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날 만족시켜 봐 (14)
“넌 1분 동안 쉴 숨 한 번에 다 쉬냐?”
“아니”
“스윙도 마찬가지야. 열고 닫는 구간이 있어야지.”
디비전 시리즈 4차전을 앞두고, 이인영은 팀 동료 마이크 호스와 의견을 주고받았다.
아무리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도 모든 숨을 한 구절에 다 쏟아 부으면 어떻게 될까.
다음 구절을 부르기 위해 깊게 숨을 들이쉬겠지, 그때 박자 - 음정 다 놓치고 노래 망치는 거다.
스윙이라고 다르겠나. 장타자들은 하나같이 임팩트 때 스윙 스피드를 최대로 높인다. 문제는 빨리 쳐야 한다는 생각에 스윙을 빨리 시작하는 타자들이 있다는 것, 초반에 힘을 많이 쓴 만큼 마지막에 힘을 낼 수가 없다.
가볍게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는데 홈런을 치는 타자가 있다면 이 원리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것, 이인영은 프로 경력 16년 동안 갈고 닦은 노하우를 동료에게 전수해 줬다.
“공이 최대한 깊게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
“기다리라고?”
“공이 오른 발 앞에 올 때까지 기다린다고 생각해, 너는 우타자니까 왼 발이 기준이 되겠지”
가상의 공이 오른발 근처까지 들어오자, 이인영은 오른쪽 엉덩이를 약간 위로 올렸다.
상체가 약간 기운 자세가 된 것, 이렇게 되면 상체를 마지막까지 볼 뒤에 둘 수가 있다.
몸이 너무 앞으로 나가면 파워가 안 나오는 건 당연, 그렇게 자연스럽게 돌아 나온 배트를 마지막에 손과 팔을 이용해 힘껏 돌려준다.
이 스윙을 가장 잘 활용하는 선수가 누굴까. 이인영은 1번 타자 잭 브라이언트를 꼽았다.
브라이언트는 신체조건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다.
키 178cm에 몸무게 83kg, 하지만 공을 최대한 깊숙이 끌여 들여 때리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이런 타격을 하면서 당겨 친 타구가 40%를 웃돈다는 게 웃긴 일, 공이 앞발까지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는데 타구가 밀려야 되는 것 아닌가.
이인영은 그 이유를 마이크 호스에게 설명해 줬다.
공이 깊숙이 들어와도 상체가 공 뒤에 머물고 있다면 파워는 살릴 수 있다. 빠르게 쳐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에 몸이 앞으로 나가니 파워가 죽어버리는 것, 마이크 호스가 왜 패트로우에게 약점을 보이는 이유가 설명됐다.
문제는 타격 수정이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는 것, 지금 타격 폼을 수정해서 뭘 어쩌자는 건가.
다만 상체 밸런스가 무너지는 건 고칠 수 있겠지, 동료의 조언을 받아들인 마이크 호스는 연습을 거듭했다.
“그 자식 두들겨 팰 수 있는 건 너하고 나 밖에 없다. 명심해라.”
그 사이 이인영은 잭 브라이언트와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패트로우를 상대로 그나마 타자 구실을 하는 선수가 누구인가. 다른 동료들을 폄하 하는 건 아니지만 인정할 건 인정 해야겠지, 우리가 못 치면 오늘 경기 못 잡는다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래도 다른 녀석이 영웅이 될 수도 있잖아?”
“나는 그런 요행은 바라지 않아. 공이 저절로 배트에 걸리는 게 아니잖아?”
그래도 브라이언트는 우리 외에도 영웅이 될 자격은 누구에게나 동등하다며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인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요행이라는 것도 실력이 있어야 따라오는 법, 그 실력을 갖춘 선수가 누구인가.
오늘 세인트루이스가 승리를 거둔다면 그 영웅은 나 아니면 네가 될 거라며 선을 그었다.
날 인정해 준 건 고마운데, 다른 선수들을 따돌린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정규시즌에서 패트로우 얼굴에 죽빵까지 날린 브라이언트지만 이런 생각은 조금 조심스러웠다.
“자, 홈으로 돌아온 디비전 시리즈, 세인트루이스는 라몬 린시 선수를 선발로 앞세웁니다. 올 시즌 16승 7패 평균자책점 3.40, 39세 노장의 투혼을 보여준 시즌이었습니다.”
“원래는 2차전에 등판할 예정이었는데, 지난 2일 디비전 시리즈를 앞두고 피로를 호소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괜찮다고 하는데 지켜봐야겠죠.”
“지금 생각하면 이충재 선수가 1차전 선발로 나선 건 린시 선수의 갑작스러운 피로호소도 한 몫 한 것 같습니다. 만약 오늘 세인트루이스가 승리를 거둔다면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도 이충재 선수가 1선발로 등판하겠죠.”
한편, 마운드에 오른 라몬 린시는 마지막 연습 투구에 열을 올렸다.
15년 커리어 동안 포스트 시즌 등판 이게 2번 째 경험, 포스트 시즌에 대한 기억은 별로 좋지 않다.
선수 생활 막바지에 겨우 얻은 기회, 영광스러운 1선발 기회는 놓쳤지만 자신의 손으로 이번 시리즈를 마무리 하고 싶었다.
‘보기 편한데?’
하지만 마음대로는 되지 않았다.
앞서 등판한 세인트루이스 선발진의 빠른 볼 평균 구속은 94마일이 넘는다. 그에 비해 라몬 린시의 평균 구속은 91마일 내외, 이 차이가 밀워키 타자들에게 여유를 선물했다.
“지켜봅니다. 카운트는 투 볼 원 스트라이크”
“린시 선수가 원래 구위로 타자를 압박하는 유형은 아니거든요. 그래도 빠른 볼이 받쳐주는 선수였는데 오늘은 그런 모습이 안 보입니다.”
길을 잃은 제구는 덤,
정규시즌에선 제구가 좋을 때 빠른 볼만 27개를 던져 12타자를 연속 범타 처리한 적도 있다.
하지만 오늘은 날카로운 맛이 떨어지는 모습, 커브를 살려주기 위해 빠른 볼을 가끔 높게 던지는 과감함도 사라지면서 볼배합이 단순해졌다.
같은 팀이 봐도 다음 공이 뭔지 알 수 있을 정도, 험버 감독도 문제점을 눈치챘지만 제구가 엉망인데 무슨 볼배합을 지시하나.
이번 이닝이 무사히 넘어가는 요행을 기대했다.
‘세상에 요행 따윈 없음’
이인영은 흔들리는 동료를 멍하니 지켜봤다.
내가 감독이었다면 마운드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미친 짓을 해서라도 불펜이 몸을 풀 시간을 끌었을 거다.
도저히 봐 줄 수가 없는 상태, 저걸 그냥 두고 지켜보는 감독은 뭔가. 이 상황이 무사히 넘어가길 바라는 건가. 아니나 다를까 1회 초부터 대재앙이 벌어졌다.
[따악~!!]
“아~ 이 타구가 내야를 빠져 나가는군요. 3루 주자, 2루 주자까지 홈으로 들어옵니다. 스코어 3대 0, 린시 선수가 흔들립니다.”
“역시 정상이 아니에요. 지금이라도 올라가야죠.”
허둥지둥 마운드로 달려가는 감독, 이인영도 천천히 마운드로 향했다.
제구만 잡히며 문제없다. 아직 초반이니까 신경 쓰지 말라는 원론적인 말 뿐, 보다 못한 노장이 한마디 거들었다.
“어차피 교체할 건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요? 이 자식 끌어내리는 게 그렇게 가슴 아파요? 못하겠다면 제가 할 게요.”
감독만 선수 교체하라는 법 있나.
이런 딱딱한 상황에서 감독과 선수가 심각한 대화만 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농담을 하는 것도 필요, 이인영은 선수한테 교체당하기 싫으면 지금부터 정신 차리라며 동료를 압박했다.
“정신 차려, 내가 감독이었으면 지금 춤추고 미친 척해서라도 불펜 몸 풀 시간 끌었어. 이런 내 마음을 네가 아냐?”
장난 섞인 질책에 라몬 린시는 피식 웃고 말았다.
길게 끌고 가는 건 물 건너 간 경기, 불펜이 몸을 풀 시간을 벌어주려면 내가 최대한 버티는 수밖에 없다.
라몬 린시는 이렇게 무너진 멘탈을 겨우 수습, 목적을 달성한 험버 감독은 벤치로 돌아갔다.
‘괜찮아. 괜찮다고’
다음 타자는 외야 깊숙한 플라이 아웃, 위험했지만 아웃 카운트를 착실히 늘려가는 게 중요하지 않겠나. 험버 감독이 박수를 치자 코치진과 선수들도 그 뒤를 이었다.
이런 저런 일이 있었지만 어쨌든 라몬 린시는 1회 초를 종료, 벤치에 겨우 엉덩이를 붙였다.
겨우 1회 던졌을 뿐인데 왜 이렇게 기운이 없는 건지, 컨디션이 좋을 때는 100개를 던져도 거뜬했다.
정말 나는 안 되는 건가. 나름대로 시간을 끌어줬지만 불펜이 몸을 풀기엔 부족, 1회 말 공격이 조금이라도 길어지길 기대했다.
“자, 이제 1회 말 세인트루이스의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선두 타자는 잭 브라이언트, 이번 시리즈에서 13타수 5안타, 홈런 2개, 4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원래 장타력이 괜찮은 선수인데 이번 시리즈에서 폭발하고 있죠. 이번 시리즈 2 – 3차전에서 모두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앞 선 두 경기에서 압도적인 화력을 보여준 세인트루이스,
상대는 1차전 승리 후 건방진 말을 지껄인 패트로우지만 홈팬들은 패배 따윈 생각하지 않았다.
[따악~!!]
“자!! 밀어냈고요!! 이 타구는 좌익수 키를 넘어갑니다!! 장타 코스!! 브라이언트 선수는 1루를 지나 2루까지 여유 있게 들어갑니다!! 세인트루이스가 반격을 개시하는 군요!!”
“1차전에서도 패트로우 선수를 두들겼거든요. 지금은 높은 빠른 볼인데, 제대로 받아쳤습니다.”
타이밍이 밀린 것 같은데 마지막에 힘이 실리면서 뻗어 나간 타구,
원래 저 정도는 할 수 있는 선수 아닌가. 기대했던 결과라 이인영은 그러려니 하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다음 타자 테드 반디는 오늘도 패트로우에게 끌려 다니는 신세, 앞선 두 경기에서 맹타를 퍼부은 방망이가 침묵했다.
“우우우~ 우~ ”
“도망치지 마라!!”
“승부하라고!!”
이제 타석에는 이인영, 밀워키 진영이 고의사구를 택하자 홈팬들은 발끈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인영을 거르고 패트로우에 약점이 있는 마이크 호스를 택하는 게 정석, 도망치고 이기는 맛을 알아버린 패트로우도 고의사구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공이 앞발 안 쪽으로 들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편, 대기 타석에 선 마이크 호스는 동료의 조언을 되새겼다.
타이밍이 밀렸는데도 타구를 외야로 보낸 잭 브라이언트, 나는 그동안 발전 방향을 잘못 잡은 건가. 어쨌든 지금은 날 무시한 밀워키 진영에 한 방 먹여주는 게 우선, 마음을 다잡고 타석에 섰다.
“몸 쪽, 약간 깊었다는 판정입니다.”
“호스 선수가 몸 쪽에 상체가 끌려 다니면서 밸런스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거든요. 지금도 밀워키 배터리가 노리는 코스는 하나뿐이에요.”
“약점 잡히면 철저히 물고 늘어지거든요. 극복하는 건 본인의 몫입니다.”
마이크 호스는 침착하게 다음 공을 기다렸다.
공을 강하게 때려내기 위해 타이밍을 앞에 둘 생각만 했지, 공을 끌어들이고 타격을 한다는 생각은 거의 안 해 봤다.
덕분에 여유가 생겼지만 공을 따라가는 건 별개의 문제, 스윙 속도가 마지막에 죽으면서 빠른 공을 타격하지 못했다.
‘그래도 조금은 타이밍을 앞에 잡아도 괜찮겠지.’
3년 차 메이저리거는 바로 문제점을 수정했다.
이인영의 주장도 일리는 있지만 지금 내 스윙으로는 실현할 수 없는 타격, 상체가 앞으로 끌려 나가는 것만 조심했다.
따아악~!!!!
“와아아아~!!!!”
타격이 되는 순간 모든 팬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좌중간을 훌쩍 넘어가는 동점 쓰리 런, 그동안 호스를 상대로 압도적인 우위를 보인 패트로우는 한동안 외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만큼 충격이 컸던 한 방, 반면 멋지게 복수에 성공한 마이크 호스는 동료들과 격한 하이파이브를 주고받았다.
“봐!! 내가 다른 녀석이 영웅이 될 수도 있다고 했잖아!!”
흥분한 잭 브라이언트는 고참을 따라다니며 잔소리를 덧붙였다.
나와 너 나 아니면 영웅이 될 수 없다고 하더니, 이렇게 또 다른 영웅이 탄생하지 않았나. 하지만 이인영은 콧방귀를 뀌었다.
“지금이 9회냐? 역전 만루홈런 나왔어?”
“그건 아니지만 … ”
“승부는 이제부터 시작이야. 두고 보라고, 진짜 영웅은 따로 있으니까.”
마지막까지 고집을 꺾지 않는 고참, 하지만 경기는 이제부터 시작 아닌가. 브라이언트도 잔소리를 덧붙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