데 최종결정권자가 사인을 안 해주고 있으니, 어쩌겠나.
상관 눈치 안 보는 사람도 있는 법, 그렇게 평화로운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들었다.
“자기 정말 괜찮아?”
“뭐가?”
“구단주는 욕먹는 자리잖아. 언제나 환호만 듣던 당신이 그걸 감당할 수 있겠어?”
혜진 씨는 남편의 앞날을 걱정했다.
말이 좋아 구단주지 사실 욕받이 자리 아닌가.
거기다 뿌리부터 썩어버린 구단을 개혁해야 하는 입장, 왕년의 슈퍼스타가 팬들의 분풀이 대상이 되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혜진 씨는 말리고 싶었지만 남편의 의지는 확고했다.
“욕먹는 게 겁나면 야구 선수 했겠어?”
“그래도 난 조금 그래”
“말 돌리지 말고, 오늘 우리 해야 할 일이 있잖아?”
은근슬쩍 말을 돌렸는데 진짜 한 그루 더 심을 작정인 남편, 나무가 건강하게 자라려면 토질이 좋아야 하지 않겠나.
아내가 부담스럽다면 강요해선 안 되는 법, 한참 동안 눈알을 굴린 혜진 씨는 입장을 밝혔다.
“저기 … 조금만 늦게 심으면 안 될까?”
“알았어.”
“정말 괜찮아? 삐친 거 아니지?”
“나는 남의 땅에 허락도 없이 깃발 꽂는 사람 아니야.”
부부라도 서로 지킬 건 지켜줘야 하는 법, 결혼 전에도 이랬던 사람 아닌가.
하지만 혜진 씨는 오늘 남편이 허락 없이 깃발을 꽂아주길 은근 기대했다. 남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게 남편의 문제, 이후에도 계속 눈치를 살폈다.
* * *
“자~ 여러분!! 큰 박수로 라이온즈의 전설을 환영해주시길 바랍니다!!”
“와아아~!!”
드디어 밝은 개막전, 구단주 자격으로 돌아온 이인영은 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타석에 섰다.
보통 시구를 하는데 특이하게 방망이를 잡은 구단주, 사전에 동의를 받은 베어스의 선발 진사율은 캡을 벗어 예를 표했다.
‘설마 정말 치겠어.’
진사율은 눈치 게임을 펼쳤다.
상대는 KBO와 메이저리그에서 통산 700홈런을 전설, 어설프게 공을 던졌다가 홈런을 맞는 거 아닌가.
실전에서도 공 하나를 두고 이렇게 고민한 적이 없는데, 한참동안 시간을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