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297화 (297/309)

297화. 이 날이 영원히 계속되도록 (7)

‘뭐가 이렇게 안 풀려?’

무득점 이닝이 계속되면서 휴스턴 벤치는 초조함에 휩싸였다.

시즌 막판, 타선 침체의 주범으로 지목된 마이크 요크와 조엘 바이어,

바이어는 포스트 시즌 들어 살아나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마이크 요크는 오늘도 포인트마다 맥을 다 끊어먹었다(포스트 시즌 득점권 11타수 1안타).

어제 경기에서 휴스턴은 11득점은 뽑아냈지만 세인트루이스의 5실책이 아니었다면 나올 수 없는 스코어였다.

더 큰 문제는 상대가 지칠 대로 지친 세인트루이스 불펜이라는 것, 지난 2~ 3차전에서 세인트루이스는 4명의 선수가 170개를 던졌다.

핵심 계투진이 평균 40구를 넘는 공을 던진 것,

선발보다 불펜을 선호하는 필립 험버 감독의 성향을 고려하더라도 이건 납득이 안 되는 불펜 기용이다.

하지만 저쪽은 이기기라도 했지, 휴스턴은 모든 걸 쏟아 붓고도 3연패를 당한 입장, 오늘은 5회까지 0대 0 팽팽한 승부가 이어졌지만 다음 이닝은 장담 못 했다.

“자, 6회 초 세인트루이스의 공격, 휴스턴은 토마스 그린 선수를 마운드에 올립니다. 올 시즌 34게임 등판 4승 1패 평균자책점 4.35, 41과 1/3이닝 동안 볼넷 14개, 탈삼진은 39개를 기록했습니다.”

“참, 이 선수도 대단합니다. 올해가 26년 차 시즌이거든요. 무려 14팀을 옮겨 다녔지만 이렇게 또 월드시리즈 무대에 올랐다는 게 대단하네요.”

토마스는 올해 48세에 접어든 노장, 데뷔 년도가 2008년이다.

세인트루이스의 초신성으로 떠오른 잭 브라이언트의 출생 년도가 2013년, 초신성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마운드에 올라 공을 던졌다는 뜻이다.

말 그대로 아빠와 아들의 대결, 선두타자 브라이언트는 투수를 향해 방망이를 겨누는 도발적인 자세를 잡았다.

“몸 쪽, 깊었다는 판정입니다.”

“브라이언트 선수의 스윙은 팔을 뻗어주면서 직선으로 나오거든요. 스윙 거리가 굉장히 길기 때문에 어정쩡한 바깥쪽 공은 위험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토마스 선수의 구위로는 브라이언트 선수를 찍어 누를 순 없거든요. 몸 쪽을 던지더라도 신중한 제구가 필요합니다.”

[따아악~!!]

“자!! 말씀 드리는 사이!! 이 타구는!! 우측으로 멀리!! 높게~!! 밤 하늘을 장식하는 잭 브라이언트의 솔로 홈런입니다!! 길었던 무득점의 터널을 빠져나오는 세인트루이스!! 2구를 강타했습니다!!”

“지금은 93마일, 약간 몸 쪽으로 붙었거든요. 나쁜 공은 아니었는데 … 브라이언트 선수가 워낙 잘 쳤어요.”

뒤돌아 선 토마스 그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난 뭘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는가. 남들이라면 벌써 은퇴하고 지도자나 해설위원으로 돌아섰을 나이, 그래도 나는 아직 쇄하지 않았다는 열정과 집념으로 여기까지 버텨왔다.

얼마 전엔 투수 역사상 처음으로 1300경기 출장을 달성했을 정도, 전 세계 어느 투수보다 많은 게임을 거친 투수가 됐다.

하지만 이제는 젊은 선수들의 파워를 이겨낼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할 나이,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언제 끝나도 이상하지 않은 커리어,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전력을 다했다. 다음 타자는 테드 반디, 어정쩡한 구속으로 몰아세울 선수가 아니라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다.

“바깥쪽, 잡아줍니다.”

“생각해보면 조금 아쉬운 투수 교체네요. 이미 홈런이 나왔는데 이런 말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만 반디 선수의 스윙은 브라이언트 선수와 정반대입니다. 복서로 치면 인파이터 스타일이거든요. 자기 존으로 들어오는 공에 강력한 한 방을 날리기 때문에 바깥쪽만 제구만 되도 어느 정도 상대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굳이 이 타이밍에 토마스 선수를 올려야 했을까요?”

박한우 위원은 휴스턴의 아쉬운 투수 교체를 지적했다.

투수 교체에는 이유와 타이밍이라는 게 있는 법, 토마스를 올리더라도 일단 브라이언트는 다른 선수가 처리하게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렇게 하면 투수 소모가 많아지지 않겠냐고 되물을 사람도 있겠지만, 어쨌든 결과는 홈런, 토마스는 주어진 상황에서 자기 공을 던졌다.

딱~

배트 끝에 걸리면서 투수 정면, 토마스는 직접 잡은 공을 1루에 넘겼다.

홈런을 허용했지만 어려운 고비를 하나 넘긴 백전노장, 휴스턴 팬들은 아쉬움보다 환호를 택했다.

다음 타자는 이인영, 브라이언트와 마찬가지로 바깥쪽 공도 잡아당길 수 있는 상대라 상성은 좋지 않았다.

급하게 마운드로 향하는 휴스턴의 감독, 토마스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다.

최다 출장 투수라는 업적을 세웠지만 현실은 잔혹, 이렇게 교체된 적이 몇 번인가. 1~ 2이닝을 위해 불펜에서 쉴 새 없는 공을 던지며 몸을 푸는 불펜, 제 역할이라도 하고 내려가면 괜찮은데 어정쩡한 타이밍에 교체되면 타다 만 찌꺼기가 가슴에 남은 기분이다.

내가 26년 동안 버텨온 건 그런 과정이 반복되며 남은 미련과 아쉬움 때문 아니었을까.

이게 내 선수생활 마지막이 된다면 서운한 일, 감독에게 한 타자만 더 상대하고 싶다는 뜻을 표했다.

“미안하지만 자네로는 힘들 것 같아.”

“그럼 처음부터 올리지 말지 그랬어요?”

토마스는 약간 감정적인 반응을 쏟아냈다.

내가 아니라도 대체할 투수는 있고, 내 역할이 여기까지라는 것도 이해하고 있지만 오늘 따라 인정할 수 없는 강판, 화는 잠시 뿐이었다.

교체를 인정하고 내려오는 발걸음, 사방에서 박수가 쏟아졌지만 토마스는 고개를 들거나 캡을 벗어 감사를 표하지는 않았다.

더그아웃에 앉아 경기를 지켜 볼 뿐, 에릭 한센이 마운드에 올랐다.

‘몸쪽은 위험해’

휴스턴 배터리는 신중히 사인을 주고받았다.

이인영은 바깥쪽을 노리는 자세에서도 몸 쪽 스윙 전환이 가능한 선수로 정평이 나 있다.

바깥쪽 공 – 몸 쪽 공을 치는 과정은 의외로 비슷하다.

바깥쪽 공은 몸 쪽 공에 비해 구종을 알아보기 쉽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타자가 공을 끝까지 보고 치는 것 뿐, 다만 안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스윙 각도가 한정적이라 그만큼 공을 잘 골라내야 한다.

반면 몸 쪽 공은 끝까지 보고 칠 여유는 없지만 안타가 나올 스윙 각도는 바깥쪽 공에 비해 넓다.

투수가 던지는 공의 70%가 왜 바깥쪽과 가운데로 밀집되는지 이유 중 하나,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투수는 타격을 허용해 좋을 게 없다.

가끔 허점을 찌르는 정도로 그쳐야지 노골적으로 던졌다간 대재앙으로 이어지는 몸 쪽 승부, 토마스도 몸 쪽을 던졌다가 브라이언트에게 제대로 당하지 않았나.

휴스턴 배터리는 모험을 피했고, 덕분에 이인영은 차분하게 초구를 골라냈다.

바깥쪽은 치기 쉽지 않은 코스지만 안타가 나올 각만 잡으면 결과가 쏟아져 나오는 금맥, 16년 동안 스트라이크 존을 캐낸 베테랑 광부는 허리힘을 주고 스윙을 돌렸다.

[따악~!!]

“밀어 냈고!! 좌익수 옆에 떨어집니다!! 이인영 선수는 오늘도 멀티 히트!! 이번 월드시리즈에서 전경기 멀티 히트를 적립합니다.”

“안타가 나올 구멍이 어딘지 알고 있어요. 그걸 딱!! 파내니까 안타가 나오는 거고요.”

“하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스트라이크 존에 안타가 숨겨져 있다는 겁니까?”

“저 농담하는 거 아닙니다. 이인영 선수한테 물어보세요.”

한국 중계진이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후속 타자 마이크 호스가 좌중간을 가르는 장타를 날렸다.

바깥쪽으로 던진다는 게 가운데로 몰리면서 일어난 참사, 외야진이 우왕좌왕 하는 사이 이인영은 2루를 지나 3루, 홈을 향해 내달렸다.

이제 스코어는 2대 0, 승기를 잡은 세인트루이스는 우승 무드에 물들었지만 휴스턴 진영엔 패배의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스윙!! 따라 나옵니다!! 삼진!! 오늘 마이크 요크 선수는 삼진만 3개를 당합니다.

“지금도 바깥쪽인데, 무릎이 완전 주저 앉았잖아요. 스트라이크 존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잃었네요.”

경기는 어느덧 8회 말, 시원하게 세 번 돌린 마이크 요크는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8월 31일까지 비율 스탯 0.327/ 0.401/ 0.602를 기록했지만 9월 OPS가 0.765로 추락하면서 비율 스탯은 0.303/ 0.380/ 0.565로 떨어졌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추락,

그래도 휴스턴 팬들은 포스트시즌 되면 좋아지겠거니 하며 마이크 요크에게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 존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대타자는 한순간에 미운 오리로 전락했다.

단언컨대 야구 인생 역사상 가장 잔인한 9~ 10월, 다음 타자 조엘 바이어의 타격도 다르지 않았다.

맥 한 번 못 써보고 물러나는 중심 타선, 휴스턴 팬들은 마음속으로 이별의 인사를 준비했다. 도저히 답이 안 보이는 타선, 그래도 여기까지 최선을 다해준 선수들에게 비난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경기는 9회 말, 세인트루이스는 마무리 폴 버그만을 마운드에 올렸다.

버그만은 구속보다 구위로 타자를 압도하는 스타일, 공에 걸리는 회전이 워낙 강해 92마일 공도 타자 눈엔 실제 구속보다 더 빠르게 보인다.

자신의 특성을 이용해 체인지업을 결정구로 앞세우는 것도 특징, 초구부터 스트라이크 존에 밀어 넣는 공격적인 투구를 선보였다.

“2구도 스윙입니다!!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지금도 91마일인데 존에 들어 왔거든요. 이게 파워피처가 아니면 뭡니까?”

빠른 볼과 슬라이더를 무기로 삼는 일반적인 마무리 투수를 상대하다 이런 변종을 상대하려니 타자 입장에선 죽을 맛,

샌더스는 나름대로 저항해 봤지만 떨어지는 체인지업에 낚이고 말았다.

이제 시즌 종료까지 남은 아웃카운트는 2개 뿐, 버그만은 다음 타자도 투수 앞 땅볼로 가볍게 처리했다.

더그아웃의 세인트루이스 선수단은 당장 그라운드로 뛰쳐나갈 기세, 물론 이인영처럼 그라운드에 남은 선수들은 캡을 고쳐쓰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땅볼!! 잡아서!! 1루로 송구합니다!! 경기 종료!! 팬 여러분들이 20년 넘게 기다려온 그 말을 드디어 할 수 있게 됐군요!! 세인트루이스가 우승했습니다!! 우승입니다!!!!”

뒤집어진 세인트루이스 중계석, 홈 구장에서 대형화면으로 경기를 지켜보던 4만 4천 관중이 일시에 함성을 내질렀다.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려온 팬들, 그건 선수들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승자들이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동안, 휴스턴 선수단은 하나 둘 클럽하우스로 물러났다.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에 말을 잇지 못하는 감독, 결국 제대로 된 인터뷰는 이뤄지지 않았고, 50을 앞둔 토마스 그린이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당신의 26번 째 시즌이 이렇게 끝나는군요.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 … 글쎄요. 아마 이 중 몇 몇 분은 제가 다음 시즌에도 선수생활을 이어갈지에 대한 질문을 하고 싶을 겁니다.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저는 아직 은퇴할 생각이 없습니다. 시즌이 끝났을 뿐, 제 야구 인생이 끝난 건 아니까요. 내년에도 다시 도전할 겁니다.”

역전 홈런을 내준 자책감보다 내년에 대한 도전 의지를 불태운 노장,

남들은 이런 나를 추하다고 욕할지도 모르겠지만 받아주는 팀이 있는 한 내 야구인생은 계속될 거라는 각오를 굽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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