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292화 (292/309)

292화. 이 날이 영원히 계속되도록 (2)

‘결국 다 커브네’

이어지는 테드 반디의 타석, 이인영은 상대의 투구를 유심히 지켜봤다.

빈센트 윌리엄은 커브가 2개라는 정보가 있는데, 자세히 보면 팔각도를 바꿔가며 던지는 것 뿐이다.

커브와 슬라이더를 던지는 원리는 비슷하다. 실밥을 잡고 손목을 비틀어 회전을 주는 것, 다만 윌리엄은 커브를 던질 때 팔을 좀 더 세워주는 것 뿐이다.

어떤 경우엔 사이드암 폼으로 커브를 던지기도 하는데 일반적인 커브보다 조금 더 빠르고 옆으로 휘어나가는 것 뿐, 굳이 슬라이더로 구분할 필요 없다.

하나로 통일 해도 좋을 정도, 윌리엄의 주무기는 체인지업 아닌가. 팔각도를 바꿔주는 눈 속임에 낚일 필요는 없었다.

테드 반디도 그 점을 눈치 채고 커브는 통과, 하지만 4구로 들어온 체인지업은 세관을 통과하지 못했다.

[따아악 ~ !!]

“자!! 걷어 올렸어요!! 이 타구는 계속!! 멀리!! 담장 너머로 사라집니다!! 테드 반디의 선제 솔로 홈런!! 세인트루이스가 선취점을 가져갑니다!!”

“제가 올 시즌 윌리엄 선수의 체인지업 피안타율이 0.176이라는 말씀을 드리려던 찰나에 이런 결과가 나오네요. 역시 체인지업은 노림수에 걸려들면 위험합니다.”

“거기다 반디 선수가 낮은 공에 강점이 있잖아요. 이건 볼배합의 실패입니다.”

해설위원의 분석과 달리 윌리엄은 체인지업을 던지지 않았다.

빠른 볼을 던지려 했는데 회전이 이상하게 걸려 이도저도 아닌 볼이 된 게 문제, 중간에 커브를 섞어 준 게 투구에 뭔가 영향을 준 건가.

윌리엄이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이인영이 타석에 들어섰다.

“지켜봅니다. 카운트는 원 볼 노 스트라이크”

“지금도 낮게 들어가거든요. 이번에도 회전이 덜 걸린 건가요?”

“그런데 회전이라는 걸 구위에 적용시키는 건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구위와 회전 수에 큰 관계가 없다는 주장도 있거든요.”

공의 옆을 채주는 사이드 스핀, 공을 위 – 아래로 돌게 하는 톱 – 백 스핀은 실제로 구위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는 구위와 상관없는 헛 스핀, 이건 답에 아무 영향도 주지 않는 허수나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백스핀이 걸려야 하는 빠른 볼에 탑 스핀이 걸리면 어떻게 될까. 탑 스핀이 걸린 만큼 구위는 무뎌지기 마련, 회전을 걸더라도 구위에 맞는 회전을 걸어줘야 효과가 있다.

실제로 빈센트 윌리엄이 던지는 커브는 분당 회전이 평균 2180회로 평균보다 100회 정도 느린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도 좋은 커브를 던지는 건 탑 스핀을 거는 기본을 지키고 팔각도를 바꿔주는 기술로 커브의 움직임을 조절한 덕분, 커브와 슬라이더가 회전에 큰 영향을 받는 것도 사실이지만 회전 축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공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투수가 회전을 제대로 못 걸어 준다는 뜻, 특히 다양한 구종을 구사하는 윌리엄은 경기 중 이런 딜레마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빠른 볼을 던졌는데 체인지업처럼 들어가는 궤적, 뭐가 문제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쉽게 수정되진 않았다.

“다시 밖으로 빠져나갑니다.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지금은 팔을 약간 내렸죠. 그런데, 이렇게 팔을 내리면 발이 더 끌려 나온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밸런스에 영향을 준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죠. 윌리엄 선수가 너무 다양한 공을 던지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2차전에서는 이렇지 않았는데 말이죠.”

투 볼이 되자 A. D. 힌치 포수가 마운드에 올랐다.

오늘 따라 뭔가 부자연스러운 투구, 잔재주를 부리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걸 하라는 조언을 줬다.

커브와 체인지업에 집중하다 망가진 밸런스, 빠른 볼 위주의 투구를 택했다.

‘그래, 내가 2차전에 봤던 공이 이거였지.’

3구를 지켜본 이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잔재주 없이 딱 필요한 것만 채운 포심, 하지만 딱 그 정도다. 제대로 맞추긴 어려워도 구속이 떨어지는 만큼 헛스윙을 이끌어 내긴 어려운 공, 언제까지 빠른 볼에만 의지할 수 있을까.

처음부터 노렸던 건 체인지업, 다른 공은 생각하지 않았다.

[따악 ~ !!]

“밀어냈고!! 아 ~ 좌익수가 거둬내는군요. 이인영 선수의 첫 타석은 좌익수 플라이 아웃입니다.”

“그래도 본인이 원하는 타격이 된 것 같네요. 지금도 체인지업으로 보이는데, 이렇게 되면 윌리엄 선수도 생각이 많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임선우 위원의 말대로 빈센트는 적극적인 투구를 하지 못했다.

요즘 보기 힘든 제구형 투수라는 생소함을 앞세워 2차전을 잡아냈지만 과거는 과거, 오늘의 세인트루이스 타선은 뭔가 달랐다.

따악 ~ !!

다음 타자 마이크 호스는 빠른 볼을 받아쳐 안타를 만들어 냈다.

빠른 볼이 생각만큼 통하지 않자 윌리엄은 다시 커브를 던졌고, 여기서 밸런스가 다시 흐트러졌다.

어찌어찌 막아내긴 했지만 1회에만 18개 투구, 반면 세인트루이스의 선발 클라우드 에반스는 2회를 공 11개로 막아냈다.

윌리엄에겐 없는 95마일을 넘나드는 구속 덕분, 여기에 체인지업이 위력을 발휘하면서 LA 타선을 봉쇄했다.

“스윙!! 삼진입니다!! 바깥쪽 빠른 볼!! 에반스 선수가 여덟 타자를 연속 범타 처리하고 있습니다!!”

“에반스 선수가 윌리엄 선수보다 무브먼트가 좋거나 구종이 많다고는 할 수 없거든요. 역시 투수에게 중요한 건 묵직하고 힘 있는 빠른 볼이라는 걸 보여주는 경기네요.”

에반스는 다음 타자 빈센트 윌리엄을 3구 삼진으로 돌려세우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아직 1대 0이지만 기싸움은 세인트루이스의 우세, LA의 케빈 하우스 감독은 윌리엄을 내리는 승부수를 던졌다.

오늘은 윌리엄의 마법이 통하지 않는 세인트루이스 타선, 그렇다면 우리도 힘으로 찍어 눌러야 한다고 판단했다.

2회부터 바빠진 LA 진영의 불펜,

브룩 코핀을 시작으로 LA가 자랑하는 특급 불펜이 쏟아져 나왔다.

오늘 시리즈를 끝내겠다는 LA의 의지가 담긴 투수 운영, 하지만 세인트루이스에겐 그럴 여유가 없었다.

하루 쉬긴 했지만 지금도 피로가 가시지 않은 불펜, 험버 감독은 에버슨이 좀 더 많은 이닝을 끌어주길 기대했다.

[따악 ~ !!]

“아 … 이 타구는 내야를 빠져나가는데요. 볼넷 이후 안타가 나오면서 무사 주자 1 – 2루가 됩니다.”

“이제 마이크 해밀턴 선수 타석이거든요. 세인트루이스가 1회 득점 이후 좀처럼 도망치질 못하고 있는데, 여기서 한 방이 나오면 분위기가 급변하겠죠.”

경기는 어느덧 4회 초, 3회까지 완벽한 투구를 보여준 에버슨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거기다 상대는 2차전에서 에버슨에게 카운터 펀치를 날린 해밀턴,

험버 감독은 승부하라는 사인을 냈지만 에버슨은 안타를 피하려고 투구수를 늘리는 자충수를 뒀다.

따악 ~ !!

“아 … ”

또 안타가 나오면서 2루 주자가 득점, 이인영은 자기도 모르게 아쉬움 섞인 탄식을 내뱉었다.

오늘 안타 하나 못 친 내게 동료를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다만 아쉬운 건 아쉬운 일, 여기에 후속타자 랜스 카이너가 역전 쓰리 런을 날리는 대형 참사가 벌어졌다.

순식간에 스코어는 4대 1, LA 불펜에 틀어 막힌 세인트루이스 타선이 기적처럼 역전을 연출해 줄까.

필립 험버 감독은 애써 분위기를 다독였지만 분위기는 LA의 월드시리즈 직행으로 기울었다.

‘아직 안 끝났어.’

경기는 흘러 5회 말, 원 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잭 브라이언트가 볼넷으로 걸어나갔다.

다음 타자 테드 반디까지 볼넷을 얻어내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이제 타석에는 이인영, 여기서 케빈 하우스 감독이 얼굴을 내밀었다.

“또 교체냐?!!”

“경기 끊지 말라고!! 겁 먹어서 그런 거 알고 있어.”

홈 팬들의 원성이 쏟아 졌지만 하우스 감독은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불만이 있으면 그 쪽도 이렇게 하면 될 거 아닌가.

불펜이 부족한 가난한 팀의 아우성일 뿐, 페르난도 아비스를 마운드에 올렸다.

영점만 잡히면 100마일 빠른 볼을 보더 라인에 박아넣을 수 있는 파워 피처, 이번 시리즈에서도 1 – 3차전에 등판해 변화구 따윈 개나 줘버리는 투구로 세인트루이스 타선을 더그아웃으로 돌려보냈다.

오늘도 자신감은 여전, 초구부터 빠른 볼을 집어넣었다.

“몸쪽, 볼입니다. 99마일,”

“보시다시피 빠른 볼이 투심성을 띄죠. 이러다 바깥쪽으로 빠지는 커터를 던지는데 속으면 안 됩니다.”

박한우 위원의 염려대로 2구는 커터,

볼이 나오는 지점은 똑같은데 초구는 몸쪽으로 휘고 이건 바깥쪽으로 빠져버린다.

어지간한 타자라면 말려들었겠지, 하지만 이인영은 2구도 골라내는 선구안을 발휘해 팬들을 안심시켰다.

‘쟤들은 툭 하면 100마일이네.’

그건 그렇고 LA의 불펜진은 정말 놀라운 수준, 원래 구속이 불펜의 가장 큰 요건이긴 하지만 어떻게 나오는 선수들마다 100마일을 던지나.

팜이 상대적으로 부실한 세인트루이스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경기 운영, 이인영도 LA와 나름 인연이 있는 입장이지만, 필라델피아 시절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5 ~ 6년 사이 몰라볼 정도로 탄탄해 진 LA 불펜, 이런 팀을 상대로 진다면 불만은 없지만 그렇다고 얌전히 죽어 줄 생각도 없었다.

[딱 ~ !!]

“다시 몸 쪽입니다. 카운트는 투 볼 원 스트라이크”

“역시 이인영 선수라도 이 정도 빠른 볼은 상대하기 버거운 건가요?”

“뭐가 버겁다는 겁니까? 이 선수는 필라델피아 시절 기계가 던진 110마일 공도 쳐낸 적이 있습니다. 임선우 위원님은 믿음이 너무 부족하네요.”

박한우 위원은 오늘도 애제라를 향한 칭찬을 적립했다.

오늘 이렇다 할 소득이 없지만 해줘야 할 때 해주는 선수, 다음 공은 반드시 쳐낸 다며 믿음을 드러냈다.

‘다음에는 반드시 친다. 반드시’

결과는 파울, 그래도 박한우 위원은 주문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제 카운트는 투 볼 투 스트라이크, 운명의 공이 아비스의 손을 떠났다.

따아악 ~ !!

“우와아아 ~ !!!!”

타격이 되는 순간, 홈팬들은 일시에 양 팔을 들어올렸다.

깜짝 놀란 건 세인트루이스 진영도 마찬가지, 더그아웃 바깥으로 나온 험버 감독은 허공에 어퍼컷 세리머니를 날렸다.

거짓말 같은 동점 쓰리 런 홈런, 타구가 담장을 넘어가는 순간 3루로 향하던 잭 브라이언트는 홈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그 뒤를 따르는 1루 주자 테드 반디, 반면 이인영은 느긋한 걸음으로 3루 베이스를 통과했다.

“The man made it again!! made it again!!”

= 그가 또 해냈어!! 또 해냈다고!!

오늘도 울려 퍼지는 ‘The man’ 합창, 일부 팬들은 더그아웃으로 향하는 영웅에게 거수경례를 표했다.

눈물이 찔끔 흘러나올 정도로 감격스러웠던 한 방, 표정 없이 동료들의 하이파이브를 받아낸 이인영도 팬들을 향해 거수경례를 날렸다.

연봉 5천만 달러가 아깝지 않은 선수, 특별석에 앉아 있던 브라운 구단주도 팀 관계자들과 기쁨을 만끽했다.

하지만 경기는 원점으로 돌아왔을 뿐, 이인영은 바짝 마른 목을 축였다.

내색은 안 했지만 공 하나 하나에 입이 바짝 말랐던 타석, 산전수전 다 겪은 역전의 용사에게도 이번 시리즈는 녹록치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