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이 날이 영원히 계속되도록 (3)
“준비 다 됐나?”
“예”
경기가 동점이 되면서 세인트루이스 진영은 바쁘게 움직였다.
조금 더 버텨줬으면 했지만 클라우드 에반스의 투구는 여기까지, 데스몬드 맥카스킬이 6회 초 마운드를 넘겨받았다.
올 시즌 성적은 5승 7패, 평균자책점 4.21,
평균 94마일 정도의 빠른과 80마일 정도의 슬라이더를 앞세우는 정통 불펜 요원, 특히 빠른 볼과 슬라이더의 구속 차를 잘 활용해 삼진을 잡는 능력이 뛰어나다.
올 시즌도 54와 2/3이닝 동안 탈삼진 71개를 기록
문제는 높은 탈삼진율에 비해 볼넷이 너무 많고(24개), 12개나 허용한 피홈런이지만, 삼진을 워낙 잘 잡는 선수라 기대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스윙!! 헛칩니다.”
“정말 도깨비 같은 선수네요. 오늘은 다행히 슬라이더가 잘 들어가고 있습니다.”
빠른 공은 몸쪽으로 붙이고 슬라이더는 바깥쪽 보더 라인에 걸치는 궤적, 저게 정말 팀을 들었다 놨다 했던 그 맥카스킬인가.
세인트루이스 팬들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제대로만 던지면 된다.’
맥카스킬은 다음 공도 슬라이더를 던져 타자를 무릎 꿇게 만들었다.
요즘 시대에 불펜이 평균 구속 94마일? 이 정도면 명함도 못 내민다.
그래도 맥카스킬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건 슬라이더, 구속이나 휘는 각만 보면 슬라이더가 아니라 커브라고 봐도 믿을 정도다.
일반적인 슬라이더보다 2인치 정도 더 떨어지기 때문에 타자가 말려들면 하체 밸런스가 무너지는 건 다반사, 맥카스킬은 자신의 슬라이더 특성을 이용해 가운데 낮은 공으로 카운트를 잡기도 한다.
다만 슬라이더라는 몸쪽으로 들어오는 척 하면서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공, 스트라이크 존에 넣어 카운트를 잡기엔 부적절하다.
가운데로 들어가면 절대 안 되는 구종, 걸려들면 가는 거다.
맥카스킬이 54와 2/3이닝 동안 얻어맞은 피홈런 12개가 그 증거, 투수가 가끔 슬라이더로 카운트를 잡는 경우도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타자의 의표를 찔렀을 때 가능한 일이다.
거기다 맥카스킬은 슬라이더 비중이 높은 편, 지금도 2구와 3구를 모두 슬라이더로 택하지 않았나.
하지만 지금 타석에 선 랜스 카이너는 슬라이더에 약점이 있는 선수, 세인트루이스 배터리는 4구도 슬라이더를 택했다.
[딱~!]
“파울입니다. 카이너 선수가 거의 주저 앉네요.”
“워낙 떨어지는 각이 크거든요. 맥카스킬 선수가 괜히 많은 삼진을 잡은 게 아닙니다. 여기서 빠른 볼을 높게 던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임선우 위원의 말이 끝나는 순간, 슬라이더가 투수의 손을 떠났다.
슬라이더에 연거푸 밸런스를 잃은 카이너는 동상처럼 일시 정지, 바깥쪽을 찌르는 기막힌 백도어에 고개를 저었다.
슬라이더라는 걸 알고도 당할 수 밖에 없던 상황, 다음 타자 폴 밀러는 바깥쪽 빠른 볼에 헛스윙을 돌렸다.
투수에겐 아우라라는 게 있다.
한 번 등판하면 마운드 뿐만 아니라 관중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마성의 매력, 오늘 맥카스킬에겐 그 능력이 발동됐다.
“스윙!! 삼진입니다!! 폴 밀러까지 삼진으로 돌려세웁니다!!”
“지금도 슬라이더죠. 대놓고 던지는데 전혀 반응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슬라이더에 말려드는 타자들, LA의 타격 코치 코디 업튼은 슬라이더에 반응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와아아아~!!!!”
하지만 맥킬리스는 몸쪽 낮은 슬라이더로 하나 남은 아웃까지 삼진으로 장식,
홈팬들이 소리를 지르고 투수가 주먹을 불끈 쥐는 동안 6회 초 마지막 타자가 된 켄 자일스는 고개를 저으며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적어도 나는 안 넘어졌잖아?’
켄 자일스는 삼진을 나름대로 합리화시켰다.
다른 동료들은 슬라이더에 무릎을 꿇고 주저 앉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에 비해 꿋꿋하게 버티고 서서 삼진을 당했으니, 나름 잘 대응한 거 아닌가.
코치 말대로 슬라이더를 지켜봤고 주심이 손을 올렸을 뿐, 냉기가 흐르는 감독의 옆을 무심히 지나쳤다.
“한 이닝 더 갈 수 있겠나?”
“물론이죠.”
세인트루이스의 6회 말 공격은 득점없이 종료, 7회 초 다시 마운드에 오른 맥킬리스는 자신있게 스타트를 끊었다.
따악~!!
하지만 7회는 6회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우중간으로 날아가는 타구, 우익수 잭 브라이언트는 타구를 잘 따라갔지만 워닝 트랙 앞에서 공을 잡았다가 떨어트렸다.
“거기에 있잖아!!”
“발을 보라고!!”
손등에 맞고 발 근처에 떨어진 공을 먼 곳에 찾는 브라이언트, 팬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브라이언트는 겨우 타구를 회수했다.
하지만 이미 1루를 지나 2루로 달려가는 주자, 브라이언트의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따악~!!]
“다시 외야로 뻗어 나가는 타구!! 아~ 여기서 타구가 뒤로 빠져나갑니다!! 그 사이 2루 주자는 3루를 지나 홈으로!! 타자 주자는 2루를 지나 3루까지 들어갑니다!! 재 역전!! LA가 5대 4로 앞서나갑니다.”
“아~!! 이건 아니죠!! 욕심이 너무 앞 섰어요!!”
안타는 막기 어려웠던 상황, 그렇다면 타자 주자를 1루에서 묶는 것도 방법이었을 거다.
하지만 잭 브라이언트는 홈 송구가 가능하다고 판단, 달려 나오면서 바운드 된 타구를 처리하려 했다.
결과는 대재앙, 여기에 후속타자의 희생타까지 나오면서 스코어는 6대 4로 벌어졌다.
7회 초에 2점 차는 꽤 멀어 보이는 스코어, 뭣보다 시리즈 내내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했던 브라이언트의 연속 실책에 홈 팬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내일 야구 못 보는 거예요?”
“ … … ”
한 꼬마 팬의 혼잣말에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해주지 못했다.
그저 머리를 부여잡을 뿐, 동점 홈런이 나온 5회 말 까지만 해도 그렇게 행복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다들 어려워졌다는 걸 직감했지만 최악의 결과를 차마 입 밖에 내진 못했다.
“날 봐!! 날 보라고!!”
이인영은 양 손을 높게 들어 동료들의 시선을 끌었다.
LA를 상대로 불펜 싸움을 하기엔 빈약한 세인트루이스 진영, 승리를 위해선 굳건한 수비가 중요하다.
지금 그 수비가 무너진 상황, 여기서 패배를 인정할 건가 아니면 지금부터라도 상황을 수습할 건가.
선택은 동료들의 몫, 그제야 자책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브라이언트도 정신을 차렸다.
잭 브라이언트부터 시작되는 7회 말 공격, 공격력이라면 우리가 LA에 밀릴 게 없지 않나. 맥카스킬이 추가 실점 없이 나머지 타자들을 잡아내며 이닝 종료, 세인트루이스 선수단은 서둘러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나는 내일도 야구 보고 싶다고!!”
“알아 들었어?!! 시즌권 구입한 내 1년을 망치지 말란 말이야!!”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팬들의 아우성, 브라이언트는 타석에서 어느 때보다 집중력을 발휘했다.
내일도 야구를 하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 팬들이 아니라 날 위해서라도 이번 타석에 모든 걸 쏟아부었다.
“스쳤나요?!! 브라이언트 선수가 1루로 걸어나갑니다!!”
“제가 볼 땐 피할 생각도 없었어요. 말 그대로 몸으로 때웠습니다.”
브라이언트는 테드 반디 타석에서 나온 폭투를 놓치지 않고 2루까지 진루했다.
5회 말, 이인영에게 쓰리 런을 맞은 LA 입장에선 여기서 테드 반디를 거르는 것도 애매, LA 진영은 정면 돌파를 택했다.
따악~!!
“와아아아아~!!!!”
우측 라인 선상을 파고 드는 날카로운 타구,
1루 심의 인플레이 선언을 확인한 브라이언트는 홈을 향해 온 몸을 내던졌다.
우익수가 펜스 구석에서 타구와 숨바꼭질을 하는 사이 테드 반디는 2루를 지나 3루까지 진출, 다 죽어가던 홈팬들은 좀비처럼 되살아났다.
당장 승리를 내놓지 않으면 누구도 살아나갈 수 없는 분위기, 이인영이 타석에 들어서면서 광기는 극에 이르렀다.
“아~ 자리에서 일어나는데요?”
“이건 범죄죠. 여기서 고의사구가 웬 말입니까?”
포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방에서 야유와 폭언이 쏟아졌다.
이게 그 얌전했던 세인트루이스 팬들인가. 사방에 진을 친 경찰들은 진짜 좀비들을 상대하는 기분, 경찰들이 저지라인을 수호하는 동안 이인영은 보호대를 풀어내며 1루로 향했다.
최악의 경우 병살이 나오더라도 3루 주자의 활약에 따라 동점도 노려볼 수 있는 상황, 이 정도로 실망하기엔 일렀다.
다음 타자는 마이크 호스, NLDS에서 3대 0으로 끌려가던 팀에 동점 쓸리 런을 선물하지 않았나.
흥분을 가라앉힌 팬들은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기다렸다.
[따아악~!!]
“자!! 이 타구는 허공 속으로 멀리!! 머얼~ 리!! 중견수가 펜스 앞에서 … 잡아냅니다!!!! 그 사이 3루 주자는 홈으로!! 1루 주자는 2루까지 들어갑니다!! 다시 동점!!!! 세인트루이스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아쉽긴하지만 이인영 선수가 2루까지 들어갔거든요. 안타 하나면 다시 역전입니다.”
2루에 안착한 이인영은 박수를 치며 미쳐가는 분위기에 몸을 맡겼다.
수많은 경기를 치렀지만 이렇게 아찔한 경기는 정말 오랜만, 2루에서 멀어지며 역전주자가 될 기회를 노렸다.
이제 입이 마르는 쪽은 LA, 중계 카메라는 혀를 잠깐 내밀었다 입 속으로 집어넣는 하우스 감독을 비췄다.
그 사이 몇 년 늙은 얼굴, 보호 펜스 뒤에서 투수 교체를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일단 지켜봤다.
‘후우~ ’
다행히 다음 타자는 땅볼, 진루를 노렸던 이인영은 3루수의 견제에 발이 묶였다.
동점타는 되도 역전타는 안 나오는 경기, 이게 진정한 좀비 야구인가.
어쨌든 7회 말 공격은 동점으로 만족, 이후 양 팀은 불펜을 총 동원해 문단속에 나섰다. 지금부터 홈을 열어준다는 건 패배를 의미, 한계까지 몰린 세인트루이스는 이충재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이걸 써버리면 내일 경기는 누굴 선발로 내세울 건가. 필립 험버 감독은 마음 속에 칼을 꽂아가며 충동을 억눌렀다.
어느덧 경기는 9회 말 세인트루이스의 공격, 오늘 여럿 사람을 울고 웃긴 잭 브라이언트가 타석에 들어섰다.
“스윙!! 크게 헛칩니다.”
“힘이 잔뜩 들어간 게 보이네요.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은 이해 하지만 지금은 출루가 우선입니다.”
낮은 공을 퍼올린 브라이언트는 배트를 집어 던졌다.
동료들의 농담도 웃어 넘기는 성격이지만 지금은 누가 말을 걸면 죽빵을 날릴 분위기, 더그아웃의 선수들도 씩씩거리는 막내를 외면했다.
테드 반디 – 이인영 – 마이크 호스로 이어지는 살인 라인업은 건재, 앞 선 타석에서 날카로운 밀어치기를 보여준 테드 반디가 타석에 들어섰다.
낮은 공은 자살행위,
LA 배터리는 철저하게 높은 공으로 헛스윙을 유도했다.
‘내가 못 쳐도 대안이 있다.’
하지만 반디는 휘둘리지 않았다.
지난 포스트 시즌에선 내가 해줘야 이긴다는 중압감에 시달렸지만 지금은 대안이 있지 않나. 출루만 해도 LA가 느낄 중압감은 상상 이상, 볼 카운트를 유리하게 끌고 나갔다.
“우리는 내일도 야구 보고 싶어!!”
“보게 해 줘요!!”
반디가 볼넷으로 출루하면서 1사 주자 1루,
이인영은 팬들이 외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내일도 이런 경기를 하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 표정 없는 얼굴로 투수와 대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