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날 만족시켜 봐 (7)
“이 봐,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듣고 있다니까.”
이곳은 밀워키의 클럽하우스, 어제 경기에서 세인트루이스에게 10대 4, 완패를 당한 밀워키는 비장한 각오로 2차전을 준비했다.
잭 브라이언트 – 테드 반디 – 이인영 – 마이클 호스로 이어지는 세인트루이스의 타선은 어지간한 에이스 투수들도 넘기 힘들 정도,
그 무서움을 알고 있는 매뉴얼 차베스는 등판을 앞둔 애송이에게 볼 배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볼 배합과 사인 교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하지만 구위에 자신이 있는 매튜 패트로우는 주전 포수의 잔소리를 귀찮게 여겼다.
“그냥 그런 거 없이 빠른 볼만 던지면 안 돼?”
“뭐라고? 어제 투수들 어떻게 됐는지 못 봤어?”
“그러니까 나는 자신 있다니까. 그런 줄 알라고”
어이를 상실한 매뉴얼 차베스는 입을 다물었다.
물론 패트로우의 구위는 대단한 수준, 작년 시즌에도 많은 이닝을 던진 건 아니지만 77이닝 동안 삼진을 90개나 잡아 냈다.
크로스 스텝에 로우 쓰리쿼터를 가미한 투구 폼과 최고 99마일까지 나오는 빠른 볼과 슬라이더 조합으로 많은 삼진을 뺏어내는 게 특징,
팔을 약간 높게 드는 하이 쓰리 쿼터라면 와인드업이 끝난 시점에서 공이 타자 눈에 띄겠지만, 특이한 투구 폼 때문에 몸이 공을 끝까지 숨겨준다.
대각선으로 스트라이크 존을 파고드는 빠른 볼 궤적도 까다로운 편, 문제는 이 녀석의 과신과 경솔이다.
지난 6월 27일 마이애미와의 경기에서도 건방을 떨다 테리 올슨에게 역전 홈런을 허용했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건가.
매뉴얼 차베스는 어디 네 마음대로 해 보라며 포기해 버렸다.
‘건방진 놈, 확 무너져 버려라.’
같은 팀이지만 잘난 척 떠는 꼴은 더는 봐주기 어려울 정도, 이번에 작살나면 조금은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더그아웃으로 자리를 옮긴 매뉴얼 차베스는 평소처럼 포수 장비를 챙겨들었다.
따악 ~ !!
연습 배팅으로 마무리 훈련을 하고 있는 세인트루이스 선수들이 눈에 띄었다.
매튜 패트로우는 높은 빠른 볼로 카운트를 잡는 유형, 지난 6월 27일 경기에서도 빠른 볼 60개 중 47개가 높게 들어왔다.
낮은 공을 잘 잡아주지 않는 현대 스트라이크 존에 특화 된 투구, 마이애미 전에서 테리 올슨에게 역전 홈런을 허용하긴 했지만 그 구위는 무시할 수 없다.
단순 무식한 볼배합이 통한다는 건 구위가 그만큼 좋다는 뜻, 패트로우를 무너뜨리기 위해 철저히 대비를 하고 나온 게 눈에 보였다.
“자, 오늘 밀워키는 매튜 패트로우를 선발로 앞세웁니다. 올 시즌 14경기 등판, 7승 6패 평균자책점 3.26, 63과 2/3이닝 동안 볼넷 23개, 탈삼진은 80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 마이애미 전에서는 마지막에 소위 공이 날린다고 하죠? 원래 빠른 볼이 높은 곳에 집중되는 선수이긴 한데, 연속 볼넷을 내주고 홈런을 맞은 건 치명적이었습니다.”
“그건 체력적인 문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체력이 떨어지니까 릴리스 포인트가 무너지면서 공이 높게 뜨는 거죠. 올 시즌만 봐도 6이닝 이상을 던진 경기가 많지가 않아요. 세인트루이스 타자들은 그 점을 잘 노려야 겠습니다.”
선두 타자 잭 브라이언트가 타석에 들어섰다.
낮은 공보다 더 빨리 때려내야 하는 높은 공, 바깥쪽 높은 공에 방망이를 내면 타자가 손해다.
이런 때는 시선을 약간 낮게 조정하는 게 포인트, 볼 카운트를 유리하게 끌고 갔다.
‘언제까지 참을 수 있나 보자.’
패트로우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에서 가운데를 찔러 넣었다.
구위에 자신이 있으니 불리한 상황에서도 망설임은 없는 편, 다음 공은 바깥쪽 높은 쪽으로 던져 파울을 유도했다.
‘아차, 이건 치면 안 되는 거였는데’
타석에서 발을 뺀 브라이언트는 자신을 책망했다. 분명 시선을 낮게 잡았는데 최근 방망이가 잘 맞는 탓인지, 자기도 모르게 욕심을 내고 말았다.
이제는 패트로우가 자랑하는 슬라이더가 들어올 타이밍, 하지만 결정구는 빠른 볼이었다.
‘어때? 마음에 들었어?’
헛스윙 삼진을 잡아낸 패트로우는 포수를 향해 윙크를 날렸다.
내가 빠른 볼만 던져도 잡아낼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 마음에 안 들지만 구위만큼은 확실히 천재적인 자식, 매뉴얼 차베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 타자는 테드 반디, 논쟁이 필요 없는 최고의 타자지만 신인 시절부터 높은 빠른 볼에 약점을 보였다.
높은 공을 공략하기 위해 자세를 수정했지만 강점이었던 낮은 공에 약점을 보이면서 원상복귀, 스트라이크 존이 조정된 지금도 다르지 않다.
높은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들이 많아졌지만 패트로우처럼 압도적인 구위를 가진 투수가 몇 명이나 되겠나. 브라이언트처럼 높은 공은 까다롭게 골라내고 낮은 공을 집중공략했다.
“스윙!! 헛칩니다. 카운트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지금도 마지막에 바깥쪽으로 도망치죠. 중계석에 앉은 저희도 휘는 게 눈에 보이는데, 타자들은 어떻겠습니까?”
“빠른 볼보다 위력적인 공은 없다는 걸 보여주고 있네요. 그래도 최대한 많은 공을 던지게 해야 됩니다.”
체력이 떨어지면 알아서 자멸할 선수, 하지만 테드 반디도 5구 만에 바깥쪽 높은 공에 헛스윙 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타자들도 머리가 있는데 똑같은 공에 당한다는 건 뭘 의미하겠나.
이인영도 방심하지 않고 첫 타석을 맞이했다.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평소 잘 하지 않는 게스 히팅을 선택, 저렇게 빠른 공을 눈으로 쫒아 가면 닿지 않는다.
예측이 어긋나면 헛스윙이지만 그것도 감수해야 할 구위, 초구 바깥쪽 빠른 볼을 골라냈다.
지금까지 패트로우가 던진 공은 11개, 그 중 스트라이크 존을 지나간 건 몇 개 안 된다. 대각선으로 들어오는 궤적 때문에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뿐, 눈보다 축적된 자신의 경험을 믿었다.
“이번에도 볼입니다.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브라이언트 선수를 상대할 때는 여기서 가운데로 밀어넣었거든요. 한 번 노려볼 만 합니다.”
공을 던지기 전, 패트로우는 발을 풀었다.
빠른 볼만 던져도 충분하다고 허세를 떨었지만 지금은 슬라이더를 던질 타이밍, 그렇다고 남자가 이제 와서 비굴하게 고집을 꺾을 건가.
빠른 볼을 밀어 넣었다.
따악 ~ !!
고집부리다 허용한 안타, 패트로우는 다음 타자 마이클 호스를 범타 처리했지만 찝찝한 마음으로 더그아웃에 입성했다.
안타는 맞을 수도 있는데 타자에게 끌려다닌 건 자존심 상하는 일,
지난 마이애미 전에서도 테리 올슨에게 쓰리 런 홈런을 맞긴 했지만 원 볼 투 스트라이크에서 던진 슬라이더가 가운데로 몰리면서 일어난 일이다.
내가 제대로 던졌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 하지만 이인영과의 승부는 달랐다.
내 공을 던졌는데도 안타를 맞았다는 건 구위로 찍어누르는 게 안 된다는 뜻, 그렇다고 방향을 틀진 않았다.
‘두고 봐라. 다음에는 이긴다.’
그렇게 돌고 돌아 3회 초 세인트루이스의 공격, 1사 주자 1루에서 잭 브라이언트가 타석에 들어섰다.
‘저 자식 오늘 빠른 볼만 던지고 있는 것 같은데’
브라이언트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멍청한 건가 아니면 우리를 얕잡아 보는 건가.
분명한 건 패트로우가 빠른 볼만 던지고 있다는 것, 공은 분명 위력적이지만 특유의 투구 폼 때문에 중심이 크게 흔들린다.
번트 자세를 잡으면 더 흔들리겠지, 위협만 할 생각이었는데 배트를 뺄 타이밍이 늦으면서 진짜 번트가 되고 말았다.
“자!! 기습 번트!! 투수는 넘어졌고!! 포수가 잡았지만 던지지 못합니다!! 브라이언트의 기습 번트!! 세인트루이스가 1사 주자 1 – 2루 기회를 잡습니다!!”
“지금은 번트가 3루 방향으로 갔기 때문에 패트로우 선수가 대응하긴 어려웠죠. 브라이언트 선수가 순간적인 재치를 발휘했네요.”
자리에서 일어난 패트로우는 1루를 힐끗 노려봤다.
내게 이런 망신을 주다니, 다음 타석에서 각오하라는 눈빛을 보냈고 브라이언트도 눈싸움을 피하지 않았다.
어쨌든 세인트루이스의 계속되는 공격, 첫 타석에서 삼진을 당한 테드 반디는 두 번 째 타석에서 볼넷을 골라냈다. 잘 보면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지 않는 공, 눈속임에 더는 당하지 않았다.
이제 1사에 주자 만루, 밀워키는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의 타자를 상대했다. 정면승부는 자살행위, 마운드를 방문한 매뉴얼 차베스도 신중한 승부를 요구했다.
“이제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 너같이 힘만 앞세우는 투구는 불펜에서나 통하는 방법이라고, 내 사인대로 해”
“됐거든? 넌 돌아가서 공이나 받을 준비 해.”
고집쟁이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1사 만루에서 누가 신중한 투구를 하나, 힘으로 밀어붙여 삼진 잡아내고 다음 타자 범타 처리하면 끝, 두 손 두 발 다 든 매뉴얼은 제 자리로 돌아갔다.
[딱 ~ !]
“초구 타격!! 파울입니다. 지금은 몸 쪽이네요.”
“바깥쪽으로 던지면서 헛스윙을 유도하더니 지금은 패턴을 바꿨네요.”
“이런 상황에서 몸 쪽 승부하긴 쉽지 않거든요. 무모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배짱은 인정해 줘야겠습니다.”
다음 공도 몸 쪽, 이인영은 몸을 튼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투수를 상대하는 건 정말 오랜만, 만루에서 몸 쪽 승부를 거는 투수가 몇 명이나 있겠나.
구위는 이미 갖췄고 약간만 다듬으면 크게 될 선수, 상대를 인정하는 만큼 전력을 다했다.
‘망했다.’
3구를 때렸지만 내야를 벗어나지 못하는 공, 삼진보다 치욕스럽게 여기는 결과가 나올 줄이야. 완패를 당한 이인영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패트로우는 다음 타자 마이크 호스를 삼진 처리, 밀워키 팬들은 1사 만루 위기를 넘긴 괴력 피칭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문제는 그 다음, 기습 번트를 마음에 두고 있던 패트로우는 5회 초, 브라이언트에게 빈볼을 던졌다.
하지만 빈볼을 예상한 브라이언트는 이를 피해냈고 다음 공에 기습 번트를 댔다.
‘너 잘 걸렸다. 죽빵 한 번 맞아 봐라.’
타구가 1루로 향하면서 조금씩 가까워지는 두 선수, 브라이언트는 패트로우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두 덩치가 뒤엉키면서 벤치 클리어링, 브라이언트와 패트로우는 퇴장 지시를 받은 후에도 목소리를 높이며 기싸움을 벌였다.
“저 녀석들은 크게 되겠어.”
“그게 무슨 소리야?”
“크게 될 거라고, 둘 다 제정신이 아니야. 미쳤다고 난 저런 자식들이 마음에 들어.”
이인영은 이 와중에도 코치와 농담을 나눴다.
간만에 재미 있었던 구경거리, 이런 게 바로 야구 아니겠나. 경기가 끝난 후 이인영은 SNS를 통해 두 선수를 모두 칭찬했다.
[두 선수 모두 크게 될 녀석들이다. 앞으로의 성장이 기대 된다.]
빠른 볼만 던진 패트로우나 번트를 대고 투수 얼굴에 죽빵을 날린 브라이언트나 정신 나간 놈들인 건 마찬가지, 그런데 그런 미친 놈들이 결국 스타가 된다.
예언이 통했는지 패트로우는 출장정지를 마친 7월 7일, 시카고 전에서 6이닝 11탈삼진 무실점 투구를 펼치며 시즌 8승을 챙겼다.
브라이언트도 출장정지 복귀 이후 11타수 6안타를 날리며 활약, 팀 승리를 주도하며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