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이 날이 영원히 계속되도록 (1)
[세인트루이스 5대 2 패배]
[미래 장담할 수 없어]
10월 15일, 세인트루이스는 LA를 상대로 한 NLCS 5차전에서 패배했다.
2승 3패로 한 경기만 더 지면 올 시즌은 이대로 마무리, 카메라 기자들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클럽하우스로 향하는 선수단을 놓치지 않았다.
“리(Lee), 뭐라 한 말씀 해주시죠.”
이때 한 기자가 이인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강한 상대를 이겼을 때 얻는 기쁨이 크다며 잘난 척을 떨더니, 이 질문에 뭔가 할 말이 있을 것 아닌가.
무시하고 지나가도 상관없었지만 이인영은 발걸음을 멈췄다.
“I hope this times would last forever”
이 날이 계속됐으면 좋겠다니, 무슨 뜻인가. 기자는 추가해명을 요구했지만 뒤 따르는 동료들의 발걸음에 밀린 이인영은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 계속 되야지, 이대로 끝나면 아쉽잖아.’
내일 경기가 LA 승리로 종료되면 해피엔딩인가.
야구 선수에게 가장 행복한 날이 언제인가. 월드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을 때? 아니면 MVP에 선정 됐을 때? 각자 취향은 다르겠지만 이인영은 야구는 계속 된다는 것에 의의를 뒀다.
프로 스포츠에서 가장 긴 시즌을 치르는 야구,
같은 짓을 몇 번만 반복해도 질리는 이 세상에서 이렇게 긴 시즌을 보낼 수 있다는 건 야구가 그만큼 즐겁다는 뜻 아니겠는가.
늘 바보짓이나 농담 지껄이는 동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즐겁고, 나와 누군가를 비교하며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도 신선하다.
혹자는 남과 나를 비교하지 말라고 하는데, 뭔가 비교할 대상이 있어야 나도 발전을 할 거 아닌가.
오늘은 패배했지만 내일의 승리를 위해 노력하는 것도 야구 선수로 살아가는 즐거움 중 하나, 오늘 패배가 끝이 아니라는 걸 동료들에게도 주입시켰다.
“다들 실망할 거 없어. 여기가 끝이 아니니까.”
“그래, 우리 지금까지 잘 해 왔잖아. 분명 괜찮을 거라고”
“원래 7차전에서 이겨야 기쁨이 더 크잖아.”
동료들도 백전노장의 뜻에 의기투합했다.
상황이 어렵다고 투덜거리는 건 아무 도움도 안 되는 법, 오늘도 내일도 이곳에서 신발 끈을 고쳐매고 즐겁게 경기를 해야하지 않겠나. 이런 저런 일이 있었지만 나름 즐거웠던 시즌, 이대로 끝내기는 아쉬웠다.
‘역시, 평범한 친구가 아니야.’
험버 감독은 팀 분위기를 주도하는 대선수를 유심히 지켜봤다.
월드시리즈만 4번을 경험한 선수, 그 영광의 길에 빛만 있었겠나. 많은 영광을 누렸다는 건 그만큼 시련도 많았다는 것, 악조건 속에서도 태연하게 분위기를 주도하는 모습에서 경외심을 느꼈다.
[NLCS 6차전 우천 연기]
그런데 이날, 사무국에서 6차전 연기를 통보했다.
LA 일대에 내려진 우천 예보, 그런데 당일 비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불펜 소모가 많았던 세인트루이스 진영에겐 희소식, 반면 LA 여론은 사무국의 형편없는 행정을 물고 늘어졌다.
[비가 안 오면 경기를 진행시켜야 하는 거 아냐?]
-> 맞아, 결국 세인트루이스가 정비할 시간만 준 거 잖아.
-> 경기도 흐름이라는 게 있다. 이 휴식이 LA에 악영향을 줄지 두렵다.
40년 넘게 우승이 없는 LA도 우승이 간절한 입장, 이 기세를 몰아 단숨에 세인트루이스를 격파해야 하지 않겠나.
뭣보다 LA는 그동안 포스트 시즌에서 세인트루이스를 상대로 17승 33패, 압도적인 열세에 몰렸다. 그 징크스를 깨버릴 수 있는 시리즈였는데 비 한 방울 없는 우천 연기가 웬 말인가.
LA 여론이 알아서 사망복선을 까는 동안, 세인트루이스는 6차전 선발을 두고 고민을 거듭했다.
“에버슨을 올릴까요?”
“솔직히 조금 불안해”
예정대로라면 올 시즌 평균자책점 2.89를 기록한 클라우드 에버슨이 투입 돼야 한다.
문제는 이게 빛 좋은 개살구라는 것, 부상으로 한 달 정도 경기에 출장하지 못했지만 에버슨은 28게임에서 160이닝을 겨우 넘겼다.
6이닝을 넘게 던진 경기는 14경기, 딱 절반에 그쳤고 전문가들도 운이 많아 따라준 시즌이라며 혹평을 쏟아냈다.
NLSD 3차전에서 6이닝 2실점 호투를 펼쳤지만, 이번 NLCS에선 3이닝도 버티지 못하고 강판 된 에버슨, 험버 감독은 에버슨을 믿지 못했다.
“나쁜 점만 보지 마세요. 이 친구도 투구 철학을 가진 선수니까요.”
그래도 데이비드 넬슨 투수 코치는 감독을 설득했다.
에버슨을 운이라는 단어로 평가할 수 있나? 올 시즌 에버슨은 피안타율 0.211, BABIP도 0.249에 그쳤다.
피안타율과 BABIP은 운이 많이 따르는 지표라며 무시하는 전문가들도 있지만 이걸 통제하는 투수들도 있다.
에버슨은 평균 95마일 강속구를 던지지만 특이하게도 제구형 투수처럼 바깥쪽을 집요하게 찌르는 투구를 한다.
볼넷을 내 줄 위험이 크지만 피안타율을 극단적으로 낮추는 투구, 많은 이닝을 소화할 순 없지만 자기 공만 던지면 팀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선수다.
지난 2차전 경기는 그게 잘 안 됐을 뿐,
세인트루이스에서 가장 낮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선수가 누구인가. 데이비드 넬슨 코치는 그 점을 강조했다.
“넬슨이 5이닝만 버텨주면 나머지는 불펜으로 막을 수 있습니다. 하루 쉬웠으니 불펜도 여유가 있지 않습니까?”
“ … 그래, 맞아. 내가 너무 소심하게 생각했어.”
넬슨 코치에게 설득된 험버 감독은 단장과 협의를 거쳐 에버슨을 6차전 선발로 내세웠다.
LA도 2차전에 선발로 나선 빈센트 윌리엄을 예고, 세인트루이스에서 벌어지는 6차전에 야구 팬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스트라이크!!”
1회 초 원정팀 뉴욕의 공격, 마운드에 오른 에버슨은 93마일 빠른 볼로 시동을 걸었다.
질리지도 않는지 오늘도 바깥쪽을 찌르는 투구, 저 선수는 학습능력이라는 게 없는 건가. LA 타자들은 2차전처럼 스트라이크 존을 좁히고 바깥쪽 공을 공략하는 전략을 들고 나왔다.
[딱~!]
“타격, 2루수가 잡아 1루로 송구합니다. 원 아웃, 에버슨 선수가 첫 타자를 잡아냅니다.”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러운데, 이게 확실한 정보는 아니거든요. 입이 근질근질한데 괜히 눈치가 보이네요.”
“불을 피웠으면 끌줄도 알아야죠. 임선우 위원님은 대중의 뭇매가 그렇게 두려우십니까? 그냥 말씀하세요.”
박한우 위원은 할 말 못하는 임선우 위원을 다그쳤다.
얼마 전 잘못된 정보를 근거로 해설을 해 팬들에게 뭇매를 맞은 것, 그런 게 무서우면 대놓고 편파 해설하는 나는 15년을 어떻게 버텼겠는가.
까짓거 해 보라는 독촉에 임선우 위원은 용기를 냈다.
“제가 알아보니까 체인지업을 잘 던지는 투수는 BABIP을 컨트롤 하기 쉽다고 합니다.”
“오? 그렇습니까? 좀 더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에버슨 선수가 원래 BABIP이 낮았던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루키 시즌 기록이 0.276, 다음 시즌 기록은 0.335였거든요. 그런데 체인지업을 집중적으로 조련한 4년 차 시즌에 0.229, 올 시즌도 0.258을 기록했습니다.”
에버슨 외에도 체인지업을 잘 활용하는 선수들의 BABIP이 약간 낮다는 게 통계로 드러났다.
문제는 이게 확실하지가 않다는 것, 체인지업을 못 던져도 BABIP이 낮은 투수는 얼마든지 있다.
강력한 구위와 슬라이더를 앞세워 삼진을 쓸어 담는 투수가 그 예, 정말 체인지업이 피안타율을 억제할 수 있는 수단인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끊이질 않는 주제, 어쨌든 인플레이 타구를 줄여야 투수에게 유리하다는 건 전문가들도 동의하는 내용이다.
에버슨은 그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해설위원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에버슨은 다음 타자도 땅볼 처리했다.
[누가 최고의 마구를 던지는가?]
사람이 모이면 입에 오르내리는 최강 논쟁, 그 답에 에버슨의 체인지업을 적어낼 수 있을까.
확답은 못 해도 에버슨의 체인지업은 그 대열에 낄 수 있는 수준이다.
최근 2년 성적을 기준으로 피안타율은 0.201, 피 BABIP은 0.234에 불과, 올 시즌 메이저리그 체인지업 평균 피안타율이 0.267이라는 걸 고려하면 에버슨의 체인지업은 분명 특별하다.
평균 94마일을 던지는 강속구 투수에게 이 정도 수준의 체인지업이 장착됐다는 건 엄청난 축복,
조금 더 정면 승부에 집중해도 괜찮지 않을까. 포수 마스크를 쓴 오린 마크도 에버슨의 투구 스타일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조금 더 강하게 밀어 붙여보자고, 괜찮다니까?”
“난 볼넷 보다 안타 맞는 게 더 싫어.”
“하아~ 같은 말을 몇 번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도 너한테 같은 소리 듣는 게 몇 번 째인지 모르겠다.”
이상할 정도로 피안타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에버슨, 그런 소심함이 자신의 성장을 막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그런데 이날, 에버슨은 바깥쪽 제구와 신들린 체인지업을 앞세워 1회를 공 8개로 넘겼다.
2차전에 비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체인지업, 의심을 품었던 험버 감독은 돌아온 에버슨을 미소로 맞이했다.
“자, 이제 세인트루이스의 1회 말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LA의 선발은 빈센트 윌리엄스, 2차전에서 6과 1/3이닝을 5피안타 1실점으로 틀어막으면서 승리를 챙겼습니다.”
“이 선수도 체인지업이 주무기죠. 다만 에버슨 선수와 같은 강속구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무시할 순 없죠. 올 시즌 메이저리그에서 빠른 볼 피안타율이 가장 낮은 선수니까요.”
빈센트 윌리엄슨은 올 시즌 13승 5패, 평균자책점 2.40을 기록했다.
빠른 볼 피안타율은 0.201에 불과,
각자의 장점을 살려 빠른 볼 무브먼트를 다듬는 건 모든 투수들이 거치는 절차지만 수직 - 수평 무브먼트를 모두 잡아낸 선수는 거의 없다.
구속은 느려도 공에 걸린 회전 때문에 생각보다 더 휘어나가는 공, 여기에 떨어지는 궤적까지 겸비했으니 아차 하면 루킹 삼진 당하기 일쑤,
2차전에서 제대로 당한 세인트루이스 타자들은 이를 갈고 나왔다.
‘눈으로 보면 안 된다. 궤적을 읽자.’
이런 공은 눈으로 따라가면 100전 100패,
선두 타자 브라이언트는 초구 타격을 즐기는 성격이지만 초구를 지켜봤다. 100마일에 육박했던 패트로우의 공도 눈으로 보고 쳤는데 내가 이런 공을 못 친단 말인가.
공이 가는 길을 읽는데 초점을 맞췄다.
“바깥쪽, 높게 갑니다. 카운트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이게 빈센트 선수의 특징이죠. 90마일 밖에 안 되는 빠른 볼을 누가 높게 던지겠습니까? 그런데 이 선수는 이런 식으로 카운트와 삼진을 잡아내거든요.”
“타자의 초점이 낮게 잡혀있거든요. 지금 공은 쉽게 나가기 어렵죠.”
우타자 기준으로 눈높이에 들어와도 바깥쪽으로 휘어져 나가며 가라 앉는 궤적, 그런데 이걸 스트라이크 존에 집어 넣는다.
강속구가 난무하는 현대 야구에 나타난 혼종,
디비전 시리즈에서 6할이 넘는 맹타를 휘두른 차세대 강타자도 윌리엄 앞에선 무기력했다.
나름 버텼지만 5구만에 3루 땅볼 아웃, 더그아웃에 입성한 브라이언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아~ 저 자식 공은 진짜 못 치겠어.”
“야, 네가 못 쳤다고 다른 애들도 못 치겠냐?”
“내가 뭐라고 했어? 그냥 못 치겠다고 한 것뿐이잖아.”
동료들의 타박에 발끈한 브라이언트는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누가 봐도 싸우자고 한 소리는 아니다.
저 녀석들은 원래 평소에도 투닥거리는 관계, 이런 날이 이어지는 것도 재미 아니겠나.
대기 타석에 선 이인영은 어린 것들의 다툼에 아빠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