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날 만족시켜 봐 (8)
[이인영, 올해도 유일한 메이저리거 올스타]
[통산 9번째 올스타 출전]
7월 11일, 이인영은 올스타전이 열리는 마이애미로 향했다.
작년 시즌은 부상 때문에 전반기를 날려 먹으면서 올스타전 출전에 실패했지만, 올해는 253만 표를 받아 내셔널리그 대표로 출전하게 됐다.
수많은 야구 선수들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무대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강자로 군림할 수 있는 건 그만큼 대단한 일,
한국 여론은 이인영이 국내 야구의 위상을 높였다며 찬사를 쏟아냈지만 이와 동시에 어두운 면도 집중 조명을 받았다.
[왜 제 2의 이인영은 나오지 않나?]
가끔 튀어나오는 천재들에 의존하는 한국 스포츠, 이런 걸 보면 인재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런데 왜 한국야구에서 제 2의 이인영은 나오지 않는 건가.
시스템 또는 지도 방식의 문제인가. 국내 지도자들은 환경적인 이유나 각자의 생각을 밝혔고, 이인영의 아버지 이인호도 언론에서 나름대로 입장을 밝혔다.
“될 놈이 되는 거죠. 다른 거 없습니다.”
“될 놈이 되는 거라뇨?”
“한국 야구는 엘리트 체육이라 지도자가 선수들을 획일적으로 가르친다, 일정이 너무 타이트 하다 말이 많은데요. 결국 될 놈이 되는 겁니다. 다른 거 없어요.”
이인호는 최근에 있었던 일을 풀어냈다.
지금은 대한체육협회가 대학 – 실업 – 클럽 – 동호인을 대상으로 하는 6부 리그를 창설했고, 약 700여 개 팀이 운영되고 있다.
이인호 감독도 시즌이 끝나면 가끔 실업 리그를 찾아가 선수들을 보곤 하는데, 거기서 눈에 익은 선수를 발견했다.
“인영이가 중학교 2학년 때였을 겁니다. 그때 중학교 야구 팀에 인영이보다 더 눈에 띄는 학생이 있었어요. 고교 명문 팀에서 그 학생 데려가려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선수는 어디에 있습니까?”
“얼마 전에 알았는데 4부 리그 실업팀에 있다가 지금은 회사 동료들에게 야구 수업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학생의 비화는 이랬다.
원래는 명문 고교 팀에 가려고 했는데 그게 뜻대로 안 된 것, 그때부터 방황이 시작됐다.
‘이건 말도 안 돼. 왜 내가 이런 팀에 있어야 하지? 뭔가 잘 못 됐어.’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명문 고교야구팀인데 본인의 마음에 차지 않는 곳에 있다 보니 방황하고 야구를 게을리 한 것,
자기가 원하지 않은 팀으로 갔다고 방황했다는 그 학생이 원하는 팀으로 갔다고 해도 일이 잘 풀렸을까?
부상이나 어쩔 수 없는 현실 때문에 야구를 그만둔 꿈나무들도 있지만, 이건 경우가 다르다.
한때 내 아들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던 유망주가 지금은 실업 팀에 있다니, 정말 환경이 많은 걸 좌우하는 건가.
이인호도 한국 야구를 위해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다.
“여러분 세상은 왜 생겨났을까요? 그런 질문을 하신다면 저는 그냥 생겨난 거라는 답을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게 사실이니까요.”
그러다 어느 날 TV에서 과학 프로그램을 보고 뭔가를 깨달았다.
이 세상은 왜 시작됐는가. 이유는 없다,
그냥 어느 날 짠 ~ 하고 생겨난 것 뿐, 그 과학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 세상의 물질은 이유 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질 수도 있다고 한다.
물질이 갑자기 생겼다가 사라진다니, 이게 무슨 말장난 같은 소리인가.
그런데 그게 사실이다.
관측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물질, 왜 세상이 존재하느냐 질문은 인류가 오랫동안 찾아 헤맸던 숙제지만 어쨌든 물질이 그냥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이론을 세상만사에도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수많은 꿈나무들이 야구 선수가 되길 바라는데 그중 눈에 띄는 스타로 성장하는 건 왜 극소수일까.
왜라는 이유를 붙이는 순간 답에서 멀어진다.
세상이 태어난 이유가 없는데, 일개 학생이 스타가 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나. 사람이 성공하고 실패하는데 얼마나 많은 변수가 작용하나. 환경적인 문제도 있을 것이고 본인의 방황이나 재능의 한계, 그 밖에도 다른 이유가 있을 거다.
여론은 선수들의 성장 배경이나 학창시절의 특이한 사건에 주목하곤 하지만 그렇게 눈에 띄었다가 한 순간에 사라지는 유망주들도 많다.
그런 악조건을 다 뚫고 세상에 빛을 내고 있는 스타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이인호는 결론을 내렸다.
‘될 놈이 되는 거지. 스타는 짠 ~ 하고 나타나는 거야. 이 세상이 짠 ~ 하고 태어난 것처럼’
남들이 들으면 웃겠지만 이인호는 이게 진실이라고 믿었다.
내 아들은 처음부터 스타가 될 운명이었던 것, 그냥 짠 ~ 하고 태어난 것 뿐이다.
아버지가 야구 선수라 그 재능을 물려 받았다? 이인호는 그런 주장도 말이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아버지보다 못한 야구선수들도 많고, 아버지보다 훨씬 뛰어난 선수들도 있습니다. 저는 아들이 제 재능을 이어받았다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저보다 훨씬 뛰어나니까요. 그 녀석은 그냥 스타로 태어날 수 밖에 없었던 운명인 겁니다. 그것 외엔 설명이 안 됩니다.”
이인호 감독의 인터뷰에 많은 팬들은 헛웃음을 지었다.
스타가 되는 운명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니, 그럼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노고는 뭐란 말인가.
그런데 이 주장에 지지를 표하는 팬들도 적지 않았다.
[솔직히 이인영은 한국 야구의 기적이지, 이런 선수가 다시 나올 것 같냐? 일본도 어림없어. 제 2의 이인영은 절대 못 나와.]
-> 나도 동감. 메이저리그 150년 역사를 들춰봐도 이런 선수는 없었어. 현대 야구에서 통산 타율이 3할 6푼에 가까운 게 말이 되나? 신은 그냥 태어난 거다. 제 2의 이인영이 안 나오는 건 신은 2명일 수 없기 때문이지
-> 그래, 신은 그냥 태어난 거야. 세상이 그냥 태어난 것처럼 말이지, 이 얼마나 위대한 기적인가. 야구의 신이 하필이면 한국 국적을 달고 태어났어
이제는 선수가 아니라 신적인 존재로 떠받드는 분위기, 그런데 이인영은 올스타전에서 이를 현실로 증명해 냈다.
[따악 ~ !!]
“자 ~ 이번에는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2루 주자가 홈으로 파고 들면서 내셔널리그 팀이 5대 2로 앞서나갑니다!! 이인영 선수는 오늘 3타수 3안타 2타점!! 수많은 별 중에서도 유독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선수의 활약을 보고 계신 분들은 축복 받은 겁니다. 언제 태어났다가 사라질지 모르는 이 스타의 활약을 눈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까?”
박한우 위원은 오늘도 애제자를 향한 찬양을 쏟아냈다.
다른 시대에 태어날 수도 있었는데, 왜 이 선수는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나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건가.
불행하게도 선수 생활 막바지에 접어든 슈퍼스타, 물질이 그냥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이 선수도 어느 날 홀연히 우리의 곁을 떠나는 건 아닐까.
지금 많이 봐두는 게 이득, 어쨌든 추가 적시타를 쳐낸 이인영은 필립 험버 감독의 축하 인사를 받으며 벤치에 앉았다.
바로 이어지는 중계석과의 인터뷰, 이인영은 현지 중계진의 질문에 나름대로 답을 했다.
[리(Lee), 오늘 당신은 위대한 기록을 세웠습니다. 알고 있습니까?]
“그게 뭐죠?”
[올스타 전에서 가장 많은 안타를 기록한 선수가 됐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이날 활약으로 이인영의 올스타전 통산 성적은 35타수 19안타가 됐다.
타율은 무려 0.542, 이대로 경기가 끝나면 통산 3번 째 올스타 MVP에 등극한다.
정규시즌의 활약도 뛰어나지만 특별한 경기에 유독 강한 선수, 정말 한국 여론의 주장대로 야구의 신은 한국에서 우연히 태어난 것 뿐인가.
중계진의 아부에 이인영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할 줄 아는군요. 만족스럽습니다.”
[더 하실 말씀은 없습니까?]
“만족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신이 사람들의 찬양을 받는다고 얼굴을 내밀거나 잘난 척을 하나.
오히려 더 깊은 곳으로 숨어버릴 뿐, 이인영은 앞으로도 많은 팬들의 환호를 받길 원했다. 그렇다면 자신을 조금 더 드러내야겠지, 그렇다고 잘난 척을 떨 생각도 없었다.
이 날 경기는 5대 3, 내셔널리그 팀의 승리로 종료, 모두의 예상대로 이인영이 별 중의 별로 등극했다.
‘생각해 보면 정말 기적이었지. 난 실력과 운을 다 갖춘 놈이야.’
벌써 3번 째 MVP 등극, 내게 이런 영광이 집중되도 되는 건가.
노력이라면 여기 있는 선수들도 나 못지 않게 했을 거다. 매년 수십 만 명의 유망주가 쏟아져나오는 미국, 그 중 메이저리거가 될 확률은 도둑이 훔친 카드 비밀 번호를 한 번에 맞출 확률보다도 낮다.
그런데 올스타에 뽑히다니, 이거야말로 세상의 탄생에 버금가는 기적 아닌가.
다들 엄청난 확률을 뚫고 이 자리에 섰는데 내가 그 영광을 독식해도 되는 건지, 다른 선수들은 성공하면 자만한다는데 이인영은 정 반대였다.
내게 이런 행운이 주어지는 건 그만큼 감사해야 하는 일, 인터뷰에서도 모든 것에 감사해하는 심정을 밝혔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팬 여러분과 선수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행운처럼 나타나 제 삶의 일부가 되어 준 아내, 가족들 그리고 제게 일어난 모든 기적에 감사를 표합니다.”
흘러간 세월의 연륜이 묻어 난 소감, 자리를 채운 팬들은 물론 선수들도 박수 갈채를 보냈다.
이제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시간, 이인영은 일단 마이애미에서 가족들과 하루 휴가를 보내기로 했다.
“자기야, 나 아까 그런 생각 했다.”
“뭐가?”
호텔로 향하는 차 안에서 혜진 씨는 남편을 유심히 바라봤다.
남편을 처음 본 건 17년 전 TV 속, 야구를 별로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그날은 왜 스포츠 채널에 느낌이 꽂힌 걸까.
그렇게 계속 TV를 보다 등장한 남편, 별 생각 없이 경기를 보던 혜진 씨는 안타까운 장면을 목격했다.
NA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펜스가 무너지면서 발목 부상을 입었던 그날, 남편은 기억하기도 싫은 끔찍한 장면이겠지만, 그 날 이후 혜진 씨는 미래의 남편을 자기도 모르게 응원하게 됐다.
‘어? 정말 그 선수 맞아?’
작년에 비해 놀랍도록 홀쭉해 진 모습으로 돌아온 선수, 저런 몸으로 제대로 경기를 할 수 있을까.
부상을 털어낸 것도 다행인데 이인영은 그해 55홈런을 넘기면서 신드롬을 일으켰다.
말 그대로 인간 승리, 그날 이후 혜진 씨는 자연스럽게 팬이 됐고 경기를 챙겨보게 됐다.
‘저런 사람은 누구랑 결혼할까? 나는 아니겠지?’
이후 이인영은 수억 대 연봉을 받는 선수로 성장, 평생 동안 연예인 한 번 못 본 내가 저런 유명인과 연이 닿을 가능성이 있을까.
혜진 씨는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 일이 일어나 버렸다.
아는 언니가 프로야구 선수의 아내였고 베어스의 김환희 선수가 줄을 이어주면서 시작된 인연, 남편은 나와 만날 걸 행운이라고 하는데 따지고 보면 혜진 씨에게도 이 인연은 기적이었다.
“내가 그날 경기 안 봤어도 우리는 부부가 됐을까?”
“어떻게든 만났겠지, 원래 운명의 상대는 정해져 있잖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
“운명에 이유를 따지지 마.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나는 거야.”
혜진 씨는 남편의 아부에 만족했다.
역시 아내를 기쁘게 할 줄 아는 남자, 나는 처음부터 이 사람의 아내로 태어난 운명이라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저도 아빠 아들로 태어날 운명이었어요?”
“아들아 … 너까지 왜 그러냐 … ”
“그렇다고 해주세요. 네? 네?”
짜기라도 했는지 협공에 나서는 아들, 이미 내 아들로 태어난 녀석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뭔가.
엄마를 닮아서 시시콜콜한 것도 따지고 드는 녀석, 이인영은 아들에게도 만족스러운 답을 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