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이 날이 영원히 계속되도록 (4)
LA의 투수교체, 마운드를 넘겨받은 로버트 코일은 포수 사인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인영을 거르고 마이크 호스를 상대할 것인가.
문제는 제구, 코일은 지난 2030년에 데뷔했고 겨우 43이닝을 던졌지만 평균자책점 1.56을 기록하며 LA의 주축 불펜으로 떠올랐다.
이듬 해 44세이브를 기록하며 정상급 클로저로 성장, 올 시즌도 34세이브를 거뒀지만 블론세이브만 7개, 특히 9이닝 당 4개가 넘는 볼넷에 발목을 잡혔다.
구속이 빨라 헛스윙을 이끌어 내는 것과 제구가 되지 않아 볼넷을 주고 홈런을 맞는 건 따로 논해야 할 일,
어느 투수가 빠른 볼을 던져 삼진을 잡아냈다면 그 공은 위력적인 것인가? 마무리 투수가 9이닝 당 볼넷이 4개나 된다는 건 그 자체로 팀원들에게 불안감을 준다는 뜻이다.
실제로 올 시즌 7번이나 방화를 저지른 코일, 포스트 시즌에서도 3세이브를 기록하고 있지만 불안한 제구는 여전하다.
‘어지간하면 올리고 싶진 않았는데… ’
LA의 감독 케빈 하우스는 불안한 시선을 애써 감췄다.
선발투수가 예상보다 빨리 내려가고 불펜 소모가 많아지면서 로버트 코일을 올릴 수밖에 없는 입장,
일단 볼 배합을 주도하며 상황을 살폈다.
“초구는 몸쪽이군요. 일단 지켜봅니다.”
“빠른 볼이 커터성을 띄면서 몸쪽으로 파고들거든요. 95마일이 찍히긴 했는데 체감 구속은 더 빠를 겁니다.”
이인영은 2구로 들어온 슬라이더도 지켜봤다.
로버트 코일의 주무기는 커터와 슬라이더, 옆으로 꺾이는 공이라 움직임은 거의 비슷하다.
실제로 커터 횡 무브먼트는 8.1, 슬라이더의 횡 무브먼트도 8.21로 이 정도면 큰 차이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문제는 스핀 앵글, 커터의 스핀 앵글은 회전각도가 80도 - 슬라이더는 40도 정도로 알려져 있다.
당연히 떨어지는 각도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 편, 낮은 팔 각도 때문에 공을 잘 숨긴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직접 보면 차이가 꽤 있는 편이다.
‘이 정도면 다른 선수들도 골라내겠는데?’
공 2개를 지켜본 이인영은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이 정도면 선구안이 아주 안 좋은 선수가 아니고서야 어느 정도 커버가 되겠지, 상대가 승부를 피한다면 굳이 쫒아가서 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3구는 떨어집니다!! 볼 카운트는 쓰리 볼 노 스트라이크가 되는 군요!!”
“지금은 미동도 안 하거든요. 그냥 하나 지켜볼 생각이었던가요?”
스트라이크 존을 스쳐 지나가는 슬라이더, 이걸 그냥 지켜본다?
LA의 케빈 하우스 감독은 첫 단추를 잘못 꿴 볼 배합을 한탄했다.
볼 카운트가 유리하니 타자는 당연히 하나 지켜볼 생각이었겠지, 저 정도 공에 반응을 안 한다는 게 말이 되나.
카운트가 유리했다면 끌려나왔을 공, 결국 내가 선수를 믿지 못해 소심한 볼 배합을 지시하다 이런 결과가 나온 것 아닌가.
아쉬운 입맛을 다셨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일단 하나 넣어 보자.’
이 와중에 로버트 코일은 직접 사인을 냈다.
투 볼에서 하나 지켜본 타자가 쓰리 볼에 타격을 하겠나. 포수는 동의했고 주사위가 던져졌다.
[따악~!!]
“He hits in the air to rignt!! We'll see!! you!! tomorrow night!!!! With calls of "The man" echoing around this Park!!, All the fans welcome the hero!!!!”
= 그가 우측으로 멀리 쳐내는군요!!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경기장에 ‘그 분’이라는 환호가 메아리치는 가운데!! 모든 팬들이 영웅을 맞이합니다!!
타격이 되는 순간 세인트루이스 현지 중계석은 일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5회 말 동점 쓰리 런에 이은 9회 말 끝내기 홈런, 뭐 이런 동화 속의 히어로가 다 있나.
자리에서 일어난 팬들은 세인트루이스 구단 로고가 박힌 깃발을 흔들며 난동을 부리는 사이, 더그아웃에서 튀어나온 선수단은 홈 플레이트를 점거했다.
반가운 마음에 한 대라도 더 쳐줘야 할 영웅은 이제 눈 앞, 이인영은 그 광란의 현장에 몸을 던졌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끝내기, 설마 쓰리 볼에서 타격을 할 줄이야.
승부를 택했다가 비극의 주인공이 된 로버트 코일은 고개를 숙인 채 무대에서 퇴장했다.
1패 이상의 충격을 안겨준 경기, 케빈 하우스 감독은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했고 중계 카메라는 넋이 나간 LA 선수단의 얼굴을 하나하나 비췄다.
필라델피아 시절에도 LA의 가슴에 비수를 몇 번이나 꽂은 이인영, 그 악몽이 여기서 재현될 줄이야. 현지에 나간 LA 중계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었다.
어지간한 시위 현장은 명함도 못 내밀 광란의 현장, 시위와 다른 게 있다면 팬들이 경찰이 지정한 라인을 넘지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The man!! man!! man!! man!!”
이어지는 현장 인터뷰, 그 분이라는 칭호가 쏟아지는 그라운드에서 이인영은 리포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너무 시끄러워서 마이크가 묻힐 정도, 리포터 쪽에 귀를 더 가까이 대고 나서야 귀가 트였다.
“당신은 오늘 팀을 2번이나 위기에서 구했습니다!! 아니, 세인트루이스를 구했다고 해야 할까요?!! 세인트루이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활약이었습니다!!”
“글쎄요. 아직 이곳에서 벌어질 경기가 많기 때문에, 가장 위대한 활약이었다는 말엔 동의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이겼으면 내일 이기고 계속 이겨서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가야 할 것 아닌가.
오늘이 끝이 아니라는 답에 주변 분위기는 더욱 떠들썩해졌다.
“쓰리 볼에서 타격을 했는데 처음부터 그 공을 노리고 있었던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볼을 몇 개 봤는데 이 정도면 제가 볼넷으로 나가도 후속 타자들이 충분히 쳐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리한 타격은 하지 않으려고 했죠. 그런데 마침 기회가 왔을 뿐입니다.”
인터뷰에 귀를 기울이던 세인트루이스 현지 중계진은 혀를 내둘렀다.
볼 카운트가 유리해서 그냥 지켜본 게 아니라, 스트라이크 존을 스쳐 지나가는 슬라이더를 볼로 인지했다는 뜻 아닌가.
역시 그 분의 눈은 우리와는 다르다는 찬사를 쏟아냈다.
오늘 2홈런 5타점 활약으로 이인영은 이번 포스트 시즌에서 16타점을 기록, 세인트루이스 역사 상 단일 포스트 시즌 기준으로 가장 많은 타점을 올린 선수가 됐다.
놀라운 건 아직 시리즈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 지금까지 써낸 커리어도 대단하지만 앞으로 이 선수는 어떤 역사를 써내려 갈 것인가.
팬들의 관심은 이어지는 7차전으로 기울었다.
세인트루이스는 아껴뒀던 선발 이충재를 투입, LA는 백전 노장 킨사이드를 선발로 내세웠다.
킨사이드는 지난 15년 동안 LA의 중심을 지켜 준 에이스, 나이가 들면서 구위 하락이라는 위기를 맞이했지만 이런 저런 변화구를 개량해 지금도 선발진의 한 축을 책임져 주고 있다.
그 킨사이드에게 몇 번이나 굴욕을 안겨 준 이인영, 그동안 맺힌 게 많은 킨사이드는 이를 막물었다.
‘내가 여기서도 지면 옷 벗는다.’
통산 피홈런만 9개를 내준 천적, 이인영이 아메리칸 리그로 트레이드 된 이후에는 이게 첫 맞대결이다.
정규시즌에서 한 번쯤 만날 법도 했는데 질긴 인연이 하필이면 여기서 다시 맺어지다니, 이것도 운명 아니겠나.
20대 젊은 시절에 만났지만 지금은 30대 중 후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노장의 대결, 킨사이드는 갈색빛이 도는 수염을 휘날렸다.
반면 수염을 안 기르는 이인영은 오늘도 매끈한 얼굴, 잘 늙지 않는 동양인 특유의 외모와 붉은 유니폼의 조화는 으스스한 연출로 이어졌다.
나는 구위 하락 때문에 온갖 변화를 시도했는데 저 선수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는 느낌, 킨사이드는 여전히 건재한 천적을 두고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따악~!!]
“밀었고!! 내야를 빠져 나갑니다!! 라인 선상을 타고 흐르는 타구!! 2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면서 세인트루이스가 선취점을 올립니다!! 이인영 선수는 이번 포스트 시즌에서 17타점 째!! 역대 3위 기록으로 올라갑니다!!”
“이번 포스트 시즌은 유독 타점이 많네요. 타율은 0.357, 예전 포스트 시즌에 비하면 높진 않은데, 모아놓고 터뜨린 게 워낙 많습니다.”
7차전은 세인트루이스의 선취점으로 막을 올렸다.
오늘도 식지 않는 그분의 방망이,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1회, 2점을 획득한 세인트루이스는 2회 말 공격에서 1안타와 2볼넷을 적립, 다음 타자 잭 브라이언트가 킨사이드의 초구를 강타해 우월 만루 홈런을 날려버렸다.
순식간에 스코어는 6대 0, LA 진영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오늘도 포스트 시즌 악몽을 떨쳐내지 못한 킨사이드는 2회도 버티지 못하고 강판, LA는 3회 초 카이너의 적시타로 1점을 따라 붙었지만 세인트루이스는 4회 말 2점을 추가해 추격을 뿌리쳤다.
“그동안 즐거웠어!!”
“고마워!! 너희들은 최고의 상대였어!!”
7회 말, 홈 팬들은 LA 진영을 향해 야유 섞인 함성을 퍼부었다.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앞서나갈 때만해도 그렇게 건방을 떨더니, 지금 경기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나.
스코어는 10대 2, 여기에 이인영의 비수가 더해졌다.
[따악~!!]
“이번에도 좌측으로!! 좌익수가 잡아냈지만 3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옵니다!! 스코어 11대 2!! LA가 자랑하는 불펜진이 붕괴하고 있습니다!!”
“뭐 … 이제는 의미가 없네요. 양 팀이 시리즈 내내 정말 치열한 접전을 주고 받았는데 마지막 7차전이 이렇게 될 거라곤 … 물론 저도 세인트루이스가 승리하길 바랐지만 약간 맥이 빠집니다.”
너무 일방적으로 흘러가는 경기, 하지만 필립 험버 감독은 주전을 교체하지 않았다.
그런 여유는 이 경기를 버려도 좋다는 자만심에서 비롯되는 것, 오늘 지면 내일이 없다.
11대 2로 이기고 있더라도 방심 따윈 하지 않았다.
“허버트 준비됐나?”
“예”
“그럼 올려”
경기는 어느덧 8회 초, 험버 감독은 불펜을 활발히 가동했다.
선발 이충재가 6이닝을 2실점으로 버텨주면서 여유가 생긴 불펜, 세인트루이스 구단 직원들은 클럽하우스에 샴페인을 실어날랐고, 더그아웃의 선수단도 숨가쁘게 흘러가는 축제 분위기에 시동을 걸었다.
‘너무 오래 걸려’
어제 2실책을 저질러 죽을 놈이 됐다가, 오늘 결정적인 만루홈런을 날린 잭 브라이언트는 마운드를 꼼꼼히 다지는 허버트를 바라보며 손목을 툭툭 쳤다.
얼른 경기 끝내고 파티해야 되는데 왜 이렇게 시간을 끄는 건가.
한편으로는 이 날이 지나가는 것도 아쉬운 것도 사실, 야구를 하면서 이렇게 흥분되고 가슴 설렜던 적이 있었나.
이 분위기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손목을 툭툭 치는 항의는 그만 뒀다.
‘칠 테면 쳐라.’
마운드를 넘겨받은 허버트는 공격적인 투구를 펼쳤다.
지금부터는 아웃카운트를 늘리는 게 중요, 안타 2개를 맞으면서 실점을 내줬지만 당황하지 않고 후속 타자들을 처리했다.
험버 감독은 9회 초에도 허버트를 투입, 볼넷과 안타를 허용하며 2사 주자 1 – 2루 위기에 몰렸지만 허버트는 긴장한 기색 없이 투구를 이어갔다.
[따악~!!]
“2루수 정면!! 잡아서 1루에~!! 아웃입니다!!!! 시리즈 종료!! 세인트루이스가 2승 3패에서 2연승을 거두며 역대 26번 째 월드시리즈를 맞이합니다!! 이렇게 천적 관계는 유지 되는 군요!!”
“LA 팬들은 이제 빨간 색만 봐도 벌벌 떨 것 같네요. 이럴 수가 있습니까?”
포스트시즌에서 세인트루이스만 만나면 맥을 못 췄던 LA, 그 징크스는 올해도 깨지지 않았다.
그 저주를 깰 뻔 했던 LA에 가혹한 흑마술을 건 이인영은 동료들과 한덩이로 뭉쳐 기쁨을 만끽, 통산 4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위해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