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299화 (299/309)

299화. 이 날이 영원히 계속되도록 (9)

“So, ladies and gentlemen, won't you please join me in giving a warm welcome to the man. During his 18 year career, Lee has established himself as one of the league's greatest hitters. This is regarded as one of the memorable scene in Major League history.”

= 신사 숙녀 여러분들 그분을 환영으로 맞이해 주십시오. 지난 18년 동안 리는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타자로 활약했습니다. 이 장면은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위대한 장면 중 하나로 여겨질 겁니다.

9월 27일,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세인트루이스 지역 해설위원은 타석에 들어서는 이인영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메이저리그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던 선수의 마지막, 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 박수를 보냈고 특별석에 앉은 이인영의 가족들도 그 대열에 동참했다.

사라지기 때문에 전설이라는 말을 남긴 영웅의 마지막, 하지만 이인영은 주변의 환대에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게 마지막이 아닌데?’

세인트루이스는 올 시즌도 포스트 시즌 진출을 확정지었다.

며칠 후면 다시 볼 사람들이 이런 대우를 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태연하게 타석에 들어섰다.

“자, 이인영 선수가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의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351 - 홈런 46개 - 128타점, 은퇴하는 선수의 시즌 기록입니다.”

“이해가 안 되네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그냥 번복하면 되는 거예요.”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 박한우 위원, 하지만 눈치 없는 애제자는 이별을 재촉하듯 초구부터 힘차게 배트를 돌렸다.

아쉽지만 2루 정면, 1루까지 중반 쯤 달린 이인영은 미련 없이 더그아웃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웃을 당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질주했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 사방에서 장난 섞인 질타가 쏟아졌다.

“마지막이라고 너무 대충하는 거 아냐?”

“내가 다치면 가족들이 슬퍼 한다고, 애도 없는 네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알겠냐.”

간만에 경기장을 찾은 가족들, 그 앞에서 아빠가 부상을 당하면 무슨 의미가 있나.

땅볼에 최선을 다하는 것도 좋지만 기왕이면 홈런을 치고 베이스를 도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낫지 않겠나.

땅볼에 최선을 다하는 건 홈런을 못 쳤을 때 해도 늦지 않다며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이어지는 원정 팀 워싱턴의 2회 초 공격, 선두 타자 로저 존스는 페이크 번트를 시도했다.

번트는 생산성이 떨어지는 공격으로 알려졌지만 상황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어 투수가 좌완, 타자가 좌타라면 어떨까.

3루쪽으로 번트를 대는 건 자살행위, 좌완은 투구 후 몸의 중심이 3루 쪽으로 넘어오기 때문에 번트에 신속히 대처 할 수 있다.

공을 잡아 1루로 던지면 그만이라 내야진을 흔들지도 못하고 아웃만 헌납하는 최악의 공격, 하지만 2루로 공을 굴린다면 얘기가 다르다.

투구 후 중심은 이미 3루로 넘어갔으니 투수가 대응하는 건 불가능, 1루수와 2루수 둘 중 하나가 타구를 처리해야 한다.

거기다 우타보다 1루에 조금 더 가까운 좌타자는 2루수와의 달리기 경쟁에서 유리한 입장, 방향만 잘 맞추고 주력에 자신이 있다면 좋은 결과가 나올 확률이 높다.

하지만 최근엔 이런 시도를 하는 타자가 거의 없는 게 현실, 로저 존스도 페이크 번트 후엔 정상적인 타격으로 돌아왔다.

‘다시 시도 해 볼까.’

2구를 지켜본 로저 존스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생각보다 깊숙한 곳에 있는 2루수, 저 정도면 방향만 잘 맞춰도 되지 않을까. 달리기라면 자신 있는 편, 하지만 번트를 대겠다는 의도가 읽히면서 2루수가 내야로 진입했다.

결과는 아웃, 로저 존스는 아쉬움을 표하며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너무 빨랐어.’

이인영은 기습 번트 실패 이유를 나름대로 분석했다.

일부 좌타자는 달려나가면서 번트를 하곤 하는데, 이렇게 빨리 자세를 잡으면 투수도 야수진도 당연히 그 의도를 눈치 챈다.

최대한 마지막까지 번트 의도를 숨기는 게 포인트, 3할에 30홈런 치는 타자가 기습 번트를 몇 번이나 해봤겠나.

하지만 이인영은 가끔 이 작전으로 좌타자와 내야진을 뒤흔든 전력이 있다. 마지막이니 모든 선수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다음 타석에서 직접 시범을 보였다.

[딱~!]

“자!! 번트 댔는데요?!! 2루수가 공을 놓칩니다!! 이인영 선수의 번트 안타!! 내야진의 허를 완전히 찔렀습니다!!”

“넬슨 선수가 전혀 생각을 못한 것 같습니다. 지금은 투수가 간섭할 상황은 아니었고, 2루수가 처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거든요. 스타트 자체가 늦었습니다.”

눈 뜨이고 코 베인 워싱턴 진영은 어리둥절, 다음 타자 마이크 호스가 볼넷을 얻어내면서 이인영은 2루까지 진루했다.

“너무 빨랐어. 다 보였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귀 닦고 잘 들어, 네 타율을 1푼 정도 올려줄 수 있는 비결이니까.”

베테랑은 잠시 경기가 중단 된 사이, 유격수 로저 존스와 대화를 나눴다.

달리기에 자신이 있다면 번트를 홈플레이트 앞에서 대는 게 포인트, 실제로 이인영은 이번 타석에서 마지막까지 발톱을 감추고 있다가 공을 2루로 굴렸다.

40홈런 타자가 설마 번트를 댈까, 방심했던 탓도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의도를 숨긴 덕분에 2루수는 전혀 대응을 하지 못했다.

로저 존스는 마이너리그에서 대도로 이름이 높았던 선수라 타율이 1푼만 올라도 연봉이 달라질 수 있다.

장타력이 떨어져 안타와 빠른 발로 먹고 사는 선수들에겐 이런 것도 중요한 요소, 베테랑은 앞날이 창창한 유망주에게 잔재주도 부지런히 갈고 닦으면 성공할 수 있다며 용기를 불어 넣어줬다.

“당신은 도대체 정체 뭐야?”

“왜 그런 소리를 해?”

“이해가 안 돼. 홈런 치는 기술도 가지고 있는데 그런 잔재주까지 갖춘 건 불공평 한 거 아냐?”

“원래 세상은 불공평한 거야. 잘난 놈이 다 가져가니까.”

이인영은 보란 듯이 3루 도루까지 해냈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었던 플레이를 38살 노장이 하고 있었을 줄이야. 로저 존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말 한대로 해 봐!! 마지막까지 발톱을 감춰야 돼!!”

다음 이닝은 더 가관, 이인영은 타석에 들어서는 로저 존스에게 내가 시킨대로 번트를 대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다 듣고 있는데 너만 들어봐 라고 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세인트루이스의 2루수 맥클랜드는 깊숙한 곳으로 이동하며 번트를 도발, 로저 존스는 번트는 포기하고 타격에 집중했다.

[딱~!!]

“타격, 파울입니다.”

“지금도 중심이 1루로 쏠리면서 타격을 하죠. 역시 야구는 운동능력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기본기가 이래서 중요한 거죠.”

선수 보는 눈이 까다로운 박한우 위원은 오늘도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로저 존스는 뛰어난 운동신경으로 학창 시절 모든 종목을 석권, 그런데 야구는 조금 늦게 시작했다.

운동을 워낙 좋아해서 덤처럼 시작한 스포츠, 그런데 점차 야구에 빠져들면서 이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문제는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하기엔 기본기가 너무 부족했다는 것, 운동능력만으로 안 되는 게 야구라 마이너리그에서 3년 동안 고생하기도 했다.

단점이 뚜렷하지만 장점을 살리면 살아남겠지, 로저 존스는 특유의 컨택 능력으로 부족한 선구안을 커버했다.

‘잘 다듬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존스의 타격을 지켜본 이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기가 부족한 유망주라도 그걸 채워나갈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져 있다.

저 정도 컨택 능력이 있다면 재능은 타고 난 편, 은퇴를 앞둔 몸이라 코치 생활도 고려하고 있는데 긁지 않은 복권에 자연스럽게 눈길이 갔다.

따악~!!

‘엇?’

3구를 때려낸 로저 존스는 생각보다 멀리 나가는 타구에 움찔했다.

내가 때려내고도 놀라울 정도, 아웃은 됐지만 전진 수비를 하고 있던 브라이언트가 한참을 뒤로 물러나 잡아냈다.

세상에 다양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유망주도 다양한 유형이 있는 법, 이인영은 이제 승부보다 여러 사람을 대하는 재미에 맛을 들였다.

‘그래도 잔재주는 여기까지다.’

놀면서 하는 경기는 여기까지, 5회 말, 3번 째 타석을 맞이한 이인영은 진지하게 투수를 상대했다.

앞선 타석과는 다른 분위기, 워싱턴 배터리도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초구는 볼입니다.”

“지난 12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선수를 잡아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전력 분석원 – 코치 - 그리고 현장에서 뛰는 선수들도 말이죠. 하지만 올해도 이 선수를 무너뜨리는데 실패했습니다. 이대로 은퇴한다면 리(Lee)는 메이저리그를 상대로 승리하고 도망치는 게 되겠네요.”

“지금 이 선수를 자극하는 겁니까?”

“맞습니다. 이런 말이라도 해야 마음을 돌릴 수 있지 않을까요?”

“하하~ 그렇겠네요.”

[따아악~!!]

“자!! 밀어낸 타구가 우중간으로 높게!! 그대로 담장 너머로 사라집니다!! 번트에 도루!! 홈런까지!!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워싱턴의 포수 칼 벤자민은 홈을 열어뒀다.

당신은 정말 못 이겨 먹겠다는 항복과 경의가 담긴 행동, 그렇게 이기려고 노력했는데 마지막까지 넘질 못했다.

워싱턴은 포스트시즌에서 탈락했으니 이인영과 맞대결하는 게 오늘이 마지막, 사방에서 홈팬들의 박수가 쏟아지자 워싱턴 선수단도 그 대열에 동참했다.

마지막이니 적과의 동침도 허용되는 건가. 그렇게 살아오지 않은 선수 인생, 하지만 여기서 강한 척 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나.

헬멧을 벗은 이인영은 워싱턴 진영을 향해 경의를 표하고 사라졌다.

“형, 저거 얼른 은퇴하라고 박수 쳐주는 거예요.”

“알고 있어.”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요 … ”

“그 입 다물라.”

이충재는 그런 선배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지금 기량이면 메이저리그 통산 500홈런도 노려볼 수 있는데, 은퇴해버리면 누가 좋아할까.

선배는 영입하고 싶어도 어지간한 돈으로는 엄두도 못 내는 몸 값을 자랑한다.

사정 때문에 손가락만 쪽쪽 빠는 구단들에겐 악몽 같은 존재, 워싱턴도 그 중 하나 아닌가. 이충재 귀에는 저 박수 소리가 얼른 역사 속으로 사라지라는 독촉처럼 들렸다.

하지만 은퇴는 누구도 아닌 내 의지로 결정한 일, 이제 와서 되돌릴 마음이 없었다.

경기는 어느덧 8회 말, 위대한 전설의 통산 마지막 타석,

다시 한 번 기립박수가 쏟아졌고 특별석에 앉은 이인영의 가족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퇴는 남편이 하는데 왜 내가 눈물이 쏟아지는 건지, 혜진 씨는 아들이 보기 전에 부끄러운 흔적을 지워냈다.

반면 누구보다 의젓한 아들, 창문에 바짝 붙은 재찬이는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너도 아빠처럼 훌륭한 사람 돼야지?”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애 부담 되잖아요.”

평소 주위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말,

왜 나는 훌륭한 아버지 때문에 부담을 느껴야 하나. 내가 이렇게 클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의 보호가 있었기 때문, 아버지의 위대함에 짓눌린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

“너는 언젠간 아빠보다 더 커질 거야.”

“정말이요?”

“그래, 아빠는 앞으로 늙어가겠지만 너는 계속 성장할 테니까.”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해줬던 말, 그때는 그냥 넘겼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왜 이렇게 서운한 걸까.

시큰거리는 코를 움켜잡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