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284화 (284/309)

284화. 날 만족시켜 봐 (9)

“자기야, 내 포밍 워시 어디에 있지?”

“여기 있어. 떨어져서 내가 사다 놨지.”

“오 ~ 역시 준비성이 좋네.”

출근을 앞두고 이인영은 이런저런 용품을 챙겨들었다.

화장품도 그 중 하나, 남자가 무슨 화장을 하고 미용에 신경을 쓰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야외 활동이 많은 운동선수일수록 피부를 더 신경 써야 하는 법,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경기장으로 향했다.

클럽하우스에서도 계속되는 미용 관리, 다른 동료들이 커피를 홀짝거리는 동안 피부에 좋다는 당근 주스를 홀짝거렸다.

“그거 맛 있었어?”

“맛 때문에 먹냐? 피부 때문에 먹는 거지.”

“야, 남자가 그런 거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귀여워지잖아 인마, 저 자식은 뭘 모르네”

귀여워진다는 말에 동료들은 폭소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양반이 귀여워져서 뭘 어쩌겠다는 건가. 이인영은 너희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귀여워지긴 틀렸다며 반박했다.

“왜? 나도 지금부터 관리하면 귀여워질 수 있어.”

“어디에 머리 부딪쳤냐? 넌 관리해도 나한테 안 돼.”

오늘도 훈훈한 악담이 오가는 클럽하우스, 시간이 되자 선수들은 하나 둘 더그아웃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도 시작되는 관리, 기본 화장을 마친 이인영은 마지막으로 선 블록을 몸 이곳저곳에 문질렀다. 이제 모든 준비 완료 1루에 자리를 잡고 경기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향수 바꾼 것 같은데?”

“맞아, 이번에 바꿨어”

1루에서도 코치와의 농담은 계속 됐다.

요즘은 구단들도 팀 로고가 박힌 향수를 판매하는 시대, 이인영이 3년 동안 머물렀단 뉴욕은 작년 전체 수익 중 5천만 달러를 향수 판매로 벌어들였다.

하지만 보수적인 세인트루이스는 이런 사업과 거리가 먼 편, 현재 구단 로고가 적힌 향수를 판매하는 구단은 뉴욕, 보스턴, LA 이 정도 뿐이다.

세인트루이스는 뉴욕 다음으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많이 차지한 구단, 하지만 이런 마케팅 전략은 형편 없다.

다른 팀은 주축 선수의 이름을 딴 향수도 만드는데 스타 플레이어가 넘쳐나는 세인트루이스가 이런 식으로 장사를 해도 되는 건가.

하긴 팀의 간판스타나 다름 없는 테드 반디도 패션이나 꾸미기에 관심이 없으니 무슨 사업이 되겠나. 멋쟁이를 불성실하게 바라보는 도시 분위기도 한 몫, 그래도 이인영은 꿋꿋하게 자기 색깔을 지켰다.

“자, 오늘 세인트루이스는 라몬 린시 선수를 앞세웁니다. 올 시즌 22경기 등판, 11승 7패 평균자책점 3.47, 114이닝 동안 볼넷 39개, 탈삼진은 90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근 3경기 연속 노 디시전이거든요. 특히 지난 8월 18일 경기에서는 6이닝 무실점 투구를 하고도 승리를 챙기지 못했습니다. 최근 페이스에 비하면 조금 아쉬운 결과에요.”

라몬 린시는 세인트루이스 선수단 최고령 선수, 처음부터 여기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 건 아니다.

원래는 산호세 소속이었지만 4년 동안 21승에 그치며 빛을 보지 못하다 밀워키로 트레이드, 그곳에서 어느 정도 재능을 인정 받았지만 FA 앞둔 시즌에서 11승 7패 평균자책점 5.11을 기록하며 중박도 거두지 못했다.

밀워키를 떠나 다시 토론토, 디트로이트를 거쳐 세인트루이스로 정착한 선수 인생, 어느덧 39살 노장이 됐다.

최고 96마일까지 나오던 구속은 평속 91마일로 하락, 떨어진 구위를 보완하기 위해 커터 – 커브 등을 개발하며 지금까지 버텨왔다.

내 팔이 앞으로 얼마나 버텨줄 수 있을까.

조만간 은퇴하더라도 남자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이 그라운드를 그리워하겠지,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딱 ~ !!

피츠버그의 선두 타자 하워드 비아스는 초구를 노리고 들어왔다.

구위는 떨어졌지만 스트라이크를 적극 공략하는 라몬 린시의 성향을 노린 것, 타구는 2루수 옆을 빠져나갔다.

‘이게 무슨 냄새지?’

1루에 안착한 하워드 비아스는 코를 킁킁 거렸다.

땀 냄새 풍기는 그라운드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향기, 마침 문제의 범인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야구선수가 향수를 뿌리는 건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내 신경을 건드리는 교란 작전인가. 그렇게 심한 건 아닌데 그라운드에서 좀처럼 맡기 어려운 향기라 은근 신경이 거슬렸다.

“자 여기서 견제!! 아웃입니다!! 라몬 린시 선수가 기습적인 견제로 1루를 지워내는 군요!!”

“역시 견제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죠. 하워드 선수가 지금은 방심했네요.”

이상한 곳에 신경 쓰다 아웃당한 하워드는 터덜터덜 더그아웃으로 향했고, 무안한 마음에 이런저런 변명을 쏟아냈다.

“냄새가 너무 강해서 집중할 수가 없어.”

“냄새? 그게 뭐야?”

“너희들도 1루에 가 봐. 알 게 될 거야.”

농담인 줄 알았지만 1루를 밟은 피츠버그 선수들은 하워드의 말을 이해했다.

그라운드와 너무 안 어울리는 냄새, 3회 초 볼넷으로 1루를 밟은 조시 샌더스는 이인영에게 불평을 중얼거렸다.

“그런 냄새 풍기는 건 좀 아니지 않아?”

“넌 네 몸에서 나는 냄새 맡아봤냐? 썩은 음식 가져온 건 아니지?”

본인들 몸에서 나는 냄새는 맡아보고 하는 소리인지, 일부 선수들은 가까이 오면 진짜 상한 음식 냄새가 난다. 그에 비하면 향수 냄새는 양반, 너나 잘하라는 놀림에 샌더스는 발끈했다.

이때 또 날아든 견제구, 1루에서 비명횡사 당한 샌더스는 뒤를 한 번 쳐다보고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선수들의 불만을 접수한 피츠버그 감독은 주심에게 상황을 설명, 주심이 1루로 향하면서 경기가 잠시 중단됐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아니, 자네 몸에서 무슨 냄새가 난다고 하는데 … ”

“자기들 몸에서 풍기는 냄새보단 덜하니까 오버 하지 말라고 해요.”

이인영은 팔짱을 낀 채 주심과 얼굴을 마주했다.

메이저리그 경력 10년 차에 접어든 내가 저런 애송이들한테 그런 말을 들어야 되나. 어쨌든 코를 킁킁 거리던 주심도 문제 없다는 반응을 보이면서 경기가 재개됐다.

따악 ~ !!

계속되는 피츠버그의 공격, 몸을 날린 이인영은 타구를 막아냈다.

베이스커버를 들어오는 투수와 그 뒤를 쫓는 타자, 한 발 앞 선 라몬 린시는 이닝을 마무리 했다.

코를 살짝 스치는 향수 냄새, 역시 저 녀석인가. 예전엔 좀 거북했지만 익숙해진 린시는 이렇다 할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반면 피츠버그 선수단은 경기 내내 험담 연발, 경기가 끝난 후에도 피츠버그의 감독은 불만을 뿜어냈다.

“그런 건 게이나 하는 짓이다. 야구장에서 그런 냄새를 풍겨야 하나?”

흥분한 탓에 제멋대로 새어나간 말,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피츠버그 선수단이 과잉대응하면서 사건은 일파만파 번져나갔다.

향수 좀 뿌렸다고 게이 취급을 받다니, 피츠버그 구단은 급히 사과 성명을 발표했고 세인트루이스 구단도 나름대로 대응에 나섰다.

“내 생각엔 피츠버그 선수단이 그 친구의 향기에 취한 것 같다. 그것 외엔 설명할 길이 없다.”

이 와중에도 라몬 린시는 재미있는 말을 내놨다.

내 견제 능력이 좋은 건 사실인데 그날 따라 유독 잘 잡힌 주자들, 혹시 이인영의 향수에 취해 발이 묶인 건 아닐까. 남자도 홀리는 능력을 지녔으니 게이라는 오해를 받아도 어쩔 수 없겠지.

여기에 라몬 린시는 그 친구의 취향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 친구는 주위에서 뭐라고 해도 자기 길을 간다. 어느 날은 화장한다고 동료들에게 타박을 받았는데, 네가 화장한다고 나처럼 귀여워질 것 같냐는 말로 모두를 웃겼다. 나도 남자가 화장을 하고 향수를 뿌리는 건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번 사건은 피츠버그가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 거다.”

베테랑답게 차분한 대응, 하지만 이인영은 기자들 앞에서 과격한 발언을 쏟아냈다.

“노린내 풍기는 놈들보다는 제가 훨씬 낫죠. 제가 그동안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옆에 있으면 진짜 구역질 납니다.”

동양인이 냄새를 풍겨봤자 얼마나 난다고 그러나.

진짜 냄새 풍기는 족속은 따로 있는데 속된 말로 왜 지랄을 떠는 건지, 노린내 난다는 인신 모독적인 공격에 미국 여론은 할 말을 잃었다.

어째 최근 조용하다 싶더니 거하게 한 건 터뜨린 베테랑,

이인영은 이후에도 향수 안 뿌릴 테니까 누가 더 냄새나는 인종인지 한 번 과학적으로 붙어 보자며 목소리를 높였다. 졸지에 냄새나는 집단으로 찍힌 피츠버그 선수단, 이인영의 분노는 경기장에서도 계속됐다.

[따아악 ~ !!]

“자!! 이 타구는 멀리 가는데요?!! 우익수는 그저 지켜볼 뿐입니다!! 이인영 선수의 시즌 30호 홈런!! 팀에 4대 1 리드를 안겨줍니다!! 10년 연속 30홈런!! 메이저리그 역대 8번 째 기록입니다!!”

“지금도 느릿느릿 베이스를 돌고 있거든요. 굳이 상대를 자극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죠.”

“냄새 풍기는 것도 아닌데 뭐 어떻습니까? 괜찮습니다.”

박한우 위원은 오늘도 애제자를 감싸고 돌았다.

저 선수가 정말 냄새가 심해서 향수를 뿌리고 다니겠나.

요즘은 향수도 브랜드로 만드는 메이저리그 구단, 아무 것도 안 하는 세인트루이스에 비하면 마케팅에 훨씬 적극적이다.

말 하나로 메이저리그 여론을 흔들 수 있는 존재, 그걸 게이니 뭐니 하며 공격했으니 이런 대우를 받는 건 당연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인영이 애용하는 향수, 매출 25% 늘었다]

그날 이후, 한 기자가 기사를 내보냈다.

기사에 구체적인 브랜드 명은 적히지 않았지만 팬들의 요청이 쏟아지자 이인영은 SNS에 애용하는 향수를 공개, 이번 사건으로 세인트루이스 구단은 생각을 바꿨다.

우리도 이제는 마케팅 전략을 바꿔야 할 때, 향수 회사와 계약을 맺고 내년 시즌부터 구단 브랜드를 붙인 향수를 내놓기로 했다.

대표 모델도 이미 결정, 이인영은 향수가 한 병 팔릴 때마다 0.4달러의 인센티브를 받게 됐다.

피츠버그는 논란을 일으켜 이인영의 배만 불려준 셈, 이인영은 향수 수익으로 받은 돈은 전부 기부하겠다고 밝혀 이미지를 더욱 끌어올렸다.

화가 나면 무섭지만 건드리지 않으면 조용한 선수, 향수로 태클을 거는 목소리는 말끔하게 사라졌다.

“형, 저도 이렇게 하면 귀여워질 수 있나요?”

“뭐라고?”

“저도 형처럼 귀여워지고 싶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이충재는 선배 앞에서 재롱을 떨었다.

향수 사건으로 최근 심기가 약간 불편한 선배, 내가 재롱을 부리면 조금은 가라앉지 않겠나. 후배의 재롱에 대선배는 헛웃음을 지었다.

“너 지금 나 웃기려고 그러는 거냐? 오늘도 내가 심기가 불편해 보여?”

“아니요, 그게 아니라 … ”

“그냥 해 본 말이야. 앞으로 부지런히 관리해라. 요즘 시대엔 외모도 경쟁력이다.”

“알겠습니다.”

팬들도 잘 생기고 깔끔한 선수를 좋아하는 법, 선수들이 관리를 안 하니 여성팬들도 줄어드는 것 아닌가.

내 뒤를 이을 코리안 메이저리거가 잘 생기고 실력도 좋은 선수로 평가를 받으면 더 좋겠지.

이때부터 이충재는 선배를 따라 외모에도 부쩍 신경을 기울였다.

실력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녀석, 후배의 태도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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