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날 만족시켜 봐 (3)
“그들은 내게 거짓말을 했다. 나는 배신당했다.”
4월 11일, 밀워키의 맷 곤잘레스는 세인트루이스를 상대로 공세를 퍼부었다.
작년까지 세인트루이스 소속이었던 맷 곤잘레스, 곤잘레스는 자신이 FA를 선언하기 전 구단에서 알아서 계약을 제시해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세인트루이스는 곤잘레스와 계약을 맺지 않고 이별, 이인영을 영입하는 길을 택했다.
돈이 없다며 거짓말을 하더니, 2억 5천만 달러는 어디서 난 건가. 맷 곤잘레스는 자신은 세인트루이스 선수로 남고 싶었지만 팀이 날 버렸다며 언론 플레이를 벌였다.
“그 친구는 뭔가 착각을 하고 있다. 어느 선수와 계약을 맺던 그건 구단이 판단할 일이고 곤잘레스는 우리 팀에 필요한 선수가 아니었다.”
세인트루이스 구단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구단에서 돈을 썼다면 나는 세인트루이스 선수로 남을 수도 있었다? 진짜 가치가 있는 선수는 구단이 알아서 데려가기 마련, 세인트루이스는 곤잘레스에게 그만한 성의를 표할 필요가 없었다고 선을 그었다.
[세인트루이스는 곤잘레스와 ‘계약을 맺지 않았다.’ 곤잘레스는 세인트루이스 선수가 ‘될 수 없었다’]
세인트루이스 여론도 곤잘레스의 헛소리를 조롱했다.
세인트루이스의 선수가 되지 못한 것과 되지 않은 것은 차이가 있는 개념이다. 곤잘레스는 세인트루이스 구단과 팬들이 원했던 선수인가?
곤잘레스가 떠날 때 아쉬움을 표한 팬들도 있었지만 구단이 이인영을 영입하자 아쉬움은 바로 환호로 바뀌었다.
선수가 그 팀에 더는 필요하지 않다면 떠나는 게 맞는 것, 선택을 받지 못했다고 구단을 비난하는 건 무슨 경우인가.
그래도 곤잘레스는 세인트루이스에 서운함을 표했다.
“제가 말실수를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딱히 누굴 콕 집어서 공격한 것도 아니고요. 다만 저는 이제 밀워키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곳에 있어서 행복하고 밀워키 구단에서 제시받은 계약에 만족합니다. 리(Lee)에게도 축하의 말을 전하고 싶군요. 세인트루이스는 가난한 구단이라 2억 5천만 달러나 되는 돈을 아무한테나 쓰진 않으니까요. 그런 구단으로부터 대형 계약을 받아냈다는 건 그가 그만큼 대단하다는 선수라는 걸 증명하는 거겠죠? 어쨌든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가만히 있었는데 갑자기 불똥이 튄 굴러온 돌,
이인영은 곤잘레스의 비아냥거림에 나름대로 입장을 표했다.
“곤잘레스와 세인트루이스 구단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저와 전혀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다만 절 선택해준 구단과 팬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상대가 무슨 헛소리를 하든 나는 세인트루이스 팬들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뜻, 실제로 이인영은 개막 후 10경기에서 타율 0.358, 홈런 1개, 9타점으로 나름 선전하고 있다.
홈런이 페이스가 약간 떨어져 있지만 나머지는 별 다른 문제도 없고, 시즌은 길지 않나.
내가 본 실력을 낼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우리는 네가 없어도 행복해, 새로운 사랑을 찾았으니까, 그러니까 너도 행복해 졌으면 좋겠어. 밀워키 같은 형편없는 도시도 사랑할 수 있게 됐다니 우리도 마음이 편해]
세인트루이스 팬들도 곤잘레스의 불만을 비아냥거렸다.
작년 시즌, 곤잘레스는 타율 0.241 - 홈런 21개 - 68타점에 그쳤다.
나쁘지 않은 타격이지만 문제는 곤잘레스가 하위 타자가 아니라 팀의 중심을 지켜주는 타자였다는 것, 2028년 35홈런을 치며 최고 점을 찍더니 그 이후 계속 장타력이 떨어졌다.
이런 선수에게 어떻게 장기계약을 제시하나. 어쨌든 너와 헤어져서 너무 다행이라는 세인트루이스 팬들의 반응에 곤잘레스는 발끈 했고, 언젠가는 갚아주겠다며 이를 갈았다.
‘이걸 어쩌지.’
그렇게 시간은 흘러 4월 27일, 세인트루이스의 필립 험버 감독은 선발투수를 두고 고민을 거듭했다.
원래대로라면 에이스 개릿 허드슨을 내보내야겠지만, 허드슨은 최근 3경기에서 13이닝 밖에 소화하질 못했다.
평균자책점은 3.46으로 나쁘지 않지만 투구 수가 너무 많았고 구속까지 떨어지는 수상한 기색을 보였다는 게 문제, 정밀 검사 결과 어깨에서 염증이 발견 됐고 당분간 경기에 뛰지 못하게 됐다.
대체 선발을 내보내야 하는 상황, 고민을 하다 이충재를 떠올렸다.
작년 시즌에도 팀이 어려울 때 가끔 선발로 나선 대체자원, 이렇게 이충재는 단장과 협의를 거쳐 시즌 첫 선발등판 기회를 잡았다.
‘나는 이 팀에 필요한 선수가 되고 싶다. 환호도 받고 싶어’
등판을 앞두고 이충재는 각오를 다잡았다.
이인영 선배의 말대로 나는 팬들로부터 진심이 담긴 박수를 받아봤는가.
세인트루이스는 적이라도 대기록을 세우면 환호를 보내주는 성숙된 응원문화를 보유한 도시, 이런 좋은 무대에서 팬들의 환호도 못 받아 보고 은퇴한다면 억울하지 않겠나.
어렵게 잡은 시즌 첫 번째 선발 등판 기회,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세인트루이스와 시카고의 올 시즌 첫 번째 맞대결을 생중계로 전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캐스터 이명한, 해설에는 박한우 – 임선우 위원께서 도움을 주시겠습니다. 임선우 위원님”
“예”
“이충재 선수가 올 시즌 많은 투구를 하진 못했는데요. 지난 4월 19일 피츠버그전 이후 일주일 동안 등판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선발로 낙점이 됐는데 오늘 경기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글쎄요. 시카고가 최근 9경기에서 평균 6점 이상의 막강한 공격력을 과시하고 있거든요. 이충재 선수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허드슨 선수가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세인트루이스 입장에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겠죠.”
나쁘게 말하면 구멍 때우기 선발 등판, 하지만 그게 현재 이충재의 팀 내 입지라고 할 수 있다.
작년 시즌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3점대 중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불펜이 얼마나 오랫동안 입지를 지킬 수 있겠나.
기회를 살리는 건 본인의 능력,
어린 나이에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쟁쟁한 선수들과 경쟁을 벌인 옛 기억이 떠올랐는지 임선우 위원은 이충재의 투구를 남의 일처럼 여기지 않았다.
“자, 경기 시작됐습니다. 시카고의 1회 초 공격, 잭 데이비스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258, 홈런 2개, 5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가 살짝 오는 것 같은데요. 경기 진행에는 큰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빗방울이 흩날리는 약간 쌀쌀한 날씨, 예고 없는 추위에 잭 데이비스는 입김을 손에 불어 넣었다.
반면 경기 전 불펜 투구를 60개나 한 이충재는 추위를 느끼지 못했고, 초구부터 강속구를 뿌려댔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반응이 늦은 배트, 기세를 탄 이충재는 빠른 볼 2개로 첫 타자를 땅볼 처리했다.
‘좋아, 오늘은 느낌이 좋다고’
기분 좋게 시작하는 투구, 하지만 두 번 째 타자를 잡아내고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진행이 어렵다고 판단한 주심이 중단을 선언하면서 양 팀 선수들은 더그아웃으로 철수, 3시부터 내린 비는 4시 30분이 될 때까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불펜 투구도 평소보다 훨씬 많이 하며 몸을 풀어뒀는데 이대로 하루가 끝나는 건가.
활약이 간절한 루키와 달리, 시카고 선발 맷 도리스는 감독에게 오늘 경기는 등판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루 쉰다고 내 입지는 달라지지 않아.’
도리스는 작년 시즌 15승 11패, 평균자책점 2.97을 기록한 시카고의 에이스, 올 시즌도 3승 무패 - 평균자책점 2.00으로 순항 중이다.
언제 재개될지 모르는 경기를 위해 내가 불펜에서 몸을 풀어야 하나? 시카고의 루터 해크만 감독도 도리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충재는 마지막까지 경기가 재개되길 기다렸고, 오후 5시 23분 비가 그치자 마운드로 향했다.
‘별로 좋지 않은데’
이인영은 그런 후배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봤다.
타자는 쉬었다가 바로 경기에 나서도 큰 영향이 없지만 투수는 그렇지 않다. 시카고의 선발 도리스는 오늘 등판을 취소했겠지, 하지만 선발 구멍을 채워야 하는 이충재는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이다.
1회 구위는 괜찮았는데 날씨가 발목을 잡을 줄이야. 불길한 예감은 빗겨가질 않았다.
“아~ 다시 빠졌다는 판정인데요. 이충재 선수가 연속 볼넷을 허용합니다.”
“영향이 없을 수가 없죠. 제가 감독이라면 등판을 말렸을 텐데 … 하긴 제가 저 입장이라도 내려가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충재는 2사 주자 1 – 2루에서 페르난도 레돈에게 2루타를 얻어맞았다.
다음 타자를 범타로 처리하며 1회를 마무리했지만 투구 수는 무려 23개, 2회에는 삼자 범퇴로 막아내며 페이스를 찾는 듯 했지만 3회 들어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딱~!
선두 타자 잭 데이비스가 기습 번트를 시도, 전혀 대비가 안 됐던 이충재는 밸런스를 잃어버렸다.
비가 내린 뒤라 더욱 미끄러운 그라운드, 3루수 토니 파커스가 뒤늦게 뛰어 들었지만 송구 실책까지 이어지면서 무사 주자 3루가 됐다.
잭 데이비스의 번트 안타를 시작으로 연속 3안타가 나오면서 1실점 추가, 여기에 4번 로니 콜먼의 만루 홈런이 터지면서 스코어는 6대 0으로 벌어졌다.
말 그대로 길바닥에 내쳐진 개구리 신세, 이충재는 감독이 내민 손에 공을 넘겨야 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 그래도 누군가는 치워야 하지 않겠나.
패색이 짙어진 경기지만 마운드를 넘겨받은 클레이 로슨은 나머지 타자들을 처리하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이어지는 세인트루이스의 3회 말 공격, 타석에 들어선 이인영은 초구를 힘껏 잡아당겼다.
우중간을 가르는 장타 코스, 1루를 통과한 이인영은 이 정도면 3루까지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멈춰!! 멈춰!!”
코치가 말렸지만 2루를 지나 3루까지 질주, 세이프 판정을 받아낸 이인영은 몸에 묻은 진흙을 털어냈다.
비가 오는 날씨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세인트루이스 팬들은 환호를 보냈고, 이인영은 다음 타자의 희생플라이에 홈을 밟았다.
오늘 세인트루이스가 올린 유일한 득점, 경기가 끝난 후 이인영은 기자들의 질문에 둘러싸였다.
“작년 시즌 발목 부상으로 고생을 하셨는데, 너무 무리하신 것 아닙니까?”
“저는 한국과 미국에서 네 번 우승을 경험했고, 1700게임이 넘는 경기를 출장했습니다. 화려한 커리어를 쌓고 있지만 왜 그때 더 열심히 뛰지 못했을까라는 후회가 되는 경기가 있습니다. 제가 오늘 2루에서 멈췄다면 집에서 마음 편히 잘 수 있었을까요? 후회를 남길 바엔 부상을 입고 은퇴하는 게 낫습니다.”
질문을 던진 기자는 입을 다물었다.
이런 각오로 경기를 하니까 성공할 수 있는 거겠지, 부상이 염려되지 않았냐는 질문을 던진 자신을 되돌아 봤다.
바통을 이어 받은 건 필립 험버 감독, 기자들의 공세에 험버 감독은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허드슨의 부상은 얼마나 심각한 겁니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당분간 등판은 어렵다고 봐야겠죠.”
“그럼 다음 경기에도 그 어린 친구가 허드슨의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겁니까?”
패배의 책임을 이충재로 몰고 가려는 기자, 험버 감독은 자기 얼굴의 침 뱉기는 하지 않았다.
“저도 교체를 생각했지만, 그 친구는 퇴로를 스스로 끊어버렸습니다. 오늘 패배는 저도 아쉽지만, 도망칠 수 없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선수를 책망하진 않을 겁니다.”
팀과 자신을 위해서라도 끝까지 마운드에 남을 수밖에 없었던 어린 선수,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지겠나.
그 입장을 알고 있는 험버 감독은 변함 없는 신뢰를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