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날 만족시켜 봐 (15)
“자, 이제 밀워키의 2회 초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세인트루이스는 예상대로 투수를 교체했네요. 맷 해리슨 선수가 마운드에 오릅니다. 이번 디비전 시리즈에서 한 경기 등판, 3차전에서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습니다.”
“이 선수의 투구는 간단합니다. 빠른 볼 그리고 더 빠른 볼이죠. 그게 전부입니다.”
맷 해리슨은 세인트루이스가 자랑하는 불펜,
제구까지 신경 써야 하는 실전에서 던진 공은 아니지만, 해리슨은 마이너리그 시절 109마일을 던져 여론의 입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29살이 된 지금까지 메이저리그 경력은 45경기 뿐, 올해에만 34경기를 뛰었다. 경력은 짧아도 구단 역사상 가장 빠른 구속 TOP10 상위 7개를 독식, 포심 평균 구속이 101마일을 찍을 정도로 구속만큼은 메이저리그 최고 수준이다.
문제는 제구, 마이너리그 시절 77이닝을 던지는 동안 볼넷 49개를 기록한 적도 있다.
제구를 잡기 위해 노력했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는 투구, 자신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제구? 더 빠르게 던져서 못 치게 하면 그만이야.’
제구에 신경쓰는 대신 타자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볼을 던지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 작전이 먹혔는지 8월 중순까지 평균자책점 2.11, 수준급 불펜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9월 이후 부진하면서 평균자책점은 3.14로 상승, 전문가들은 빠른 볼만 앞세우는 단순한 투구는 메이저리그 타자들에게 더는 통하지 않는다는 분석을 내놨다.
그 말을 비웃듯 2차전을 무실점으로 막아낸 해리슨, 오늘 경기도 불펜에서 마운드까지 전력으로 내달리며 넘치는 열정을 드러냈다.
“들어옵니다!! 103마일!! 눈꺼풀을 움직일 여유도 없었습니다!!”
“제대로만 들어가면 치기 어렵죠. 하지만 이 선수의 볼이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한 비율은 38%에 불과했습니다. 밀워키 진영도 저와 같은 자료를 가지고 있을 거란 말이죠.”
“거 불길한 복선은 깔지 마시죠. 분위기가 칙칙해지지 않습니까.”
박한우 위원의 염려대로 초구 스트라이크 이후 해리슨은 쓰리 볼을 연거푸 던졌다.
아무리 빠른 공도 존에 들어오지 않으면 무의미, 하지만 100마일을 넘나드는 구속을 빼면 내게 남는 게 뭐가 있나.
해리슨은 자신의 방식대로 투구를 이어갔다.
“스트라이크!!”
“와아아아~!!!”
스트라이크 콜 하나에 울었다 웃었다 하는 팬들, 반면 이인영은 1루에서 침묵을 유지했다.
해리슨에겐 구위에 어울리는 탈삼진 능력이 없다. 9이닝 당 탈삼진률은 7.2개 정도, 삼진을 못 잡는 강속구 투수가 이렇게 중요한 경기에서 활약할 수 있을까.
팬들이 원하는 건 구속이라는 눈요기가 아니라 타자를 돌려 세울 수 있는 구위, 해리슨에겐 그 요소가 부족했다.
[따악~!!]
“타격!! 아~ 이 타구는 좌중간을 가르는 군요. 호세 구즈만이 2루에 안착하면서 무사 주자 2루가 됩니다.”
“지금도 101마일 빠른 볼인데 반응을 하잖아요. 2차전에서 한 번 봤던 공이라 밀워키 타자들도 면역이 됐을 겁니다.”
계속되는 밀워키의 공격, 다음 타자 조나단 힉스는 102마일 빠른 볼을 공략해 우측으로 보냈다.
2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면서 다시 밀워키의 리드(4대 3), 다음 타자 닉 스나이더는 5구만에 볼넷으로 걸어 나갔다.
전혀 통하지 않는 빠른 볼 전략, 데이비드 넬슨 투수 코치가 올라가 변화구를 조금 더 활용하라는 조언을 했지만 그런 건 해리슨에게 맞지도 않는 조언이었다.
또 안타를 맞으면서 스코어는 5대 3, 해리슨은 결국 아웃 카운트 하나도 못 잡고 강판 당했다.
2차전에서는 통했지만 4차전에서는 요행으로 그친 해리슨 투입, 세인트루이스 현지 해설위원들도 험버 감독의 불펜 운영을 비판했다.
따악~!!
“됐어!!”
“쫒아가면 돼!!”
세인트루이스 타선은 해설위원의 불만을 방망이로 달랬다.
2회 말 공격은 소득 없이 끝났지만, 잭 브라이언트부터 시작되는 3회 말 공격에서 다시 불이 붙었다.
앞 선 타석에서 2루타를 날린 브라이언트는 두 번 째 타석에서도 바깥쪽 공을 힘껏 밀어쳐 안타를 뽑아냈다.
이제 타석에는 테드 반디, 패트로우를 상대로 당겨치는 스윙이 통하지 않자 반디는 고집을 버리고 우중간으로 밀어치는 타격을 택했다.
“바깥쪽, 골라냅니다!! 카운트는 투 볼 원 스트라이크”
“반디 선수가 1차전에서 패트로우에게 삼진만 3개를 당했거든요. 그 중 2개가 바깥쪽 빠른 볼이었는데, 지금은 골라냈습니다.”
“이게 두 번 째 만남이라는 것도 고려해야겠죠. 얼마 전에 한 번 봤던 투수라 눈에 더 익을 겁니다. 해리슨 선수가 무너진 것처럼 말이죠.”
정규시즌은 3경기 붙고 잠시 이별했다가 다시 붙는 일정의 반복이지만, 포스트시즌은 그런 거 없다.
어제 봤던 선수 오늘 보고 내일 또 보는 일정, 덕분에 패트로우의 구위도 세인트루이스 타자들 눈에 어느 정도 익었다.
문제는 이걸 안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을 갖췄냐는 것, 올 시즌 50홈런을 넘겼지만 테드 반디가 밀어쳐서 담장을 넘긴 건 4개뿐이다.
그렇다고 메이저리거가 밀어치기를 못한다는 주장은 웃긴 일, 하지만 평소 안 하던 짓이라 손에 익질 않았다.
“스트라이크!!”
바깥쪽 제구가 잡히면서 코너에 몰린 테드 반디, 경험 많은 밀워키의 매뉴얼 포수는 타자의 심리를 역이용했다.
이렇게 빠른 볼이 바깥쪽을 찌르면 타자는 어떻게 대응할까.
예정대로 밀어치기? 그런데 당겨치는 선수들이 더 많다.
바깥쪽 공은 처음부터 힘을 싣기 어려운 코스, 그래도 강하게 쳐야 결과가 나온다. 평소 밀어치기를 거의 안 하는 테드 반디가 이제 와서 그런 짓을 할까.
바깥쪽 공이 스트라이크 콜을 받았으니 다음에도 바깥쪽으로 던지면 배트를 내겠지, 예상은 적중했다.
빠지는 공이었는데 따라 나온 방망이, 타자가 죄 없는 배트에 화풀이를 하는 동안 천적관계를 재확인한 패트로우는 깊은 숨을 골라 쉬었다.
이제 타석에는 이인영, 걸러도 앞선 타석에서 쓰리 런 홈런을 날린 마이크 호스를 상대해야 한다.
바쁘게 움직이는 밀워키 진영, 브리튼 감독은 투수 코치와 의견을 주고받았다.
“맞아, 여기서는 기를 살려줘야지.”
브리튼 감독은 승부 하라는 사인을 내렸다.
1회 잠시 흔들렸지만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 패트로우, 여기서는 에이스의 자존심을 세워줘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성사된 맞대결, 패트로우는 101마일 빠른 볼을 찔러 넣었다. 제대로 붙어보자는 도전장, 반면 초구를 지켜본 이인영은 다음 공에 집중했다.
“2구, 아~ 이게 손이 올라가나요?”
“그러게 말입니다. 아까부터 판정이 오락가락 하는 것 같네요.”
양 팀 모두 총력전, 해리슨을 시작으로 광속구가 난무하면서 주심도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역전타를 기대했던 관중석 분위기도 잠잠 해졌다.
딱~!!
딱~!!
딱~!!
딱~!!
여기서부터 시작된 파울 지옥, 1차전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패트로우는 헛스윙을 끌어내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하지만 어디로 던져도 다 커트해 내는 타자, 승부가 7구로 넘어가면서 패트로우의 얼굴은 부쩍 수척해졌다.
몸 쪽으로 넣어야 되는데 1차전만큼 확신이 없는 제구, 6구 연속 바깥쪽인데 투수가 몸쪽 승부에 부담을 느낀다는 걸 모르는 타자가 있을까.
사인교환이 길어지자 패트로우는 발을 풀었다.
“우우우~ 우~ ”
어김없이 쏟아지는 야유, 마음을 정한 패트로우는 몸 쪽 사인에 고개를 끄덕였다.
“몸 쪽!! 주심의 손은 올라가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게임을 하고 있는 거라면 게임기 집어 던졌을 겁니다. 게임도 이렇게 만들면 욕먹을 거예요.”
“이인영 선수가 올 시즌 삼진이 27개 밖에 없습니다. 홈런보다 삼진이 적은 선수에요. 이겨 먹으려고 하면 본인만 피곤해집니다.”
체력 게이지가 쭉쭉 떨어지는 게 보이는 투수, 3일 만의 등판이라 패트로우의 얼굴엔 버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안타가 되든 볼넷이 되든 이번 공에 승부를 봐야 하는 입장, 이 선수 하나에 더 이상의 체력은 낭비할 수 없었다.
“볼~!!”
하지만 8구 - 9구가 모두 볼이 되면서 풀 카운트, 회심의 10구를 골라낸 이인영은 1루로 걸어 나갔다.
이 볼넷은 패트로우를 지탱하던 정신과 체력에 다시 일격을 가했다.
마이크 호스에게 얻어맞은 쓰리 런 보다 더한 충격, 홈 팬들도 1회 초 쓰리 런 보다 이 볼넷에 더 큰 환호를 내질렀다.
“몸에 맞았어요!! 마이크 호스가 출루하면서 1사 주자 만루가 됩니다!!”
“이건 좀 위험하네요. 이번 이닝에만 22개 째 투구입니다.”
“이인영 선수와의 승부에서 너무 많은 체력을 소모한 게 문제죠. 6~ 7회에 해야 할 전력투구를 3회에 해버렸습니다.”
브리튼 감독은 서둘러 마운드로 향했다.
오늘은 패트로우를 길게 끌고 가기 어려운 분위기, 그래도 불펜이 몸을 푸는 시간을 벌기 위해 에이스를 마운드에 뒀다.
“와아아~!!”
패트로우는 다음 타자 빈센트 카터까지 몸에 맞는 볼로 내보냈다.
밀어내기로 다시 실점, 하지만 패트로우는 다음 타자 크레이그 윌슨을 병살 처리하며 역전만은 내주지 않았다.
위기를 넘겼다는 안도감도 잠시, 벤치에 앉은 패트로우는 다음 이닝 등판은 어렵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처음부터 올릴 생각도 없었지만 언제나 자신감 넘치고 당당했던 선수가 이렇게 망가지다니, 뭐가 이 선수를 이렇게까지 몰아세운 건가.
피해자와 달리 범인의 얼굴은 무척 평온했다.
“취미가 너무 고약한 거 아냐?”
그라운드 정비가 진행되는 동안, 잭 브라이언트는 이인영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투수를 괴롭힐 실력이 있다면 일찍 승부를 결정짓는 것도 사람의 정, 그래서 나는 패트로우를 상대로 2안타를 뽑아내지 않았나.
하지만 이인영은 투수 얼굴에 죽빵 날린 선수에게 그런 말 들을 이유는 없다고 반격했다.
“내가 저 자식을 괴롭혔다고 생각해?”
“아니야?”
“못 칠 공이라 커트 했을 뿐이고, 볼이 들어와서 걸어 나간 것뿐이야. 칠 수 있는 공이 들어왔다면 나도 타격을 했겠지.”
역전 위기에서도 끝내 역전은 내주지 않고 내려간 패트로우, 마지막 공이 볼이 되긴 했지만 어쨌든 실투는 던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프로에서 많은 투수들을 상대했지만 이렇게 몰아 세웠는데도 무너지지 않고 버틴 투수는 손에 꼽을 정도, 이인영은 패트로우의 투구와 정신력을 높게 평가했다.
결과를 떠나 팀을 위해 3일 휴식 등판을 자처한 선수, 그런 선수를 괴롭히거나 비웃을 생각도 없었다.
내가 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게임이라는 건방진 생각을 했던 것도 상대를 그만큼 높게 평가했기 때문, 경기가 6대 5 세인트루이스의 승리로 끝난 후에도 이 점은 짚고 넘어갔다.
“승리의 기쁨은 강한 상대를 꺾었을 때 배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승리는 아주 만족스럽네요. 물론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갈 길이 먼 만큼, 절 만족시킬 선수가 패트로우 선수 한 명뿐이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만족스러운 경기를 하길 원합니다.”
이 인터뷰에 밀워키 팬들은 치를 떨었다.
하룻밤 즐기고 헤어지는 남녀 관계도 아니고, 널 상대해서 만족스러웠다? 이건 우릴 모욕한 거 아닌가.
거기다 앞으로도 만족스러운 경기를 기대 하겠다니, 상대방을 농락하고 즐기겠다는 심보로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