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날 만족시켜 봐 (6)
“형, 저 어디 가서 형하고 친하다고 해도 되요?”
“아니”
이곳은 밀워키로 향하는 세인트루이스 구단 전용기,
이인영은 귀찮게 들러붙는 후배를 떼어냈다. 평소 선배님이라고 부르더니 은근슬쩍 형으로 바뀐 칭호, 그렇다고 싫은 것도 아니었다.
외동아들로 자란 탓에 형 – 동생이라는 칭호에 막연한 환상이 있는 것도 있고, 귀찮은 척 했지만 밀어내지도 않았다.
“형, 저 다음 등판 때도 잘 할 수 있겠죠?”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형은 야구 천재니까 그런 것도 어느 정도 알 거 아니에요.”
이인영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분명 아부인데 왜 이렇게 귀에 감미롭게 들리는 건지, 이래서 옛날 임금들이 간신을 옆에 뒀던 건가. 그래도 속마음을 숨긴 채 젊잖게 목소리를 깔았다.
“너 요즘 세상이 너무 아름답게 보이지?”
“네?”
“야구 잘 되니까 모든 게 다 평화롭게 보이지 않냐? 전쟁도 없고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그렇지?”
이충재는 마음속을 되짚었다. 야구가 잘 되면서 태도가 적극적으로 바뀐 건 사실, 예전 같으면 감히 말도 걸지 못할 선배에게 이렇게 먼저 대화를 걸고 있지 않나.
이번 밀워키 원정에서 마법처럼 걸린 주문이 깨지면 안 될 텐데, 약간 불안한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명심해라.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는 거야. 조심해”
“우와~ 선배는 독심술도 써요?”
“또 왜?”
“마침 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역시 리스펙트”
밑도 끝도 없는 쌍엄지,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할까. 어쨌든 친한 동생이 생긴 건 나쁘지 않은 기분, 그러려니 하며 웃어넘겼다.
“그리고 네가 지금 받고 있는 환호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자만하지 말고 계속 노력해.”
“포스트 시즌 말씀하시는 거죠?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어지는 선배의 말에 후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충재는 2년 전 월드시리즈에서 라인업에 끼지 못한 걸 지금도 가슴에 두고 있었다. 정규 시즌은 맛보기일 뿐 진짜 무대는 포스트 시즌이다.
그 무대에 서야 진짜 팀의 주력으로 인정받는 것, 정규 시즌 몇 경기 잘 던졌다고 그 자리에 초대받을 수 있을까. 팬들의 진짜 환호는 월드시리즈에서 나오는 것, 열렬한 환호가 뭔지 대략 맛을 본 유망주는 더 큰 환호를 갈구했다.
‘나 잘 하니까 좀 더 칭찬해 줘.’
누가 들으면 어린애냐고 놀리겠지만 사람은 관심을 받아야 성장하는 법, 이충재는 이번 밀워키 전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맷 곤잘레스, 친정 팀에 비수 박을까?]
한편, 밀워키 여론은 라이벌 전을 앞두고 호전적인 문구를 쏟아냈다.
현재 세인트루이스는 44승 32패로 NL 중부지구 1위를 질주, 밀워키가 41승 34패로 그 뒤를 잇고 있다.
같은 중부지구라 충돌이 짖은 건 당연, 거기다 세인트루이스는 올스 스쿨 야구를 지향하기 때문에 자극적인 행동을 일삼는 선수를 좋게 보지 않는다.
반면 밀워키는 배트 플립이나 자극적인 세리머니를 앞세워 젊은 팬을 공략하는 정책을 추구, 극과 극의 성향이라 당연히 충돌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세리머니 문제 때문에 몇 년 전부터 으르렁거리고 있는 관계, 거기다 세인트루이스에서 밀워키로 유니폼을 갈아입은 맷 곤잘레스 때문에 잠시 묻혀 있던 라이벌리가 주목을 받는 건 당연했다.
‘그런 역사는 나하고 관계 없어, 해야 할 일을 할 뿐’
반면 이인영은 별 다른 생각 없이 경기를 준비했다.
세인트루이스 팬들은 젊잖아서 무슨 문제가 터져도 아 하고 마는 편, 흥분하는 건 선수들이다.
팬들이 뭔가 반응을 보여야 나도 자극적인 발언을 쏟아낼 거 아닌가. 필라델피아 시절 때는 쓰레기 팬들 덕분에 진흙 싸움을 주도했지만 여기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자, 1회 초 세인트루이스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잭 브라이언트, 올 시즌 타율 0.311 - 홈런 14개 - 41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올스타 선발에 뽑히는 영광을 누렸죠.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저는 그 기분 압니다. 제가 메이저리그 진출 6년 만에 올스타에 뽑혔거든요. 그때부터 대우가 달라집니다. 주변에서 보는 시선도 마찬가지고요.”
임선우 위원은 옛 추억에 잠겼다.
유망주 시절만 해도 메이저리그에서 자리만 잡아도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선발이 되고 보니 더 높은 꿈을 꾸게 됐다.
잡힐 듯 잡히지 않던 꿈이 손에 쥐어지는데 걸린 시간은 6년, 그 기분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이충재 선수도 그 기분을 맛 봤으면 좋겠는데, 아직은 부족한 성적, 그래도 이인영 선수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메이저리거 아닌가. 언젠가는 그 꿈이 이뤄질거라 믿었다.
따악~!!
그 사이, 잭 브라이언트는 우중간으로 강한 타구를 날렸다.
올스타 투표 후보에 오른 5월 24일부터 6월 27일까지 타율 0.333, 홈런 9개, 23타점을 올렸다. 사람에게 동기가 이렇게 중요한 것이었나.
요즘은 야구가 너무 잘 돼서 무서울 정도, 2루에 안착했지만 세리머니를 하거나 실실거리며 웃는 등 가벼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더 잘해야 한다는 각오를 다잡을 뿐, 2루에서 멀어지며 투수의 신경을 끌었다.
‘올해는 우승한다. 반드시’
다음 타자 테드 반디도 나름대로 동기부여에 나섰다.
9년 연속 선발된 올스타, 기쁜 일이지만 예전만한 기쁨은 없다. 다만 2번이나 미끄러진 월드시리즈 우승이 신경 쓰일 뿐, 유망주도 아니고 올스타 선발에 방방 뛰며 기쁨을 표해야 하나.
나는 더 높은 곳을 바라 봐야 하는 선수, 밀워키와의 라이벌리 따위는 관심 없었다.
[따아악~!!]
“당긴 타구!! 멀리 가는데요?!! 계속 뻗는 타구가 좌측 담장을 넘어갑니다!!!! 테드 반디의 시즌 33호 홈런!! 이 홈런으로 시즌 80타점도 돌파합니다!!”
“올 시즌은 정말 무섭네요. 지난 시즌과는 다른 독기가 느껴집니다.”
테드 반디는 시선을 숙인 채 1루로 걸어나갔다.
이제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타구의 종착점, 느릿느릿 베이스를 돌았고 이런 행동은 밀워키의 선발 보비 월러스의 심기를 자극했다.
“얼른 돌라고!! 네 그 거북이 같은 걸음에 환호해 줄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불평이 쏟아졌지만 테드 반디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나 정도 되는 선수가 저런 떨거지 상대로 화내서 뭐 하나. 내가 바라보는 곳은 정점, 같은 메이저리거라도 너와 나는 수준이 다르다며 무시해버렸다.
‘어른스러운 척 하기는’
테드 반디의 속마음을 읽은 이인영은 피식거렸다.
테드 반디는 메이저리그에서 손꼽히는 슈퍼스타, 하지만 월드시리즈 맛도 못 2인자일 뿐이다.
엄격한 규율을 강조하는 세이트루이스에서 선수 생활을 한 탓에 감정 표현이 서툰 편, 거기다 월드시리즈에서 심판 판정에 폭발하거나 상대 선수의 도발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 탓에 올드 팬들의 평가가 좋지 못하다.
실력은 있지만 중요한 경기에서 중심을 잡아주기엔 부족하다는 평가가 지배적, 세인트루이스가 이인영을 영입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팀의 중심 선수라면 상대의 도발에 적극적으로 대응해도 될 텐데, 비유하면 테드 반디는 궁중에서 엄격한 규율을 받으며 살아온 왕자다.
거친 욕설과 몸싸움까지 오가는 무대에 어울리지 않는 성격, 이인영은 월드시리즈 우승 3회 달성자의 위용이 뭔지 보여줬다.
[따아악~!!]
“어?!! 이 타구는 우측으로!! 우익수는 추격을 포기 했습니다!! 이인영 선수의 시즌 22호 홈런!! 연타석 홈런이 나오면서 세인트루이스가 3대 0으로 앞서나갑니다!!”
“하하~ 이건 뭡니까? 이건 그냥 싸우자는 건데요?”
이인영은 테드 반디보다 더 느리게 베이스를 돌았다.
얌전한 세인트루이스 야구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 빈볼을 염려한 코치가 얼른 돌라는 사인을 보냈지만 이인영은 무시했다.
“자네, 다음 타석에서 빈볼 맞으면 어쩌려고 그러나?”
“빈볼 무서우면 타자하겠어? 그때는 한 방 먹여주면 돼, 너희들도 조금 더 전투적으로 하라고, 우리가 신사적으로 나올수록 상대는 더 무시하니까.”
계속되는 선동에 세인트루이스 선수단은 피식거렸다.
한동안 조용하다 했더니 본색을 드러낸 친구, 오늘이 조용히 지나가길 바랐지만 그렇게 되진 않았다.
“이 봐!! 조심하라고!!”
2회 말 밀워키의 공격, 선두타자 맷 곤잘레스는 이충재의 몸쪽 공을 미처 피하지 못했다.
94마일 빠른 볼이 팔꿈치 보호대를 스쳤고, 곤잘레스는 1루로 향하며 이충재를 향해 욕설을 중얼거렸다.
“야 이 X새끼야!! 건드릴 게 없어서 한참 어린 놈한테 시비 거냐?!!”
1루수 이인영도 불구덩이에 몸을 던졌다.
날 잡지 않은 세인트루이스 구단에 불만이 있으면 구단에 화풀이를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왜 저 어린 친구를 건드리는 건지, 다른 선수들도 벤치 클리어링에 뛰어들 수밖에 없게 됐다.
“찌질한 XX들!! 꼬맹이가 던진 공이 무서워서 성질내냐?!! 어?!! 너희들 그 정도 밖에 안 돼?!!”
“선배님 그만하세요.”
이충재는 날뛰는 선배를 붙잡았다.
나도 이젠 메이저리거인데 왜 자꾸 꼬맹이 꼬맹이 하는 건가.
몸 쪽 공에 필요 이상으로 민감한 반응을 보인 곤잘레스보다, 날 꼬맹이 취급하는 선배한테 서운함을 느꼈다.
‘난 이제 애송이가 아니라고, 보여주겠어.’
이인영의 채찍 작전은 멋지게 먹혀들었다.
내 공에 위협을 느낄만 하니까 상대 타자가 화를 내는 거 아닌가. 화 낼 테면 내라며 몸쪽을 찔렀고, 상대와 눈빛을 교환하는 것도 피하지 않았다.
“몸 쪽!! 들어왔다는 판정입니다!! 삼진!! 이충재 선수가 3경기 연속 퀄리티 스타트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집니다!!”
“지난 경기보다 몸 쪽 공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데요. 정말 제구 때문에 고생하던 그 선수가 맞나요?”
“처음부터 이렇게 던졌으면 올스타 아닙니까. 아~ 너무 아쉽네요.”
이충재는 이 날 6이닝 4피안타 1실점, 빼어난 투구를 펼쳤다.
승리 투수가 되면서 시즌 성적은 3승 2패, 평균자책점은 3.16까지 하락, 경기가 끝난 후 세인트루이스 클럽하우스는 취재열기로 북적거렸다.
“이충재 선수, 오늘 맷 곤잘레스 선수와 약간 충돌이 일어났는데요. 곤잘레스 선수의 도발이 호투의 자극제로 작용한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절 자극한 건 따로 있으니까요.”
이충재는 기자들이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뒷배경을 공개했다.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벤치 클리어링에 뛰어든 이인영, 기자들 눈엔 당연히 이충재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니, 사방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인영 선수, 이충재 선수가 자기를 너무 어린애 취급 하는 것 같아서 서운하다는 말을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했겠습니까? 가끔은 이런 식으로 색다르게 자극을 줘야 선수들이 성장하는 겁니까.”
“그럼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었단 겁니까?”
“예, 고참에겐 어린 선수들의 성장을 끌어내야 하는 의무도 있습니다. 저는 제 역할에 충실할 뿐입니다.”
이렇게 이인영은 커리에어 또 다른 이야깃거리를 적어냈다.
믿거나 말거나 선택은 자유, 이후에도 후배의 성장을 끌어내기 위해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