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날 만족시켜 봐 (12)
“스윙!! 크게 헛칩니다.”
“지금도 빠른 볼을 노린 것 같은데 컨택이 안 되네요. 그만큼 패트로우 선수의 구위가 좋다는 뜻이겠죠.”
숙적 브라이언트에게 안타를 내줬지만 밀워키의 선발 매튜 패트로우는 구위로 테드 반디를 찍어 눌렀다.
선수들은 대부분 타격 연습을 할 때 공 아랫부분을 타격하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해야 공을 띄울 수 있고 양질의 타구를 양산할 수 있기 때문, 그런데 90마일 후반대의 빠른 공이 스트라이크 존 가운데에서 공이 2~ 3인치만 높게 들어와도 말이 달라진다.
레벨 스윙을 잘 하는 선수라도 배트가 어깨에서 수평으로 나오는 건 거의 불가능, 일부 선수들은 가슴을 일찍 열어 배트를 최단 거리로 끌고 나와 높은 공을 타격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슴을 일찍 열어버리면 힘이 잘 실리지 않는다는 게 문제, 결국 높고 빠른 볼은 타자들이 거의 건드리지 않는다.
그런 성향을 알고 있는 패트로우는 안타를 맞더라도 빠른 공을 높게 던지는데, 이런 투수를 상대할 때는 스트라이크 존을 나눠야 한다.
높은 공은 건드리지 않고 낮은 공은 적극 타격, 그리고 스윙 범위를 넓혀 바깥쪽 공도 끌어 당겨야 한다.
테드 반디는 우타자라 유격수 머리 위를 넘어가는 타구를 노려야 하는 입장, 하지만 생각대로 잘 되진 않았다.
패트로우의 구위가 그만큼 뛰어나다는 뜻, 거기다 낮은 공을 주로 타격하는 테드 반디는 패트로우와 상성이 맞질 않았다.
브라이언트가 출루했지만 테드 반디가 좌익수 플라이 아웃 되면서 1사 주자 1루, 이인영이 타석에 들어섰다.
“초구, 이번에도 높게 들어갑니다.”
“반디 선수를 상대할 때와는 확실히 코스가 다르죠. 바깥쪽으로 높게 던지고 있습니다.”
“이인영 선수는 테드 반디 선수와 스윙 궤적이 전혀 다르거든요. 한두 번 맞부딪친 게 아니라 상대의 장단점은 다 알고 있을 겁니다.”
테드 반디는 스윙을 마무리 할 때 방망이를 잡은 손이 머리 위로 올라간다. 옆에서 보면 크게 원을 그리는 궤적, 반면 이인영은 방망이를 잡은 손이 어깨 근처에 머문다.
이게 무슨 차이를 만드는 걸까.
박한우 위원은 밀워키 볼배합이 바뀐 이유를 자신의 지식 범위 안에서 설명했다.
“낮게 들어옵니다. 카운트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지금은 낮게 들어왔는데, 만약 단타를 치는 선수라면 배트 헤드를 내리면서 공을 찍어 쳤을 겁니다. 이인영 선수가 지금은 스윙을 하진 않았는데, 이 선수는 여기서 공을 들어 올리는 게 가능해요.”
배트 헤드가 마지막까지 뒤에 남아 있다면 배트 헤드만 움직여서 스윙 궤적을 바꿀 수 있다.
그에 비해 유격수 머리 위를 노리고 당겨 치는 타자들은 배트 헤드를 빨리 내밀게 되고 당연히 다양한 궤적에 대응하는 건 어려워진다.
테드 반디는 유격수 쪽으로 강한 타구를 날리기 위해 배트 헤드를 일찍 당겼지만 이인영은 정 반대의 타격을 하고 있는 것, 이런 선수를 잡아내려면 높게만 던져선 곤란하다.
바깥쪽으로 높게 던져야 배트가 닿지 않겠지, 그런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볼넷을 주더라도 안타는 맞지 않겠다는 볼 배합, 이인영은 밀워키 배터리의 작전에 콧방귀를 뀌었다.
‘몸쪽 승부하던 그 배짱은 어디 갔어?’
몇 달이나 지난 일이지만 패트로우는 만루 위기에서 이인영을 몸 쪽 높은 공으로 처리한 적이 있다.
그런데 바깥쪽 높은 공을 던지다니, 1루에 주자가 있으니 3번 타자를 경계하는 건 당연하지만 이런 승부는 재미가 없었다.
‘때려 치워. 이런 건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공 2개가 모두 볼이 되자 패트로우는 포수에게 몸 쪽 승부 사인을 냈다.
몸쪽 공을 던져 잡아낸 좋은 기억이 있지 않나. 매뉴얼 포수도 동의하면서 사인교환이 끝났다.
그런데 3구가 타자 머리 쪽으로 날아가는 아찔한 장면이 연출, 이인영은 매뉴얼 포수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조심해라. 잘못하면 사람 죽는다.”
이어지는 협박에 매뉴얼 포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본인이 죽는다는 건지 아니면 패트로우와 나 둘 중 하나가 죽는다는 건지, 쌍욕을 먹을 각오로 되물었다.
“누가 죽는다는 건데?”
“내가 죽는다고, 한 번 말하면 알아들어.”
귀를 세우고 있던 주심도 보호 마스크 뒤에서 미소를 지었다.
가슴 철렁한 위협구를 당하고도 농담을 할 여유가 있다니, 이 친구는 위협구로 흔들 수 없는 존재인가.
다시 몸 쪽 공을 던지긴 부담스러운 상황, 패트로우는 다시 바깥쪽 높은 공을 택했지만 타자는 반응하지 않았다. 결국 이인영은 볼넷 출루, 패트로우는 후속 타선을 처리하고 이닝을 마쳤지만 찝찝한 뒷맛을 남겼다.
“아까 무슨 말 했어?”
“뭐가?”
패트로우는 매뉴얼 포수를 붙잡았다.
위협구 이후 이인영과 잠시 대화를 나눈 파트너, 무슨 말이 오갔는지 은근 신경이 쓰였다.
“자기 죽는다고 몸 쪽 공은 던지지 말래.”
“정말 그런 말 했어?”
“어”
“그런데 왜 바깥쪽 공을 요구한 거야?”
패트로우는 매뉴얼의 리드에 불만을 뿜어냈다.
타자가 그런 농담을 걸었다면 몸 쪽 공으로 답해주는 게 투수의 자존심 아닌가. 그런데 매뉴얼이 요구한 리드는 정 반대, 볼넷으로 걸어 나간 타자가 날 얼마나 비웃었겠나. 다음에는 그러지 말라며 불만을 표했다.
“사인에 고개 끄덕인 건 너잖아?”
“됐고, 어쨌든 다음 타석에선 바깥쪽은 안 던질 거야.”
“감독하고 경기 전에 다 정한 일이야. 이제 와서 딴 소리 하지 말라고”
이인영이 그나마 약점을 보이는 곳은 바깥쪽 높은 공, 거기다 포스트 시즌에서 기싸움은 무의미하다.
볼넷을 주더라도 좋은 공은 주지 않는 게 중요, 밀워키 코치진은 전 타석 볼넷을 내주더라도 타격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무리하지 말라고”
“알겠습니다.”
어쨌든 경기는 계속 흘러 3회 말 세인트루이스의 공격, 선두타자 이충재는 코치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다.
상대는 세인트루이스의 중심타선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는 괴물, 투수가 안타를 때리겠다고 달려들 레벨이 아니다.
그냥 가만히 서 있는 것도 방법, 하지만 이인영의 생각은 달랐다.
“그걸 왜 지켜 봐?!! 칠만 했잖아!!”
가운데로 들어오는 공을 멀뚱히 쳐다보는 후배,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하는데 인간이 가만히 있어야 되겠나.
스윙하는 척이라도 하라며 닦달을 이어갔다.
코치는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데 선배는 치라고 하고, 뭘 어쩌라는 건가. 잠시 생각을 정리한 이충재는 대강 자세를 잡았다.
[따악~!!]
“돌렸고요!!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입니다!! 아하하하~!! 이충재 선수가 팀의 2번째 안타를 때려냅니다!!”
“이충재 선수가 정규 시즌에서 46타수 5안타, 안타가 없었던 건 아닌데 상대가 패트로우 선수란 말이에요. 이건 이야깃거리가 되겠네요.”
패트로우는 1루수가 던져준 공을 거칠게 낚아챘다.
토끼 한 마리라도 전력을 다해 사냥을 했어야 했는데, 자존심이 누구보다 강한 선수라 이 안타는 그러려니 넘기기 어려웠다.
반면 이충재의 부모님은 아들의 안타에 박수를 치며 기뻐했고, 주위 팬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기도 했다.
투구만 잘 해줘도 되는데 기대하지 않았던 안타가 서비스로 딸려온 경기, 어쨌든 자랑스러운 아들은 코치가 건네 준 점퍼를 입고 1루에서 멀어졌다.
이제 타석에는 패트로우의 천적 잭 브라이언트, 첫 타석에서 안타를 때려낸 만큼 팬들의 기대치는 높아졌다.
[따악~!!]
“네!! 이거죠!!”
“2루수 옆을 빠져 나가는 안타!! 이충재 선수는 어디까지?!! 2루를 지나 3루!! 3루까지 들어갑니다!! 무사 주자 1 – 3루!! 세인트루이스가 오늘 경기 첫 번째 득점권 기회를 맞이합니다!!”
“여기서 반디 선수가 최소 희생타 정도는 해 줘야 합니다. 안 되도 되게 해야죠.”
많은 기대와 환호를 받으며 타석에 들어서는 슈퍼스타,
하지만 반디를 상대로 14타수 2안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한 패트로우는 바깥쪽 낮게 깔리는 빠른 볼로 카운트를 잡아냈다.
패트로우가 구위만 믿고 던지는 투수가 아니라는 걸 증명한 장면, 다음 공도 파울이 되면서 홈팬의 환호성은 잦아들었다.
“떨어지는 볼!! 삼진입니다!! 와~ 여기서 떨어뜨리나요?”
“그러게 말입니다. 패트로우 선수가 앞선 타석에선 높은 공으로 반디 선수를 밀어붙였는데, 지금은 반디 선수가 가장 좋아하는 낮은 공을 미끼로 낚아냈어요. 역시 보통 투수가 아닙니다.”
올 시즌 14승 7패 - 평균자책점 2.74, 188이닝 동안 삼진 223개를 잡아낸 패트로우의 저력을 확인한 투구,
두 타석 모두 완패를 당한 테드 반디는 감독의 손길도 외면하고 더그아웃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세인트루이스의 득점은 이인영에 달렸고, 기운을 차린 홈 팬들은 다시 응원의 목소리를 높였다.
‘죽는다고? 그래, 죽여줄게’
패트로우는 예정대로 몸 쪽 사인을 냈다.
정말 고집 하나는 못 말리는 녀석, 감독은 바깥쪽 사인을 냈지만 매뉴얼 포수는 패트로우의 의견을 존중했다.
‘내가 이 정도론 안 죽지.’
몸쪽 공을 골라낸 이인영은 편안한 자세로 투수와 마주했다.
분명 코치진이 바깥쪽을 던지라고 했을 텐데 몸 쪽을 던지다니, 날 몇 번 이겨봤다고 자신감을 앞세우는 건가.
발칙했지만 그런 도전정신이 마음에 들었다.
“다시 몸쪽, 골라냅니다.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이인영 선수도 여기서 볼넷으로 나가고 싶진 않을 겁니다. 어지간하면 타격을 하겠죠.”
“패트로우 선수도 도망칠 생각은 없어 보입니다. 이번 공에 승부가 갈릴 수도 있겠네요.”
벤치와 사인을 주고받은 매뉴얼 포수는 바깥쪽으로 빠져 않았다.
하지만 패트로우는 이번에도 몸 쪽을 고수, 심지어 손가락으로 몸 쪽을 가리키는 기행을 일삼았다.
‘그래, 쳐 줄 게’
이인영은 상대의 도발을 받아줬다.
피하기만 할 뿐 건드리진 못하는 몸 쪽 공, 내가 못 치니까 저 애송이가 까불거리는 거 아닌가. 틀고 있던 몸을 힘차게 돌렸다.
따악~!!
걸렸지만 라인을 벗어나면서 파울, 패트로우는 어깨를 들썩이며 포수가 던진 공을 받아들었다.
지난 경기에서도 그렇고 역시 내 몸 쪽 공은 못 치는 거 아닌가. 괜히 쫄아서 바깥쪽 중심으로 볼배합을 짠 코치진, 자신감을 얻은 패트로우는 다시 몸 쪽 승부를 걸었다.
[따악~!!]
“우측!! 다시 파울입니다. 아~ 이제 카운트는 투 볼 투 스트라이크가 되는데요.”
“이인영 선수도 지는 건 용납 못 하는 성격이거든요. 패트로우 선수에게 통산 15타수 5안타, 나름대로 강하긴 했는데 득점권에서는 2타수 무안타였어요. 그 중에는 만루 기회도 한 번 있었고요. 거기다 지금은 포스트 시즌 아닙니까. 복수에 이보다 적합한 무대도 없죠.”
서로의 자존심이 걸린 싸움, 패트로우는 슬라이더를 포기했다.
일반적인 타자들은 중심을 투수 쪽으로 밀어내며 타격을 하지만, 이인영은 중심이동이 크지 않다.
어지간한 타자들은 빠른 볼 타이밍에 들어온 슬라이더에 헛방망이를 돌리지만 저 선수는 아니다.
15번이나 맞붙어 봤으니 슬라이더가 큰 효과가 없다는 건 알고 있고, 빠른 볼과 제구만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는 구멍, 이인영도 슬라이더는 생각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