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이 날이 영원히 계속되도록 (10)
“자, 이 타석이 이인영 선수의 공식 경기 마지막 타석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3타수 2안타, 홈런 포함 2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본인답게 마무리가 됐으면 하네요.”
“글쎄요 … 이인영 선수다운 마무리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
임선우 위원의 질문에 박한우 위원은 입을 떼지 못했다.
화려한 끝내기 홈런이나 안타? 지금은 그런 극적인 장면이 나올 상황은 아니다.
전설의 마지막이라고 언제나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박한우 위원은 통산 마지막 타석에서 2루 땅볼로 아웃 됐다.
설마 그게 마지막이 될 거란 생각은 못 했는데, 그만 물러나라는 구단의 압력과 이제 그만 해야겠다는 자포자기적 심정이 은퇴로 이어졌다.
생각해보면 너무 무기력했던 마무리, 그제야 여기서 해야 할 말이 떠올랐다.
“이인영 선수는 언제나 타석에서 투수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였거든요. 마지막까지 그런 대우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워싱턴의 불펜 테렌스 스피크는 94마일 빠른 볼을 바깥쪽에 밀어 넣었다.
이인영이 늙어빠진 호랑이라면 자신있게 가운데로 밀어 넣지 않았겠나.
마지막까지 투수들에게 강타자 대접을 받고 있는 애제자, 이 정도면 괜찮은 마무리 아니냐는 해설에 경기를 보던 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다음 공도 볼이 되자 포수는 타자의 눈치를 살폈다.
현재 스코어는 5대 2 세인트루이스의 리드, 9회 초 공격이 남아 있는 워싱턴은 경기를 포기할 상황이 아니다.
전설의 공식경기 마지막 타석이라고 서비스를 베풀어 줘야 하나.
안타 하나 정도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서비스 하나 잘못했다가 가게가 문을 닫을 수도 있다. 그 정도로 위협적인 타자, 우리가 숙일 테니 볼넷으로 만족해주길 바랐다.
“우우~ 우~ ”
사방에서 쏟아지는 세인트루이스 팬들의 야유, 하지만 이인영은 차분하게 다음 공을 기다렸다.
쓰리 볼이 되자 박수로 들썩였던 관중석은 야유로 들끟는 상황, 그러건 말건 곧 사라질 전설은 차분하게 마무리를 준비했다.
한 번 달려들 만도 한데 끝까지 침묵을 지킨 방망이, 보호대를 풀어낸 이인영은 그대로 1루로 걸어 나갔다.
‘이러면 박수를 못 받잖아.’
주위를 살피던 필립 험버 감독은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야유가 쏟아지는 그라운드, 대타자의 마지막 공식 타석이 이렇게 끝나야 하나. 대주자를 내보내면 분위기가 달라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거기 가만히 있으라고’
그 속마음을 귀신같이 눈치 챈 이인영은 손가락으로 감독을 저지했다.
꼭 타석에서 커리어가 마무리 돼야 한다는 법은 없다. 나는 루상에서도 위협적이었던 존재, 1루에서 멀어지며 상황을 살폈다.
“자, 이제 마이크 호스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오늘 4타수 1안타에 타점 하나, 앞선 타석에서 날카로운 타격을 보여줬습니다.”
“이인영 선수는 피했다고 해도 여기서는 그게 안 되죠. 초구를 노려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박한우 위원의 예상대로 마이크 호스는 초구를 노렸다.
하지만 초구는 몸 쪽으로 떨어지는 변화구, 헛방망이를 돌린 마이크 호스는 벨트를 끌어 올리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인영은 헬멧을 꾹 눌러 쓰고 1루에서 멀어졌다.
마이크 호스는 우타자, 포수 시야를 가리지 못하기 때문에 1루 주자가 도루를 하기엔 애매한 상황이다.
문제는 포수가 초구부터 몸쪽 변화구를 요구했다는 것, 이건 복합적으로 생각해 봐야 한다.
초구부터 나올 가능성이 높은 타자, 카운트를 잡는 공은 위험하지 않겠나. 이게 변화구를 던진 1차적인 이유겠지만 1루 주자가 도루를 시도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따라 붙어야 한다.
타자의 헛스윙을 유도하면 뭐 하나, 도루를 허용하면 이득이 없는 볼 배합, 그럼 다음 공은 어떻게 할 건가.
생각을 정리한 이인영은 1루에서 조금 멀어졌다.
주자는 일단 스타트를 끊으면 무조건 달려야 한다. 가다가 멈추거나 몸을 흔들면 포수와 내야진의 이목을 끌 뿐, 거기다 시간까지 낭비하면서 아웃 될 가능성이 높다.
상대가 머리를 굴린다면 나는 단순하게 행동할 뿐, 타이밍을 잡고 있다가 그대로 뛰어버렸다.
“이거 못 던져요!! 못 던지죠?!!”
“이인영 선수가 2루를 훔쳐냅니다!! 오늘 도루 2개째!! 워싱턴은 그저 지켜볼 뿐입니다!!”
“이 선수가 왜 베테랑인지 보여주는 장면이죠. 상대의 의도를 정확히 읽었습니다.”
여기서 한 점 더 내주면 사실상 경기 접어야 하는 워싱턴, 1루 주자가 도루를 시도했는데 송구가 빠지면 대재앙이다.
그걸 막기 위해 내야로 약간 내려온 중견수, 주자가 뛰었는데 왜 포수는 송구를 하지 못한 건가.
초구부터 변화구를 유도하는 겁쟁이 포수가 송구는 자신 있게 할 수 있을까? 어불성설, 주자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버리자 포수는 어~ 어~ 하다 그대로 얼어붙었다.
겁쟁이들을 단죄한 전설의 질주, 속이 풀린 세인트루이스 팬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따악~!!]
“걸렸고!! 이 타구는 내야를 빠져 나갑니다!! 2루 주자는 3루를 돌아 홈으로!! 홈으로!!! 들어옵니다!!!! 마이크 호스의 적시타!! 이인영 선수의 득점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스코어 6대 2!! 세인트루이스가 승리에 한 걸음 더 다가갑니다!!”
“이런 마무리도 괜찮네요. 마지막까지 본인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보여줬습니다!! 저보다 한참 어린 친구지만 정말이지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완벽한 시작, 완벽한 마무리였습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환호에 헬멧을 벗어 예를 표하는 전설,
감독 – 코치 – 동료들과 순서대로 포옹을 나눈 이인영은 다음 이닝에 대수비와 교체됐다.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 중계카메라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이 날 경기는 세인트루이스의 6대 2 승리로 종료, 경기가 끝난 후 인터뷰실에 소소한 자리가 마련됐다.
왜 다들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이인영은 이런 칙칙한 분위기에서는 은퇴 소감을 밝히는 건 눈치 없는 짓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공식 경기 마지막 타석이 볼넷으로 장식 됐는데, 만족하십니까?”
“저는 메이저리그에서 12년 동안 천 개가 넘는 볼넷을 얻어냈습니다. 문제는 현대야구에선 볼넷이 인정받는 기록이 아니라는 거죠. 저도 볼넷보다 안타를 많이 치기 위해 노력했지만 …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만큼 제가 투수들에게 좋은 대접을 받았다는 뜻 아닐까요?”
볼넷은 투수와 타자 모두에게 외면받는 기록,
빠른 볼에 자신이 있는 요즘 투수들은 타자와의 승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볼넷 천 개를 얻어냈다는 건 내가 그만큼 위협적인 타자였다는 것, 거기다 마지막 타석에서도 그런 대우를 받았다.
투수가 알아서 꼬리를 내릴 만큼 위대한 타자, 마지막으로 나쁘지 않았다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은퇴 후, 어떤 일을 할지 계획은 세워두셨습니까?”
“계획대로는 되지 않는 게 인생이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차근차근 생각해 볼 예정입니다. 이게 제 마지막 경기도 아닌데 질문은 이 정도로 하시죠?”
아직 포스트 시즌이 남아 있는 일정, 이별의 인사를 나누기엔 이르다는 말을 남긴 전설은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 * *
“우리 점심 먹을까?”
“응, 내가 할게.”
“자기는 그냥 있어.”
“내가 한다니까. 어차피 할 일도 없어.”
평화로운 주말의 한가한 가정집,
커리어를 마무리 한 이인영은 평화에 한껏 늘어진 몸을 일으켰다. 안타깝지만 마지막 포스트 시즌은 NLCS 탈락으로 마무리,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은퇴를 번복하진 않았다.
작년 이맘때면 내년을 대비해 훈련을 하고 있었겠지, 지금도 몸 관리를 위해 운동을 하고 있지만 예전처럼 몸을 굴리진 않았다.
“저는 아빠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저두요~ ”
아이들은 아빠가 주방을 점령하는 의견에 찬성했다.
내가 해주는 밥은 맛이 없다는 건가. 이인영은 서운함이 붙은 아내의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자기도 내가 해주는 밥은 맛없어?”
“솔직하게 말 할게. 당신은 방법이 잘못 됐어.”
가족의 건강을 챙긴다며 너무 극성을 떠는 아내,
달걀을 기름 속에 내던질 게 아니면 달걀프라이는 뭐 하러 먹나. 건강하게 먹자는 엄마와 기왕 먹을 거 맛있게 먹자는 아빠, 아이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아빠는 주방을 점령했다.
“자기야!! 무슨 기름을 그렇게 많이 넣어?!!”
“이 정도는 넣어야 고소해지지.”
“하아~ 안 되는데 … ”
이인영은 보란 듯이 프라이팬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지글지글 맛있게도 익어가는 달걀, 그 다음은 끓고 있는 냄비에 설탕과 양념을 들이부었다.
“자기야!! 그만 해!!”
“뭐? 더 넣으라고?”
“장난치지 말고!! 더 넣으면 안 돼!!”
“가끔 먹는 거야. 매일 이렇게 먹는 거 아니잖아.”
지금 아내의 표정은 뭉크의 절규 수준, 반면 아이들은 화끈한 아빠의 요리에 열광했다.
너무 잘 먹어주는 녀석들, 이인영은 그 옆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20년 가까이 야구를 하면서 수많은 팬들의 사랑과 환호를 받았지만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아빠만큼 기쁜 게 또 있을까.
반면 남편에게 주방을 점령당한 아내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안 먹어?”
“….”
“가장이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차린 거니까 성의를 봐서라도 먹어”
그제야 한 술 뜨는 아내, 남편이 차린 밥상 맛을 본 혜진 씨는 눈을 크게 떴다.
분하지만 나의 완패, 왜 아이들이 남편의 요리에 열광하는지 대략 알고 있었지만 오늘에야 완패를 시인했다.
소소하지만 행복한 나날의 연속,
그라운드를 누비던 화려한 나날은 돌아오지 않겠지만 이런 소소한 행복이 매일 이어지는 것도 괜찮지 않겠나. 이인영은 지금 누리는 행복에 만족했고, 이 날이 영원히 계속되길 바랐다.
“아빠아~ ”
“왜?”
“오늘도 집에 있을 거야?”
“그럼, 왜? 아빠가 집에 있어서 좋아?”
“어 … 신기해.”
요즘 말문이 트인 막내딸은 아빠의 웃음보를 자극했다.
기왕이면 좋다고 해줄 것이지 신기하다는 건 뭔가, 하긴 매일 집 밖에 있던 아빠가 집에 있으니 이런 반응도 당연한 거겠지.
앞으로 많이 놀아주면 되는 거 아닌가, 훌쩍 자란 막내딸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자기야, 생각해 봤어?”
“뭐가?”
“구단 살 거냐고”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평화로운 식탁 위에서 심각한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얼마 전, 성운 라이온즈는 모기업 성운 그룹이 프로 야구구단 경영에서 손을 떼며 새로운 주주 찾기에 나섰다.
라이온즈 팬들은 이인영을 새로운 구단주로 추대하자며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메이저리그에서 12년 동안 활동하며 축적한 연봉은 약 4억 3천만 달러, 그 중 40% 이상을 세금과 이런 저런 부대비용으로 소모 했지만 지금도 2400여 억 원의 돈이 수중에 있다.
팀을 말아먹은 라이온즈 경영진에 팬들의 분노는 절정에 이른 상황, 하지만 이인영이 라이온즈 구단주가 될 가능성은 낮았다.
내가 기업 총수도 아니고 구단을 사들여 얻을 이득이 뭐가 있나.
그 부담을 혼자 감수하는 것도 어려운 일, 그나마 현실적인 시나리오는 다른 기업을 끌어들이고 내가 자금을 조금 더 보태 구단 경영권에 개입하는 거다.
문제는 그만한 투자금을 어디서 끌어 오냐는 건데 혹시 또 누가 아나.
일이 잘 풀려서 구단주가 될 지도 모를 일, 이인영은 프로야구 판도를 살필 뿐 적극적인 대응은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