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날 만족시켜 봐 (10)
[이인영 4년 만에 필라델피아로 돌아온다.]
시즌 종료를 앞두고 세인트루이스 선수단은 필라델피아로 향했다.
필라델피아를 떠난 이인영은 오클랜드 – 뉴욕을 거쳐 4년 만에 내셔널리그에 복귀, 지난 5월 24일 필라델피아와 3연전을 치르긴 했지만 홈 경기였다.
‘다 변했구나.’
이인영은 이 맞대결에 큰 의의를 두지 않았다.
동고동락했던 옛 동료 중 지금도 필라델피아 유니폼을 입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장 친했던 세스 브런들은 필라델피아를 떠나 콜로라도에 안착, 산체스도 시카고로 둥지를 틀었고 감독도 코칭 스태프도 모두 바뀌었다.
내가 기억하는 필라델피아는 이제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는데 필라델피아로 돌아온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거기다 필라델피아는 원정 팀 선수에게 박수를 보낼 만큼 인정이 있는 지역도 아니고, 이번 원정에 큰 의의를 두지 않았다.
평소처럼 준비를 마치고 향한 더그아웃, 이인영은 취재요청을 받고 기다리고 있던 기자에게 악수를 권했다.
“4년 만에 이곳으로 돌아오셨는데, 뭔가 특별한 감정을 느끼십니까?”
“글쎄요. 돌아오긴 했는데 별 감정은 없네요.”
“별 감정이 없다고요?”
“제가 기억하는 필라델피아 선수단은 이제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저도 많이 변했고요.”
10년 전만해도 이인영은 능력을 인정 받아야 하는 도전자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달라진 입장, 뭣보다 옛 추억에 사로잡힐 만큼 나이를 먹은 것도 아니라며 웃음을 유발했다.
“혹시 홈 팬 여러분들이 박수를 보내주길 기대하진 않으십니까?”
“그건 그거대로 서운하겠네요. 저는 이곳 팬들을 쓰레기 취급했고, 그에 걸맞은 선수가 되기 위해 노력했으니까요. 뭣보다 원정 팀 선수에게 박수를 보내는 건 필라델피아 팬들 답지 않습니다. 차라리 야유를 보내줬으면 좋겠네요. 그 편이 저한테도 자극이 되니까요.”
질문을 던진 기자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 선수 말대로 필라델피아는 모든 것이 변했다.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이인영의 자신감과 실력 뿐이라고 해야 하나.
이번 시리즈는 또 어떤 일화를 만들 것인가. 3루 중계 박스에 자리 잡은 카메라맨들은 앵글을 돌려 관중들의 반응을 잡아냈다.
“자, 필라델피아와 세인트루이스의 맞대결, 필라델피아는 A. J. 스완 선수를 마운드에 올립니아. 올 시즌 12경기 등판 4승 5패 평균자책점 4.08 56과 2/3이닝 동안 볼넷 21개, 탈삼진은 44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텍사스 출신이고 네바다 주립 대학을 거쳐 메이저리그에 올라왔죠. 자신의 개성이 확실한 선수입니다.”
그 많은 제구형 투수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분명한 건 심판 점수제가 시작되면서 사라졌다는 것, 예전에는 선수의 이름이 곧 스트라이크였다.
저 선수가 던졌는데 이게 볼일까? 주심은 선수의 이름 값에 스트라이크를 매겼고 선수들도 이를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사무국이 점수제를 실시하고 오심을 수치화하면서 심판진도 더는 이름 값에 얽매이지 않았다.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스트라이크 존, 하지만 A. j. 스완은 이 권위에 도전장을 던졌다.
“당신은 어떤 선수가 되고 싶은 가요?”
“제가 던지는 공이 스트라이크가 되는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1년 차 애송이 주제에 제법 건방진 포부 아닌가.
구석을 찌르는 투구를 하고 있지만 9이닝 당 볼넷은 3.33개, 물론 이건 제구가 나빠서 이런 게 아니다.
몸쪽과 낮은 공에 아주 박해진 메이저리그, A. J. 스완은 이 권위를 무시하다 위기에 몰리는 경우가 많았다. 구위는 몰라도 컨트롤은 나쁘다고 할 수 없는 선수, 상대는 이제 루키지만 필라델피아 선수단도 나름 대비를 하고 나왔다.
“자, 1회 초 세인트루이스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잭 브라이언트, 올 시즌 타율 0.313, 홈런 23개, 74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성적이면 내셔널리그 신인왕은 확실하죠. 올스타에 신인왕까지 경사가 겹쳤습니다.”
브라이언트는 차분하게 초구를 골라냈다.
판정이 상대적으로 후한 바깥쪽과 높은 공만 잘 골라내도 볼 카운트 싸움에서 밀릴 일은 거의 없다.
뭣보다 나는 차세대 메이저리그 스타로 주목 받는 입장, 주심이 편파 판정을 한다 해도 이도 저도 아닌 저 선수에게 유리한 판정을 내리겠나.
주심도 내 편이라며 자기 최면을 걸었다.
“바깥쪽, 들어왔다는 판정입니다. 카운트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브라이언트 선수가 주심과 얘기를 하고 있는데요. 너무 멀지 않느냐는 거겠죠?”
“그런데 이 정도는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브라이언트 선수가 괜히 엄살을 부리고 있네요.”
몸쪽 공은 바깥쪽 공보다 히팅 포인트가 앞에 있기 때문에, 90마일 초반대 공이라도 제구만 제대로 되면 타자가 대응하기 어렵다.
하지만 최근 스트라이크 존은 몸쪽에 박하고 바깥쪽에 후한 편, 타자들이 어떻게 대응을 하겠나.
바깥쪽에 기준을 잡고 밀어치면서 3할 타자가 대거 늘어났다.
올해 3할 타자는 무려 52명, 브라이언트도 그 중 한 명이다. 3할을 기록한다는 건 이 정도 공은 충분히 쳐 낼 수 있다는 뜻, 주심은 쓸데없는 불평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엇?’
이때 날아든 몸쪽 공, 브라이언트는 반응하지 못했고 주심의 손이 올라갔다.
이제 볼 카운트는 원 볼 투 스트라이크, A. J. 스완은 포수에게 직접 사인을 냈다.
결정구는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 눈에 보이는 공이라 커트 해 냈지만 내야를 벗어나지 못했다.
다음 타자 테드 반디는 초구부터 몸쪽 빠른 볼, 볼 판정을 받았지만 스완은 고집스럽게 몸쪽 승부를 고집했다.
[따악~!]
“당긴 타구가!! 좌익수 정면으로 가는 군요. 스완 선수가 공 2개로 테드 반디를 돌려세웁니다.”
“역시 숫자로 투수의 제구력을 파악하는 건 무의미합니다. 지금 공도 타자가 반응은 했지만 코스가 절묘했거든요. 내 공이 곧 스트라이크라는 건방을 떨만 하네요.”
박한우 위원은 스완을 높게 평가했다.
KBO는 구위도 안 되고 제구도 안 되는 형편없는 투수들이 넘쳐나지만 이 선수는 제구만큼은 확실, 그렇다고 포심이 느린 것도 아니다.
평균 90~ 92마일에서 형성되는 빠른 볼과 커브 – 체인지업 - 슬라이더를 던지는 투수, 제구는 물론 체인지업을 활용해 타이밍을 뺏는 투구도 인상적이다.
주심의 판정만 따라준다면 파워피처보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유형, 애제자라도 공략하긴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잠겼다.
“자, 이인영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358, 홈런 33개, 113타점, 지난 경기에서 200안타를 돌파했습니다.”
“재미있는 승부가 되겠네요. 이인영 선수도 볼 카운트 싸움이라면 누구보다 잘 하거든요. 서로 임자를 만났습니다.”
이인영은 느릿한 발걸음으로 타석에 들어섰다.
기대한 건 아니지만 필라델피아 팬들이 비난과 환호 사이에서 마음을 정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 하지만 타석에 들어설 때까지 아무런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이도저도 아니게 된 팬덤, 언제 이렇게 재미없는 도시가 된 건가. 이제 정말 내 기억 속에 남게 된 쓰레기 팬들, 허탈한 마음으로 타석에 들어섰다.
‘밀리면 안 된다. 맞더라도 도망치면 안 돼’
한편, A. j. 스완은 포수 사인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거물을 잡아내야 내 입지가 올라가는 법, 초구부터 스트라이크를 노리는 배짱을 보였다.
‘재미있군.’
초구를 지켜본 이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한 투수들은 바깥쪽으로 도망치기 바쁜데 확실히 재미있는 루키, 다음 공은 잔뜩 노리고 들어갔다.
“떨어집니다. 카운트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지금도 보면 공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거든요. 스트라이크 존을 대각선으로 파고드는 요즘 투수들과 궤적이 다릅니다.”
“이런 투수라면 이인영 선수가 큰 것 한 방 노려봐도 괜찮을 겁니다. 몸쪽 낮은 공이라면 더 좋겠죠.”
몸쪽 낮은 공에 강점이 있는 애제자, 박한우 위원은 스완이 몸쪽을 던질거라 예상했고 멋지게 맞아떨어졌다.
‘아~ 조금 빨랐나.’
힘차게 돌렸지만 파울 라인을 아슬하게 벗어나는 타구, 한숨 돌린 스완은 포수와 신중히 사인을 주고 받았다.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던질 때, 문제는 결정구가 헛스윙을 유도할 정도로 정교하진 않다는 거다.
브라이언트도 건드릴 정도인데 그보다 한 단계 더 위의 실력을 가진 이인영이라면 더 그렇겠지, 그렇다고 몸쪽을 다시 던지기엔 애매했다.
‘그래, 바깥쪽 빠른 볼이다. 속력은 최고’
어지간하면 끌어올리지 않는 구속, 하지만 94마일 빠른 볼은 바닥에 처박혔다.
제구는 뛰어나도 완급 조절은 그렇지 않은 루키, 이인영은 한 타석 만에 상대 투수의 장단점을 파악했다. 제구를 잘 해 봤자 90마일 정도면 얼마든지 커트 가능, 철저한 괴롭힘이 시작됐다.
[딱~!]
“다시 파울입니다. 이제 승부는 6구로 넘어가는 군요.”
“이인영 선수를 보세요. 카운트가 몰렸는데도 표정은 아주 평온합니다. 별로 어려울 게 없다 이거죠.”
“스완 선수도 이런 선수는 처음 마주할 겁니다. 승부를 떠나 본인의 성장에도 도움이 되겠죠.”
임선우 위원의 말대로 스완은 심적으로 몰려 있었다.
불리한 볼 카운트에서 저렇게 평온한 모습을 유지하는 타자는 처음, 좌우를 흔들어도 다 커트하고 낮은 공은 반응도 안 한다.
90마일 밖에 안 되는 공을 높게 던지는 건 자살행위, 투수 입장에선 진로가 완전히 막힌 거다.
카운트는 유리하게 잡았는데 던질 공이 없다니, 오늘 처음 마주한 상대지만 두려움까지 느꼈다.
‘이것도 안 나와?’
몸쪽으로 휘며 떨어지는 슬라이더 마저 무의미, 저런 타자가 타율 0.358이라고? 3할 5푼을 어떻게 쳤는지는 알겠는데 남은 타석은 어떻게 아웃 된 건가.
발을 한 번 풀고 각오를 다잡았다.
‘높은 공은 안 돼. 철저하게 낮게 가자’
드디어 정한 행선지, 포수는 글러브를 약간 높게 들었고 주심은 허리를 바짝 낮췄다.
절묘하게 파고든 낮은 공, 하지만 주심의 손은 올라가지 않았고 이인영은 주심과 눈을 마주쳤다. 역시 애송이보다는 베테랑을 우대하는 건가.
어린애 괴롭히기는 이쯤에서 종료, 바깥쪽 공을 가볍게 밀어냈다.
[따악~!!]
“밀어냈고!! 좌익수 앞에 떨어집니다!! 이인영 선수의 올 시즌 201번째 안타!! 8구까지 가는 승부 끝에 만들어냅니다!!”
“무협지를 보면 상대의 빈틈이 안 보인다는 대사가 나오죠. 스완 선수가 딱 그 심정이었을 겁니다. 자신이 던질 수 있는 공을 다 던졌는데 통하질 않았거든요. 앞날이 훤히 보입니다.”
박한우 위원의 말대로 스완은 다음 타석에서도 이인영에게 안타를 허용했다.
그리고 5회 초 1사 1 – 2루에서 다시 이인영과 마주, 필라델피아의 커크 잰슨 감독이 마운드에 올랐다.
말 없이 내미는 오른 손, 감독은 내가 저 선수를 잡아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자존심이 상했지만 틀린 생각도 아니라 스완은 공을 넘겨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