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날 만족시켜 봐 (11)
[세인트루이스 8년 연속 지구 우승]
[미국 프로 스포츠 역사상 3번째 기록]
드디어 길었던 시즌이 끝났다.
세인트루이스는 8년 연속 지구 우승이라는 대업을 달성, 그런데 어쩐지 축하보다는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더 많았다.
[이제는 한 물 간 구단이지, 마지막으로 우승한 게 25년 전이었나?]
-> 망해가는 도시가 야구라도 잘해야지. 그 동네는 희망이 없잖아.
-> 왠지 올해도 월드시리즈에서 미끄러질 듯
세인트루이스는 한 때 뉴욕 – 시카고 – 필라델피아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도시, 하지만 미국 정부의 서부 개척이 시작되고 LA나 샌프란시스코 같은 대도시가 생겨나면서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세인트루이스 시장이 친기업 정책을 발표하면서 이런저런 투자가 이뤄지고 있지만 그게 벌써 10년 전 일, 이렇다 할 효과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나마 잘하는 게 있다면 야구 정도, 하지만 최근 월드시리즈에서 2번 모두 미끄러졌다. 한때 월드시리즈 승률이 0.596이나 됐던 강팀이지만 최근 성적은 2승 8패, 올해는 다른 결과가 나올까.
지구 우승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세인트루이스 팬들, 윌리엄슨 시장은 야구 팀의 8년 연속 지구 우승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스포츠가 도시의 재도약에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는 인터뷰를 남겼다.
‘시대에 뒤떨어지면 사라지는 게 순리’
하지만 이인영은 팬들에게 이렇다 할 메시지를 던지지 않았다.
철도산업 발달로 득을 본 세인트루이스, 하지만 자동차가 보급되고 대중교통이 외면받으면서 세인트루이스는 몰락했다.
살기 좋은 곳에 사람이 몰려드는 건 당연, 사람은 자신의 거주지를 택할 권리가 있다.
그건 야구 선수도 마찬가지, 세인트루이스가 야구 불모지였다면 이인영은 이곳을 선택하지도 않았을 거다.
치안이 안 좋아도 경제가 개판이라도 이곳의 팬들이 날 원하니까 세인트루이스를 선택한 것, 야구 선수에게 제일 중요한 게 그거 아닌가.
포스트 시즌을 앞둔 동료들은 망해가는 도시에 반드시 희망을 주겠다는 메시지를 남겼지만, 이인영은 그런 것에 큰 의의를 두지 않았다.
[자기야, 나 오늘 경찰서 갔다 왔어]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정규시즌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이인영은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장을 보려고 마트 주차장에 차를 세웠는데 돌아와 보니 누군가 침입을 한 흔적을 발견한 것, 다행히 사람이 없는 사이 벌어진 일이지만 이인영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기나 애들 다친 건 아니지?”
[응, 그런데 없어진 게 좀 있어]
“그건 괜찮아. 사람이 중요하지”
좀도둑이 들끓는 미국에서 이 정도는 가벼운 해프닝, 그래도 치안이 그나마 잡혀 있는 세인트루이스 북부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게 조금은 놀라웠다.
나는 괜찮은데 이 도시를 택한 게 가족들에게 피해가 된 건 아닌지, 그냥 뉴욕에 남아 있었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까.
일단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의 안전부터 살폈다.
“자기야, 올 시즌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갈까?”
“지금 뭐라고 했어?”
“한국 가자고”
남편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던 혜진 씨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가야겠지만 지금은 좀 이르지 않나. 남편은 야구는 한국에서도 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혜진 씨는 고개를 저었다.
“거기서 야구해도 만족할 수 있어?”
“응? 뭐라고 했어?”
“한국야구 수준이 당신을 만족시킬 수 있냐고”
정곡을 찌르는 아내의 말에 이인영은 입을 다물었다.
메이저리그도 폭격하는 실력으로 한국에서 만족할 수 있을까. 프로 선수가 어린애들 상대로 놀아주는 느낌이겠지. 혜진 씨는 당신이 있을 곳은 한국이 아니라고 못 박았다.
할 말이 없는 입장, 눈치를 살피던 이인영은 슬쩍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 해 봐. 여기보다 뉴욕에서 생활하는 게 더 편했지?”
“그건 그렇지”
“내가 멋대로 세인트루이스로 와서 서운하진 않아?”
“자기가 대접 받으면서 야구를 해야 나도 마음이 편해”
혜진 씨는 남편의 입장을 배려했다.
야구 선수가 대접받으면서 선수 생활 하고 싶어하는 건 당연, 하지만 뉴욕은 남편의 옵트 아웃 신청에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혜진 씨도 남편의 옷트 아웃 선언에 당황한 건 사실이지만, 뉴욕 구단이 이렇게 나오자 자존심이 상했다.
연봉을 6천만 달러나 주는데 뭐가 불만이냐고 생각했던 건가. 거기다 뉴욕에서 보낸 3년 동안, 뉴욕 여론은 남편의 고액 연봉을 사사건건 물고 늘어졌다.
계약 규모가 너무 커서 나중에 트레이드도 못 한다는 둥, 나이가 너무 많아 위험한 계약이었다는 둥, 그런 식으로 지껄이면 선수가 어떤 생각을 하겠나.
‘아~ 그래서 옵트아웃 신청한 거구나. 나는 남편 편’
그제야 혜진 씨는 남편의 입장을 이해했다.
남편이 정말 돈 더 받겠다고 옵트 아웃을 신청했을까. 뉴욕이 날 진심으로 원하는지 확인 받고 싶었을 뿐, 하지만 구단은 그 요청에 답하지 않았다.
뉴욕에서의 생활이 편했던 건 사실이지만 남편이 여론의 타박에 시달리고 대접도 못 받는 꼴을 어떻게 보나. 까짓거 떠나면 그만, 혜진 씨는 남편의 선택을 탓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해. 나는 언제나 자기 편이니까.”
이인영은 아내의 응원에 소소한 감동을 받았다.
내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역시 가족의 응원 덕분, 뭣 때문에 나가서 돈을 벌고 자존심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건가.
날 받아준 세인트루이스 팬들은 물론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이번 시리즈는 반드시 결과를 내겠다는 각오를 다잡았다.
* * *
[이충재, 디비전 시리즈 1차전 중책 맡았다]
[한국인 선수로 역대 4번 째 등판]
10월 2일, 세인트루이스는 1차전 선발을 예고했다.
올 시즌 16승을 거둔 라몬 린시, 평균자책점 2.89를 기록한 클라우드 에버슨도 있는데 25살의 젊은 투수가 그런 중책을 짊어져도 되는 건가.
필립 험버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충재를 기용하는 분명한 이유를 밝혔다.
“그 친구는 성장했고 이제 세인트루이스에 꼭 필요한 선수가 됐습니다. 거기다 밀워키 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으니 1선발로 내세울 이유는 충분합니다.”
올 시즌 이충재는 밀워키를 상대로 4경기에서 2승 1패, 평균자책점 2.20을 기록했다.
정말 놀라운 건 8월 21일에 열린 4번 째 등판, 앞선 2경기에서 이충재의 체인지업에 철저히 당한 밀워키 타선은 체인지업을 노리고 타석에 들어섰다.
체인지업 13개를 던졌는데 그 중 6개가 안타, 3차전에서 난타를 당한 이충재는 타이밍을 뺏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최고 97마일까지 나오는 빠른 볼이 있는데 왜 나는 그런 투구를 했을까.
네 번 째 맞대결에서는 체인지업을 줄이고 최고 98마일까지 나오는 빠른 볼과 슬라이더를 앞세워 타자들의 헛스윙을 끌어냈다.
그날 잡은 삼진은 9개, 빠른 볼로 6개 - 슬라이더로 3개를 낚아챘다. 체인지업으로 타이밍을 뺏는데 집중했던 루키가 구위로 타자를 찍어누르는 모습을 보여준 것, 그만큼 기량이 올라왔다는 뜻이다.
전반기에 불펜으로 뛴 경기가 많아 선발 등판은 17경기에 그쳤지만 10승 3패, 평균자책점 3.42를 거두며 선발진에 안착, 전문가들로부터 구위만큼은 세인트루이스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디비전 시리즈 1차전에 내보내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 필립 험버 감독은 이충재에 대한 신뢰를 드러냈다.
한국인 선수로는 역대 4번 째 디비전 시리즈 등판, 야구 인생 최대의 등판을 앞두고 이충재는 부모님과 전화 통화를 나눴다.
“엄마, 그날 오시는 거죠?”
[그럼 당연히 가야지]
“장사 접고라도 오세요.”
시즌 초만 해도 부담 된다며 오지 말라고 하던 녀석이 무슨 바람이 분 건가. 어쨌든 한국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부모님은 가게 문을 닫고 미국으로 향했다.
‘하아~ 떨린다.’
포스트시즌 새내기는 호흡으로 뛰는 심장을 다독였다.
이제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모습만 보여드리면 되는데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건지, 예정보다 일찍 불펜으로 자리를 옮겨 연습투구를 했다.
너무 일찍 몸을 풀어도 좋을 게 없지만 덜덜 떨고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 불펜 투구를 60개 정도 했을 때 부모님도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당신 정말 초대할 거예요?”
“그럼, 은혜는 갚아야지.”
이충재의 아버지는 이인영을 식당으로 초대하는 계획을 기획했다.
말도 잘 안 통하는 미국에서 아들을 이끌어줄 선배가 있겠나. 귀한 자식 집 밖으로 내보낸 게 벌써 5년, 하루도 마음이 편했던 적이 없었다.
그런 아들을 잘 챙겨줬다는 사람에게 식사라도 대접하는 게 예의 아니겠나. 뭣보다 이인영은 메이저리그를 호령하는 스타, 식당에 초대하면 홍보 효과도 따라올 거라는 기대를 품었다.
문제는 어떻게 초대를 하느냐는 건데, 일단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자, 이충재 선수가 디비전 시리즈 마운드에 오릅니다!! 올 시즌 35경기 등판, 10승 7패 평균자책점 3.42, 142이닝 동안 볼넷 47개, 탈삼진은 142개를 기록했습니다.”
“한국인 선수가 두 명이나 출장하는 경기죠. 오늘은 한국 야구 역사에 남을 기념비적인 경기가 될 것 같습니다.”
어느 때보다 흥분한 임선우 위원, 이미 전설이 된 선수와 그 길을 따라가는 젊은 선수의 협력을 기대했다.
그 기대에 응하듯 이충재는 94마일 빠른 볼로 카운트를 잡았고, 홈 팬들의 환호가 따라붙었다.
불펜 투구를 많이 해 둔 덕분에 구속을 끌어올려도 부담은 없는 편, 고민 할 것도 없이 95마일 빠른 볼을 밀어넣었다.
[따악~!!]
“1루!! 잡았고!! 이인영 선수가 직접 터치합니다!! 원 아웃!! 이충재 선수가 공 2개로 첫 타자를 처리하는군요!!”
“오늘도 구위는 괜찮습니다. 기대해 볼만 하네요.”
점점 달아오르는 분위기, 살짝 흥분한 이충재는 구속을 더 끌어올렸다.
팀에 필요한 선수라는 말을 듣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나.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뿜어내듯 이를 악물었다.
포수가 진정하라는 사인을 보냈지만 무의미, 97마일 빠른 볼로 맷 곤잘레스를 돌려세웠다.
거친 투구폼인데도 컨트롤과 커맨드가 유지되는 구위, 팬들은 애송이의 활약에 반해버렸다.
“와아아아~!!”
세 타자 모두 범타 처리, 팬들의 진심 어린 환호에 감격한 이충재는 발걸음을 조금 늦췄다.
정규시즌과는 다른 반응, 이 환호를 조금이라도 더 누리고 싶었다.
그 마음을 알고 있는 이인영은 후배를 다그치지 않았고, 차분하게 1회 말 공격을 준비했다.
브라이언트 – 반디 – 이인영 – 호스로 이어지는 세인트루이스의 호화 라인 업, 평소에도 긴장 따윈 없는 브라이언트는 초구 타격 안타로 시동을 걸었다.
“자, 이제 테드 반디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287 - 홈런 52개 - 119타점, 세인트루이스 역대 단일 시즌 홈런 기록을 갈아치웠습니다.”
“이인영 선수가 들어오면서 타선이 한층 강화됐지만, 자기 손으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고 싶겠죠. 그렇게 해야 본인도 만족이 될 겁니다.”
박한우 위원은 테드 반디의 마음을 꿰뚫었다.
굴러들어온 돌에게 우승의 영광을 맡기면 프랜차이즈 스타의 자존심이 어떻게 되겠나. 이인영은 우승을 위해 영입한 용병일 뿐, 올해는 반드시 내 손을 결말을 짓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