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이 날이 영원히 계속되도록 (5)
[세인트루이스 홈에서 2연승]
[통산 12번 째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앞으로 2승]
10월 21일, 세인트루이스 일대는 환희에 휩싸였다.
NLCS에서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너무 쉽게 풀리고 있는 월드시리즈, 상대는 아메리칸 리그 최강 팀으로 평가 받는 휴스턴이지만 공수 양면에서 상대가 되질 않았다.
1차전은 11대 4 승리, 2차전은 7대 1 승리, 특히 2차전은 9회 초 막판에 터진 조엘 바이러의 솔로 홈런이 아니었다면 팀 퍼펙트를 당할 뻔 했다.
20년 넘게 우승을 기다려온 세인트루이스 팬들에게 이번 시리즈는 최고의 희열과 슬픔을 동시에 안겨줬다.
“팬 여러분들은 즐겁겠지만 저는 즐겁지 않습니다.”
“왜죠?”
“우승이라는 말이 오간다는 건 시즌이 끝나간다는 뜻이니까요. 이 도시에서 야구를 빼면 남는 게 뭐가 있습니까?”
2차전이 끝난 후, 이인영은 축제 분위기에 제대로 찬물을 끼얹었다.
이날 이인영은 2타점을 올리며 단일 포스트 시즌 21타점 째를 기록했다. 메이저리그 역대 공동 1위에 올라선 기념비적인 경기,
기자들은 대기록의 주인공이 된 소감에 대해 물었지만 이인영은 야구 시즌이 끝나 간다는 것에 한탄을 쏟아냈다.
“그래도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시 마세요. 시즌 끝나고 5개월 기다리면 되니까요. 그 때 다시 야구장 오시면 됩니다.”
병 주고 약 줬다가 다시 무덤을 파는 능욕, 세인트루이스 팬들은 복잡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대로 2연승을 하고 세인트루이스가 월드시리즈 트로피를 들어올리면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있을까.
적어도 그 때 뿐, 시즌이 끝나면 또 5개월을 기다려야 한다.
이 특색 없고 재미없는 도시에서 야구를 빼면 무슨 재미가 있나. 유달리 재미있었던 이번 시즌, 일부 팬들은 시리즈가 조금 길어져도 괜찮겠다는 부렸다.
[4승 전승은 재미 없지, 최소 4승 2패 정도는 가야 하지 않겠어?]
-> 나도 동감, 12번 째 우승 트로피는 홈에서 들어올려야지
-> 적당히 하고 홈에서 우승하자. 시즌은 계속 되어야 한다.
다들 시리즈가 이대로 끝나는 걸 아쉬워하는 분위기,
하지만 우승에 목이 마른 세인트루이스 진영은 3차전 승리를 위해 모든 것 쏟아부었다.
3차전 선발은 NLDS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라몬 린시, 기량이 문제가 아니라 40이 다 된 노장의 체력으로 너무 긴 일정을 소화한 게 원인으로 지목됐다.
그래서 NLCS에서는 불펜으로 3이닝만 소화, 월드시리즈 들어서도 등판은 없었다. 쉴만큼 쉬었고 본인도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월드시리즈 출전을 강력히 희망, 이렇게 출장이 결정됐다.
따악~!!
1회 초 세인트루이스의 공격, 선두타자 잭 브라이언트가 휴스턴의 선발 아담 화이트의 초구를 두들겼다.
좌중간을 깨끗이 가르는 타구, 여기에 후속 타자 테드 반디가 몸에 맞는 볼로 나가면서 이인영은 타점을 올릴 기회를 잡았다.
“자, 이인영 선수가 오늘 경기 첫 타석을 맞이합니다. 이번 포스트시즌에서 타율 0.353, 홈런 3개, 21타점!! 메이저리그 역사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1타점만 추가하면 단일 포스트시즌 최다 타점이죠. 무리할 것 없습니다. 짧은 안타 하나면 충분하죠.”
본인은 별 신경 안 쓰는데 주위에서 불을 피우는 타점 신드롬, 별 생각없이 초구부터 잡아당겼다.
‘땡이네~ ’
빗겨 맞으면서 우측으로 날아가는 타구, 상황은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그저 아웃 카운트 하나가 늘었을 뿐, 결과를 확인한 이인영은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기록을 너무 의식한 거 아냐?”
마침 날아드는 클라우드 에반스의 놀림, 농담 좀 한 건데 죽자고 달려들면 분위기만 어색해 질 것 아닌가.
예전의 나라면 한 마디 덧붙였겠지만 여유가 생긴 이인영은 별 다른 반응 없이 돌아섰다.
따아악~!!
“오~!! 이러면 안 되는데~!!”
“팬들이 실망할 거라고!!”
그 사이, 4번 타자 마이크 호스는 2구를 잡아당겨 좌중간을 넘어가는 대형 쓰리 런을 날렸다.
존재감이 없는 것 같은데 잊을 만하면 한 건 씩 터뜨리는 선수, 시리즈가 은근 길어지길 바라는 팬들은 이 홈런을 두고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세인트루이스 선수단은 마음에도 없는 엄살을 부리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세인트루이스는 2회 – 3회 초 공격에서 한 점을 더 추가하며 5대 0으로 앞서나갔지만, 휴스턴의 뒤늦은 반격이 시작됐다.
[따악~!!]
“3루 정면!! 아!! 이걸 놓치나요?!! 마이크 호스 선수가 공을 놓치면서 무사 주자 1루가 됩니다.”
“지금은 3루수 실책으로 기록되겠죠? 역시 그렇네요.”
실책으로 시작되는 이닝, 그래도 5대 0으로 앞서고 있지 않나.
라몬 린시는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고 마이크 호스도 미안한 기색없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것들이 군기가 빠져 가지고 … ’
이인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앞서고 있다고 너무 가드를 너무 내린 것 아닌가.
NLDS에선 어떤 위기에 몰려도 좀비처럼 일어나 달려들던 동료들, 연승행진이 오히려 독이 된 걸까.
세인트루이스 내야진은 실책을 연발하며 위기를 자초,
3회까지 완벽한 투구를 보여준 라몬 린시는 수비진 붕괴에 당황했지만 그래도 5회까지 실점을 3점으로 최소화 했다.
[따악~!!]
“아~ 이 타구가 다시 내야를 빠져 나가는 군요!! 2루 주자는 홈으로!! 1루 주자는 2루를 지나 3루까지 들어 갑니다!! 조엘 바이러의 적시타!! 휴스턴이 5대 4로 따라붙습니다!!”
“글쎄요. 지금도 브라이언트 선수가 처리를 너무 미숙하게 했어요. 1루 주자를 3루까지 보내면 안 됐거든요.”
박한우 위원은 우익수 브라이언트의 미적지근한 수비를 질책했다.
NLDS에서는 성급한 전진스텝으로 역전 주자를 허용하더니 이번엔 너무 느긋한 수비, 이 선수에겐 중간이라는 게 없는 건가.
공격은 나무랄 게 없는데 수비는 엉망진창, 세인트루이스의 필립 험버 감독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결국 희생타가 나오면서 경기는 5대 5 동점, 방금 전까지 화기애애 했던 더그아웃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실책은 공격으로 만회하면 돼’
6회 초 세인트루이스의 반격, 선두 타자로 나선 브라이언트는 헬멧을 고쳐쓰며 자세를 잡았다.
실책을 한 건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기가 죽으면 팀에 무슨 도움이 되겠나. 마이너리그 시절부터 수비는 욕을 먹었고 믿을 건 방망이, 초구부터 강하게 잡아당겼다.
따악~!!
우측 라인 선상을 타고 흐르는 타구, 장타를 직감한 브라이언트는 빠른 발을 뽐내며 2루를 단숨에 통과했다.
내친 김에 3루까지 가는 질주, 코치가 말렸지만 애송이는 기어이 3루를 훔쳐냈다. 팬들에게 병 줬다 약 줬다 하는 건 저 녀석도 마찬가지, 이인영은 피식 웃으며 타석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따악~!!]
“2루수 옆을 빠져 나가는 안타!! 브라이언트 선수가 홈을 밟으면서 세인트루이스가 다시 6대 5로 앞서나갑니다!! 테드 반디의 적시타!! 오늘 경기 멀티 히트를 적립합니다!!”
“아~ 이렇게 되면 이인영 선수가 타점을 올릴 방법은 장타 뿐인데요. 신기록까지 앞으로 하나 남았는데 말이죠.”
“장타 치면 되는 거죠. 누가 들으면 이인영 선수가 장타 못 치는 줄 오해하겠습니다.”
눈치 없이 3루 주자를 먹어치운 테드 반디, 하지만 이인영은 별 다른 표정 없이 3번 째 타석을 맞이했다.
앞 선 두 타석은 모두 범타, 그래도 만만히 볼 선수가 아니라 휴스턴 벤치는 바쁘게 움직였다.
여기서 걸러도 다음 타자는 미스터 쓰리 런 마이크 호스, 올 시즌 세인트루이스를 상대한 팀은 위기 상황에서 이인영을 거르고 마이크 호스를 상대하다 쓰리 런을 맞는 경우가 많았다.
올 시즌 마이크 호스가 기록한 홈런은 32개, 그 중 7개가 쓰리 런이다.
이번 포스트 시즌에서도 쓰리 런 2개, 도망칠 길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휴스턴은 여기서 투수를 교체, 원 포인트 릴리프 마이클 키카가 마운드에 올랐다.
“자 마이클 키카 선수가 마운드에 오릅니다. 올 시즌 40경기 등판, 승리 없이 2패, 평균자책점 3.37, 29와 1/3이닝 동안 볼넷 11개, 탈삼진은 27개를 기록했습니다.”
“기록만으로는 이 선수를 평가해선 안 됩니다. 원 포인트 릴리프라는 점을 고려해야죠.”
좌타자는 좌완에게 약한 걸로 알려져 있지만 마냥 그렇지도 않다.
일례로 좌완이지만 슬라이더 구위가 떨어지면 어떨까.
좌투수가 좌타자에게 슬라이더를 못 던진다는 건 총알 없이 곰을 잡겠다고 설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실제로 올 시즌 이인영은 좌완 투수의 빠른 볼 – 체인지업을 받아쳐 타율 0.379를 기록했다.
좌타자지만 좌완 상대로 저승사자 같은 면모를 과시한 것, 반면 슬라이더 상대 타율은 0.261로 약간 저조했다.
그래도 투수가 가벼운 마음으로 사냥을 나서기엔 너무 위험한 상대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실제로 원 포인트 릴리프가 상대하는 타자는 거의 다 강타자들이다.
쎈 놈들만 상대하다 보니 피안타율이나 평균자책점이 다른 불펜보다 높을 수 있다는 것, 박한우 위원은 마이클 키카의 능력을 높게 평가했고 현지 분위기도 다르지 않았다.
‘좀 멀어 보이네.’
초구를 지켜본 이인영은 앞 발을 더 열어 뒀다.
낮은 팔각도에서 날아오는 공, 좌타자 입장에선 갑자기 공이 나타나는 기분이다.
앞발을 열어두면 바깥쪽 공을 공략하기 어렵지만 자세가 편해야 공이 보이는 법, 공을 보겠다는 자세로 공략에 나섰다.
“바깥쪽, 들어왔다는 판정입니다. 카운트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키카 선수의 통산 좌타자 상대 성적이 0.204/0.285/0.288입니다. 참고로 올 시즌 매트 하비의 좌타 상대 성적이 0.219/0.281/0.299거든요. 좌타 상대 성적 만큼은 메이저리그 정상급이라는 겁니다.”
매트 하비는 올 시즌 20승 9패 평균자책점 2.86을 기록한 토론토의 에이스,
매트 하비는 평균 96마일 빠른 볼과 슬라이더를 앞세우는 투수지만 마이클 키카의 평균 구속은 90마일 내외다.
구속은 하늘과 땅 차이지만 좌타 상대 결과는 비슷, 여기서 어떤 결과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슬라이더를 던지긴 해야 되는데’
3구를 쥔 마이클 키카가 발을 빼면서 암묵적 휴전이 선언됐다.
100번 양보해도 슬라이더는 카운트를 잡는데 적합한 구종은 아니다.
어정쩡하게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갔다간 장타, 지금은 바깥쪽 먼 곳으로 타자의 주위를 끌면서 헛스윙과 파울을 유도하는 게 정석이다.
문제는 상대가 너무 쎈 놈이라는 것, 함정에 먹이를 던져줘도 콧김 한 번 안 뿜는다.
이 총알이 빗나가면 나는 곰에게 물려 죽겠지, 통산 11년을 버텨온 베테랑에게도 쉽지 않은 승부였다.
‘들어오기만 해봐라.’
마침 곰도 슬라이더를 노리고 있는 상황, 포수와 사인을 주고 받은 마이클 키카는 겨우 와인드 업 자세를 잡았다.
[따아악~!!]
“잡아 당겼고!! 낮고 빠르게!! 이 타구는!! 담장을 넘어~ 갑니다!!!! 이인영 선수의 투 런 홈런!! 세인트루이스가 8대 5로 달아납니다!! 이인영 선수는 이번 포스트 시즌에서 23타점 째!! 단일 포스트 시즌 최다 타점 기록을 갈아치웁니다!!”
“지금은 슬라이던데 가운데로 들어갔어요. 정말 무참한 현장입니다. 뼈 하나 남기지 않고 씹어 먹었어요.”
말 그대로 투수를 씹어먹은 한 방, 저 괴물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 건가.
휴스턴 진영은 절망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