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날 만족시켜 봐 (5)
‘설마 또 안타 치진 않겠지.’
‘이번엔 제발’
계속되는 시카고와의 시리즈, 홈팬들은 불안한 눈으로 경기를 지켜봤다.
이인영은 1차전에서 볼넷만 3개를 골라냈지만 2차전에서 4타수 4안타를 때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3차전, 이 날도 4타수 4안타를 기록하면서 8타석 연속 안타 행진, 하지만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8회 초 현재 스코어는 9대 8, 시카고의 리드, 시카고는 필승조 엘튼 리그를 올렸다.
‘어떻게 헛스윙 한 번 안 할 수가 있지? 내 기억이 틀린 게 아닌데’
시카고의 폴 휠러 감독은 지난 3일의 기억을 되짚어 봤다.
이인영은 12타석에서 9타수 8안타, 볼넷 3개를 기록, 57개의 공을 상대하는 동안 헛스윙 한 번 하지 않았다.
올 시즌 컨택률이 94%나 되는 선수이니 별로 놀랄 것도 없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악몽 그 자체, 컨택률 자체는 큰 의미가 없지만 득점권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득점권에선 컨택이 된다는 것 자체가 실점을 의미하기 때문, 엘튼 리그가 저 선수를 삼진으로 돌려세울 수 있을까. 시카고 팬들은 이번 승부에 눈을 떼지 못했다.
따악~!!
“Wow!!
“The man hit another hit!!”
타격이 되는 순간 몇 몇 팬들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이틀 동안 무려 9타수 9안타, 미국에서 ‘The man’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다. 최고 중의 최고의 사람에게만 붙는 수식어, 적이지만 너무 뛰어난 선수 아닌가.
시카고 팬덤은 꼬장꼬장한 편이라 다른 팀 선수에게 박수를 보내는 경우가 드물지만, 몇 몇 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이거 의외인데?’
이인영은 헬멧을 벗어 경의에 답례를 표했다.
시카고 원정은 필라델피아 시절에도 몇 번 다녀왔지만 박수를 받은 건 이번이 처음, 경기 후 인터뷰에서도 시카고 팬들의 호의에 감사를 표했다.
“시카고 팬들은 최고의 선수를 대우할 줄 아는 것 같습니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도 있는데, 매너 있는 팬은 구단의 품격을 더 높이는 법이죠. 시카고는 명문 구단으로 불릴 자격이 있습니다. 이곳 팬들의 품격에 찬사를 보냅니다. 올 시즌 제가 받은 최고의 환호였습니다.”
필라델피아 시절엔 쓰레기 팬들에게 어울리는 선수가 되느라 다소 경박하게 행동했지만 이제는 나이도 먹었고 되도록 품위 있게 행동하는 중, 이후에도 품위 있는 행동은 계속 됐다.
[우리도 최고의 선수를 대우할 줄 안다.]
[우리가 그동안 보낸 환호는 뭐였나?]
한편, 세인트루이스 팬들은 이인영의 발언에 서운함을 표했다.
그동안 많은 환호를 보내왔는데 왜 우리는 칭찬을 안 하는 건가. 세인트루이스도 다른 팀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매너를 갖춘 팀, 이인영은 홈팬들의 불만에 답변을 내놨다.
“저는 올 시즌 홈보다 원정에서 좋은 활약을 했습니다. 그러니 홈에서 환호를 받을 기회가 없었을 뿐이죠. 딱히 세인트루이스 팬들이 시카고보다 못하다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그냥 제 잘못이죠.”
이인영은 올 시즌 홈에서 타율 0.322, 3홈런, 12타점, 원정에서 0.396, 홈런 8개, 18타점을 올렸다.
확실히 차이가 나는 성적, 내가 홈에서 잘 했다면 팬들에게 더 많은 환호를 받지 않았을까. 다음에는 홈에서 환호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말로 팬들의 불만을 다독였다.
[우리는 환호를 보낼 준비가 돼 있다.]
[필요한 건 당신의 활약이다.]
샌디에이고와 시카고를 거쳐 홈으로 돌아온 세인트루이스, 홈팬들은 애증이 담긴 피켓을 흔들어 대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활약만 해주면 세상이 흔들릴 정도의 환호성을 보내줄 분위기, 선수는 이런 때 보람을 느끼는 거 아니겠나.
이인영은 어느 때보다 의욕을 끌어올렸다.
“자, 오늘 세인트루이스는 이충재 선수를 선발로 앞세웁니다. 올 시즌 14경기 출장, 그 중 선발 등판은 1경기였습니다. 올 시즌 승리 없이 1패 평균자책점 4.36, 22와 2/3이닝 동안 볼넷 10개, 탈삼진은 24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볼넷만 줄이면 괜찮을 것 같은데, 언제나 볼넷이 발목을 잡거든요. 오늘은 좀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길 바랍니다.”
팬들의 환호가 간절한 건 어린 선수도 마찬가지, 나는 언제 The man이라는 칭송을 들어보나.
잘 나가는 선배를 볼 때마다 더욱 간절해지는 활약, 94마일 빠른 볼로 힘차게 스타트를 끊었다.
이충재는 빠른 볼과 슬라이더를 앞세우는 단순한 스타일이라 제구와 구위 모두 받쳐줘야 하는 유형, 문제는 최근 스트라이크 존이 몸쪽에 박하다는 거다.
몸쪽 빠른 볼을 밀어넣어 범타를 이끌어내야 되는데 그게 안 된다는 건 파워피처에게 불리하지 않나.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건 변명에 불과했다.
몸 쪽 제구가 안 되니까 몸 쪽을 못 던지는 거 아닌가. 실제로 제구가 되는 투수들은 몸 쪽 승부를 잘만 하고 있다.
바뀐 스트라이크 존 때문에 몸 쪽을 못 던지는 건 조무래기 투수들이 하는 변명, 첫 타자를 몸 쪽 빠른 볼로 땅볼 처리했다.
“바깥쪽으로 떨어집니다!! 삼진!! 이충재 선수가 스캇 반다이크를 삼진 처리합니다!!”
“몸 쪽으로 던지고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 제구가 받쳐주니까 이런 투구가 가능한 거죠. 오늘은 느낌이 괜찮습니다.”
이충재는 다음 타자 폴 골드버그까지 내야 플라이로 처리하고 1회를 마쳤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환호, 이충재는 표정 없이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팬들의 진심 어린 환호는 이 정도가 아니지 않나,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메이저리그 3년 차에 접어들었으니 진짜 환호가 뭔지도 알고 있다.
이 정도 활약으로는 진심을 보여주지 않는 팬들, 차분하게 다음 이닝을 준비했다.
잭 브라이언트 - 테드 반디 – 이인영으로 이어지는 세인트루이스의 살인 타선 라인, 1회부터 그 진가가 발휘됐다.
[따악~!!]
“좌측으로 보낸 타구!! 중견수와 좌익수 사이에 떨어집니다!! 브라이언트 선수의 안타!! 17경기 연속 안타 행진은 계속됩니다!!”
“이인영 선수의 활약에 가려져서 그렇지 시카고 전에서 매서운 타격감을 보여줬거든요. 이 선수도 당분간 말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음 타자 테드 반디는 5구 만에 볼넷 출루, 이인영이 타석에 들어서자 홈 팬들은 보란 듯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못 치면 역적, 이인영은 피식 웃으며 타석에 들어섰다.
“자, 이인영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386, 홈런 11개, 30타점, 올해 한국 나이로 37세가 된 선수의 기록입니다.”
“말 그대로 철인이죠. 이 팀 저 팀 떠돌아다닐 나이에 메이저리그 수위 타자를 하고 있습니다. 다른 설명이 필요 없죠.”
애틀랜타 배터리는 고민에 빠졌다.
앞 선 원정에서 10타수 9안타를 때리고 온 타자,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말 그대로 행운을 빌어야 하는 상황, 바깥쪽을 찌르면서 간을 봤다.
“스트라이크!!”
생각보다 멀었는데 울리는 콜, 이런 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 이인영은 그러려니 넘어갔다.
초구를 넣고 조금 더 빼서 헛스윙이나 범타를 유도하는 게 최근 볼 배합, 그걸 역이용하는 배터리도 있지만 역전의 용사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날 상대로 정면 승부를 택할 투수가 몇 명이나 있겠나. 그럴 배짱이 있다면 환영하겠지만 도망친다면 비웃어 줄 뿐, 예상대로 2구는 바깥쪽으로 빠졌다.
몸쪽 승부를 피해준다면 노릴 곳은 하나 뿐, 그물을 쳐놓고 먹잇감이 뛰어들길 기다렸다.
따아악~!!
가볍게 밀어낸 타구, 펜스 앞에서 주춤거리던 좌익수는 막다른 길목에 섰다.
생각보다 멀리 날아오는 타구, 그 자리에서 있는 힘껏 뛰어올랐다.
공은 글러브에 들어 왔지만 펜스와 몸이 부딪치는 충격 때문에 다시 글러브 밖으로 나온 공, 선수들은 혼란에 휩싸였다.
“안 넘어갔어!! 뛰어!! 뛰어!!”
뒤늦게 상황 파악이 된 2루 주자 잭 브라이언트는 3루를 지나 홈으로 질주, 하지만 1루 주자 테드 반디는 2루에서 멈춰 섰다.
장타가 될 수 있는 타구였지만 애매한 상황이 겹치면서 주자들의 진로가 막힌 게 문제, 애매한 결과에 이인영은 쓴 웃음을 지었다.
홈에서는 될 일도 안 되는 타격, 다음 기회를 노렸다.
[딱~!]
“땅볼!! 2루수가 잡아서 1루에 송구, 아웃입니다!! 이충재 선수는 오늘 11타자를 연속 범타 처리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체인지업이 성과를 내고 있네요. 불펜으로 뛸 때는 보기 어려웠던 투구입니다.”
계속되는 경기, 선취점에 힘입은 이충재는 호투를 이어갔다.
강력한 포심과 슬라이더를 보유한 투수가 불펜으로 나와 굳이 체인지업을 던질까.
시즌 첫 선발 등판 이후 계속 불펜으로 투입된 이충재는 빠른 볼 – 슬라이더 조합을 앞세웠다. 하지만 투구 절약이 필요한 선발 투수에게 체인지업은 필수, 시범 경기에서 체인지업을 섞어주는 투구를 하긴 했지만 시즌 들어서는 제대로 써먹질 못했다.
시즌 첫 선발등판부터 비가 내리고 2시간이나 경기가 지연되는 등, 운도 따라주지 않았던 일정, 하지만 이날은 그동안의 서러움을 떨쳐내듯 효율적인 투구를 보여줬다.
세인트루이스 구단 관계자들도 깜짝 놀란 활약, 4~ 5이닝 정도를 생각했던 필립 험버 감독은 6회 말까지 불펜을 비웠다.
“다음 이닝은 힘을 다 써버리는 게 어때?”
“지금 불펜에 누가 있는데?”
공격이 진행되는 동안 이충재는 파트너와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다음 이닝이 내 마지막인가. 그렇다면 남은 힘을 쏟아내야겠지, 하지만 불펜은 지금도 비어있다.
감독의 결단에 걸린 투구, 이 때 투수코치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다음 이닝 때 남아 있는 힘 다 써버리라고”
“아직 불펜 비어 있잖아요?”
“이제 곧 채워질 거야.”
이충재는 아쉬움을 숨기지 않았다. 단언 컨데 오늘 투구는 커리어 사상 최고의 활약, 그 진격이 7회에 막히는 건가.
끝가지 가보고 싶었지만 바빠지기 시작한 불펜, 아껴뒀던 모든 힘을 7회 초에 쏟아냈다.
“크게 돌립니다!! 96마일!! 구위는 전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원래 세인트루이스에서 선발로 키우던 선수거든요. 7회에도 이 정도 공을 던질 수 있다는 건 선발투수로서 필요한 체력을 갖췄다는 뜻입니다.”
체인지업으로 맞춰 잡던 투구에서 갑자기 달라진 패턴,
애틀랜타 타자들도 빠른 볼이 들어온다는 건 알았지만 구위가 생각보다 좋아 중심에 맞추질 못했다.
계속 뒤로 밀리는 타이밍, 첫 타자가 땅볼로 물러나자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쏟아졌다.
‘그래, 내가 원했던 게 이런 거라고’
드디어 듣게 된 팬들의 진심 어린 환호성, 마이너리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무려 4년 5개월이 걸렸다.
가슴 한 편이 찡하게 울리는 느낌, 이런 환호를 들었으니 나도 유망주 딱지는 떼어낸 건가. 더 큰 환호를 듣기 위해 다음 승부에 집중했다.
“와아아~!!!!”
95마일 높은 빠른 볼로 헛스윙 삼진을 유도, 아까보다 더 큰 환호성이 날아들었다.
보는 눈만 없다면 펄쩍 뛰며 기뻐할 정도, 부모님도 이 장면을 보고 계실까. 이날이 오기까지 누구보다 많은 응원을 보낸 부모님이 떠올랐다.
‘엄마 – 아빠, 저 앞으로 더 잘 할 게요. 그러니까 지켜봐 주세요.’
한때 그 관심과 사랑을 부담스럽게 여겼지만 이제는 극복, 보란 듯이 마지막 타자를 처리하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7이닝 4피안타 무실점 투구, 팬들의 환호 덕분에 3년 동안 달고 있던 유망주 꼬리를 떼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