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298화 (298/309)

298화. 이 날이 영원히 계속되도록 (8)

[토마스 그린, 팀 못 찾을 듯]

[은퇴 수순 밟나]

해를 넘긴 2월 27일, 휴스턴 지역 기사는 토마스 그린의 은퇴를 예고하는 기사를 올렸다.

선수는 언제 은퇴하는가.

기량이 떨어져 구단의 선택을 받지 못했기 때문? 아니면 선수 생활을 이어가겠다는 의지가 떨어져서? 어쨌든 휴스턴 지역 기사에 토마스 그린은 발끈했다.

“나는 은퇴한다고 말한 기억이 없다. 왜 내 은퇴를 다른 사람들이 결정하는 거냐?”

사실 11년 전 토마스 그린은 은퇴 위기에 몰린 적이 있다.

당시 토마스 그린은 37살의 노장이었고 클리블랜드와 2년 1800만 달러 계약이 남아있었다.

구위도 떨어지고 전체적으로 예전 같지 않은 선수, 클리블랜드는 작은 돈이라도 아끼기 위해 노골적으로 노장 선수를 무시했다.

지역봉사에 초청하지 않은 게 결정타, 지역 팬들에게 얼굴을 알리는 행사에 초청을 안 했다는 건 팀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과 다를 게 없었다.

이런 무시 속에서도 토마스 그린은 38살 시즌에 5승 3패 평균자책점 2.58을 기록하며 부활, 살아남기 위한 투쟁은 그 때부터였다.

난 은퇴할 마음이 없는데 왜 주위 사람들이 내 인생을 결정짓는 건가.

토마스 그린은 스프링캠프가 열리는 3월 초까지 버텼지만, 계약을 맺겠다고 손을 내미는 구단은 나타나지 않았다.

계약이 무슨 봉사활동도 아니고, 100마일을 던지는 불펜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49세 노장 선수와의 계약이 웬 말인가.

자존심이 상한 토마스 그린은 메이저리그 개막 하루 전에 은퇴를 선언, 구단의 선택을 못 받아서 은퇴를 하는 게 아니라, 내가 결정한 은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냥 이렇게 지나갈 수도 있었던 사건, 그런데 한국에서 이상한 말이 돌기 시작했다.

“혹시 이인영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돌아오면, 성운 라이온즈에서 은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아니죠. 다 떨어진 기량으로 돌아와 봤자 자리 없습니다. 프로는 냉정한 거니까요.”

논란의 말은 전 소속팀 성운 라이온즈 쪽에서 나왔다.

김한성 감독은 노장을 찬밥 취급하는 걸로 유명, 선수의 은퇴는 본인이 아닌 구단의 뜻에 따라 결정되는 거라며 논란을 일으킨 적도 있다.

하지만 이인영은 지금도 성운 라이온즈 팬들 입에 오르내리는 전설적인 존재라는 게 문제,

100번 양보해도 다 떨어진 기량으로 돌아와 봤자 자리 없다니, 이게 구단 레전드를 대하는 감독의 태도인가.

이런 말을 지껄이는 감독 밑에서는 어떤 선수도 뛰기 싫겠지.

아직 이인영은 메이저리그 선수고 KBO에 복귀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지만 라이온즈 팬들은 김한성 감독을 맹비난했다.

[이 말 듣고 라이온즈에 정 떨어졌을까 무섭다.]

-> 나도 마찬가지, 이인영 자존심 세기로 유명하지 않나?

-> 라이온즈 구단에서 해명해야 된다. 그래야 나중에 국내 복귀든 뭐든 된다.

사과 쪽으로 흘러가는 분위기, 그제야 라이온즈 구단 단장은 뒤늦은 해명에 나섰다.

“프로의 세계는 냉정한 겁니다. 기량이 떨어진 선수가 설 자리는 없죠. 이인영 선수도 기량이 떨어진 몸으로 국내에 복귀하길 원하진 않을 겁니다. 김한성 감독의 말은 이인영 선수가 복귀하더라도 프로에서 활약할 수 있는 기량이 남아있길 바라는 뜻에서 한 말입니다. 딱히 특정 선수를 비하할 뜻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해명이 팬들의 심기를 더욱 자극했다.

그래서 지금 해명을 하는 건가, 입을 잘못 놀린 김한성 감독을 감싸는 건가.

팬들의 요구를 완전 잘못 이해한 구단, 이 사건으로 라이온즈 팬덤은 발칵 뒤집혔다.

이인영 이후 제대로 된 거포도 양성하지 못하고 성적도 바닥을 기는 라이온즈, 우리가 왜 왕년의 선수에게 매달리는지 이해를 못 하는 건가.

그렇게 실력을 중시하는 팀이 왜 매년 그 모양 그 꼴인지 해명해 보라는 반발이 쏟아졌고, 이 소문은 이인영의 귀까지 흘러 들어갔다.

“실력이 없으면 은퇴하는 게 맞죠. 물론 선택을 못 받아도 은퇴해야 되는 건 마찬가지고요.”

이인영은 의외로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토마스 그린처럼 몸값을 낮추고 구단에 매달리면서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본인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은퇴 시기를 결정할 때가 됐다.

분명한 건 퇴물 취급 받으면서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갈 마음은 없다는 것, 날 원하지 않는 팀은 갈 이유도 없다고 선을 그었다.

“라이온즈 팬 여러분들이 절 아직도 추억하고 그리워한다는 건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팀이 절 원하지 않는다면 그 팀에서 뛸 이유가 없는 거죠.”

국내에서 은퇴할 마음이 없다는 뜻을 완곡하게 표현한 거 아닌가.

메이저리그에서 연봉 5천만 달러를 받는 선수에게 기량 떨어지면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라고 입을 놀린 감독과 변명으로 일관하다 철퇴를 맞은 라이온즈, 이 사건으로 라이온즈 팬덤은 완전히 등을 돌렸다.

아직도 이인영이 라이온즈 팬덤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다는 걸 증명한 사건, 팬들의 사랑을 확인했지만 이인영은 현실을 깨달았다.

‘그래, 어차피 이런 거지, 이기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나는 지금까지 어떻게 선수생활을 했는가.

팀에게 양보할 건 양보했나? 필라델피아 시절, 이인영은 수비 문제로 간섭하는 코치와 거친 입담을 주고받았다.

나에겐 내 방식이 있으니 간섭하지 말라고 선을 그었고, 연봉 문제도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내 조건에 맞춰주지 않으면 팀을 갈아치웠고, 이게 벌써 4번 째 팀이다.

내 멋대로 살아올 수 있었던 건 실력이 있었기 때문, 그게 사라지면 대우받을 이유가 없는 거다. 실력은 떨어졌는데 예전과 같은 대우를 못 받는다고 팀에 원망을 해야 하나?

그건 너무 이기적인 발상, 당연히 날 필요로 하지 않는 구단에서 뛸 이유도 없는 거다.

[휴스턴에서 뛰고 싶다]

은퇴를 한 달 앞두고 이런 말을 했던 토마스 그린, 본인이 원한다고 그게 되는 일인가.

이 정도면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게 맞다.

나는 그런 은퇴를 원하는 건가? 야구가 하고 싶다는 이유로 몸값을 낮추고 구단에게 매달리느니 명예롭게 은퇴하는 게 낫겠다고 결심했다.

“자기야, 나 올 시즌 끝나면 은퇴하려고”

[뭐?!!]

“왜 그렇게 놀래? 언젠간 일어날 일이었잖아.”

시즌 개막을 앞두고 이인영은 아내에게 정보를 흘렸다.

영웅은 영원해서 전설로 남는 게 아니다. 언젠가는 사라지기 때문에 전설이 되는 것,

국내 복귀는 논할 가치도 없고, 작년에 월드시리즈 우승도 했으니 이쯤에서 커리어를 마무리 하기로 했다.

구단도 대비할 시간이 필요하니 조만간 알려야겠지, 일단 4월은 조용히 넘어가기로 했다.

* * *

[따악~!!]

“이번에는 좌측으로 가는 타구!! 좌중간에 떨어집니다!! 2루 주자는 3루를 돌아 홈으로!! 스코어 3대 2!! 세인트루이스가 추격을 시작합니다!!”

“이인영 선수는 나이를 안 먹는 것 같네요. 작년보다 더 페이스가 좋습니다.”

4월 27일, 득점권 기회를 살려낸 이인영은 홈 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보호대를 풀어냈다.

오늘 경기 전까지 성적(22경기)은 타율 0.344 - 홈런 9개 – 22타점, 오늘도 타점을 올리면서 11경기 연속 타점 행진을 이어갔다.

놀라운 건 장타력, 원래 30~ 40홈런을 꾸준히 쳐주긴 했지만 올해는 유독 홈런 페이스가 빠른 편이다.

무려 65홈런 페이스, 38살 시즌에 커리어 하이를 찍는 건가. 나이를 잊은 애제자의 활약에 박한우 위원은 마냥 웃지 못했다.

[이인영 – 세인트루이스 구단에 은퇴 의사 밝혀]

본인에게 직접 물어봐야겠지만, 어제 이상한 내용의 기사가 공개됐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내용, 기사를 접한 팬들도 기레기가 한 건 했다며 코웃음을 쳤다.

이렇게 잘 하는 선수가 은퇴라니 말이 되나, 설마 설마 했지만 박한우 위원은 그 입에서 은퇴라는 말이 나오지 않길 바랐다.

은퇴한다면 나도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이유가 없겠지, 조금만 더 길게 가도 좋지 않겠냐는 생각은 내 욕심인가.

일단 중계석은 어제와 다를 게 없는 분위기, 관중석은 조금 달랐다.

[We’re not ready to kick your ass out of the park, Bear with me until then]

= 우리는 당신을 여기서 쫓아 낼 준비가 안 됐다고, 그때까지 기다려 줘

정말 못 해서 은퇴하는 거라면 엉덩이를 걷어차서라도 야구장에서 쫓아내겠지, 그런 게 변덕쟁이 팬들이다.

하지만 상대는 작년 시즌 세인트루이스에 우승을 안겨준 영웅, 이인영은 지금까지 세인트루이스 팬 가슴에 몇 번이나 비수를 꽂았다.

월드시리즈 우승을 저지한 것만 2번, 그 철천지원수를 이제 막 사랑하게 됐는데 이제 와서 멋대로 떠나겠다고?

우리가 엉덩이를 걷어차 줄 때까지 버텨줘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리가 당신을 미워할 때까지 버텨달라는 문구가 여기저기 솟아났다.

‘그건 내가 알 바 아님’

이인영은 그 외침을 무시했다.

엉덩이를 걷어차이기 전에 꺼져주겠다는데 그게 불만인가. 다음 타석에서도 사방에서 쏟아지는 원성에 귀를 닫았다.

“자, 이인영 선수가 오늘 경기 3번 째 타석을 맞이합니다. 오늘 첫 타석은 2루 땅볼, 두 번 째 타석에서는 좌중간에 떨어지는 안타로 타점을 올렸습니다.”

“주위가 굉장히 소란스럽네요. 마치 포스트시즌을 보는 느낌입니다.”

[따아악~!!]

“자!! 말씀 드리는 사이!! 초구 타격!! 이 타구는 우측 담장을 넘어~!! 갑니다!!!! 이인영 선수의 시즌 10호 홈런!! 한 – 미 통산 역대 697번째 홈런입니다!!”

“한 – 미 통산이라는 말은 … 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왠지 우리가 이 선수의 은퇴를 조금씩 인정하는 계기가 될 것 같네요.”

“아 … 그렇습니까?”

이명한 캐스터는 박한우 위원의 혼잣말 비슷한 푸념에 눈치를 살폈다.

대놓고 편파 해설을 할 정도로 열성을 보였던 사람, 이런 것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가.

메이저리그 역대 383번째 홈런으로 수정을 했다.

이 날 이인영은 4타수 3안타 포함 2타점 경기를 펼치며 팀의 4연승을 견인, 평소처럼 그라운드에서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고 하루를 마무리 했다.

그리고 바로 기자회견실로 이동, 각지에서 몰려온 150여 명의 기자가 빈틈없이 자리를 채웠다.

“이인영 선수, 얼마 전 세인트루이스 구단에 은퇴를 밝혔다고 했는데 사실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왜 은퇴하시는 거죠?”

“은퇴는 제가 정할 일입니다. 여러분들의 동의를 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말문을 막아버리는 반응, 이런 반응을 기대했던 이인영은 얼어붙은 기자들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습니다. 은퇴는 제가 정할 일이지만 그동안 성원을 보내준 팬 여러분들에게도 그 이유를 알릴 의무가 있겠죠.”

이인영은 기자들 앞에서 왜 은퇴를 결심했는지 설명을 이어갔다.

토마스 그린 사태를 시작으로 두 달 동안 벌어진 심경의 변화, 어쩌면 나는 이 결정을 훗날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은퇴를 번복할 뜻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당신이 은퇴하면 섭섭하게 생각할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닐 텐데요. 그래도 괜찮은 겁니까?”

“괜찮습니다. 제가 사라져도 절 대신할 스타는 나타날 테고, 야구는 앞으로도 계속 될 테니까요.”

내가 사라진다고 야구가 없어지겠나.

지금까지 수많은 스타들이 태어나고 사라진 그라운드, 그래도 야구는 150년 넘게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서운할 것도 없는 은퇴, 팬들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기 전에 도망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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