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날 만족시켜 봐 (2)
“이충재 선수, 오늘 경기 활약에 만족하십니까?”
“그럭저럭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해가 바뀐 2월 23일, 팀 청백전 경기 등판을 마친 이충재는 한국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이제 메이저리그 경력 3년 차에 접어든 유망주, 작년 시즌에는 45경기에 등판해 5승 3패 평균자책점 3.45를 기록했다.
선발 등판은 3경기 밖에 치르지 못 했지만 불펜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며 가능성을 인정받은 몸, 올해는 세인트루이스 현지에서도 5선발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은 선수로 지목 받았다.
오늘 경기 성적은 1이닝 투구, 1K 무실점, 평균 구속은 93마일 정도에 그쳤지만 볼넷을 허용한 뒤 다음 타자를 삼진 처리하는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줬다.
빠른 볼 – 슬라이더라는 단조로운 피칭에서 벗어나 기습적으로 던진 체인지업이 효과를 본 것도 좋은 신호, 다만 빠른 볼 구위가 생각보다 안 나오면서 투구 수가 늘어난 건 아쉬운 평가를 받았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았던 활약, 인터뷰가 길어지면서 화제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인영 선수와 올해 같은 유니폼을 입게 됐는데 서로 대화는 많이 나누셨나요?”
“글쎄요. 아직 별 다른 얘기는 못 나눈 것 같네요.”
“먼저 말을 걸어주거나 그런 건 없나요?”
“예.”
같은 한국 선수인데 대화도 하면 좋은 거 아닌가.
하지만 이인영은 상대가 한국 선수라고 특별히 신경을 기울이진 않았다.
2년 전 까지만 해도 이충재는 공만 빠르지 구위나 제구가 좋은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불펜이냐 선발이냐가 문제일 뿐, 메이저리거로서 자기 앞가림은 할 줄 아는 선수가 됐다.
그런데 내가 무슨 관심을 주겠나.
각자가 제자리에서 할 일만 하면 참견할 이유도 없겠지,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자기 일에만 집중했다.
경기가 끝나면 가족들이 머물고 있는 펜션으로 퇴근, 다음날 다시 경기장으로 출근하는 날이 반복됐다.
‘더 뛰어난 선수가 선발을 차지할 뿐’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도 이충재가 5선발을 차지할 거란 예언은 하지 않았다. 5선발은 노장 선수와 유망주가 경쟁을 하는 자리, 누가 이기든 실력이 있는 선수가 차지할 뿐이다.
다만 팀이 하락세에 접어든 노장보다 유망주를 우대하기 때문에 이충재가 최후의 승자가 될 가능성이 높을 뿐, 섵부른 판단은 보류했다.
[이충재 경쟁자 매디슨 맥켈러, 시범경기에서 5이닝 무실점 호투]
[5선발 경쟁 불 붙였다.]
시나리오는 예정대로 흘러갔다.
매디슨 맥켈러는 세인트루이스 – 피츠버그 – 샌디에이고 그리고 올해 다시 세인트루이스로 돌아온 역전의 용사,
통산 성적은 87승 79패, 평균자책점 4.24로 평범하다.
작년 시즌 성적은 11승 13패 평균자책점 3.71, 그런데 후반기 성적이 엄청났다. 후반기만 따지면 6승 6패 평균자책점 2.95, 커브 비율을 20% 정도 늘리면서 탈삼진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평균 빠른 볼 구속은 91마일 정도지만 우타자 기준으로 몸쪽으로 꺾여 들어가는 커브는 말 그대로 일품, 커브 기량이 만개하면서 빠른 볼 – 슬라이더가 전체 투구의 70%를 넘기던 피칭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이충재가 매디슨 맥켈러를 넘어서고 5선발을 차지할 수 있을까? 노장의 선전에 세인트루이스 관계자들의 고민도 깊어졌다.
“매디슨은 불펜으로 활용할 수 있는 선수가 아닙니다. 일단 매디슨을 5선발로 돌리고 어린애(이충재)는 불펜으로 돌리죠.”
“하지만 처음부터 선발 기회를 박탈하면 의욕을 꺾을 수가 있습니다. 일단 기회를 주고 상황을 살펴보죠.”
“그래야겠군.”
개막전을 2주 앞두고 세인트루이스는 이충재를 선발로 앞세웠다.
이제부터는 연습 같은 실전, 약간 긴장이 됐는지 이충재는 부모님에게 다음 등판은 오지 말라며 일방 통보를 날렸다.
[그렇게 중요한 경기인데 오지 말라고?]
“솔직히 엄마 아빠가 지켜보면 부담이 돼요.”
운동선수도 소중한 사람 앞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문제는 의욕이 앞서다 보니 자기 실력이 안 나온다는 것, 부모님이 지켜보는 앞에서 잘 던지면 얼마나 좋겠나. 하지만 태생이 민감한 성격이라 그게 잘 안 되는 편, 부모님은 아들의 입장을 이해했지만 내심 서운해 했다.
‘긴장을 했나, 왜 이러지?’
그렇게 부모님까지 밀어내고 치른 등판, 하지만 이충재의 공은 1회부터 갈 길을 잃고 방황했다.
최고 구속은 96마일까지 나왔지만 제구가 안 되다 보니 슬라이더 – 커브 비율만 높아졌다.
“음~ 다시 빠집니다. 카운트는 쓰리 볼 원 스트라이크”
“이번 이닝 들어 19개를 던지고 있는데 빠른 볼은 7개 밖에 안 됩니다. 그 다음이 슬라이더 9개, 커브 3개거든요. 이충재 선수가 이번 시범경기에서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슬라이더로 많은 범타를 이끌어 내긴 했는데, 역시 빠른 볼 제구가 받쳐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요.”
데뷔 시즌부터 발목을 잡았던 빠른 볼 제구, 작년 시즌에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러는 걸까.
결국 이충재는 5선발로 향하는 직선코스를 자기 발로 차버렸다.
3이닝 동안 투구 수는 52개, 삼진 3개를 잡았지만 볼넷도 3개를 내줬다. 시범경기에서 볼넷 하나 없이 평균자책점 1.05를 기록한 맥켈러와는 완전 딴판, 이렇게 세인트루이스의 5선발 자리는 암묵적으로 맥켈러에게 넘어갔다.
본인도 그렇지만 지금까지 날 응원해 줬던 부모님 – 팬들에게도 면목이 없는 결과, 이충재는 마음 속으로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생 많았다.”
“예.”
그리고 며칠 후, 이인영은 이충재를 가족이 머무는 펜션으로 불렀다.
지금까지 내게 별다른 말도 걸어주지 않았던 선배가 집으로 초대를 해주다니, 당황했지만 거절하진 못했다.
좋은 음식과 약간의 술이 곁들여지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었고, 이인영은 그동안 마음에 담아뒀던 말을 하나씩 풀어냈다.
“너는 주위에서 관심을 주는 게 불편하냐?”
“네?”
“아니, 내가 그동안 널 지켜봤는데 약간 그런 게 있는 것 같다.”
잘 풀리던 일이 꼬여버리면 집중을 못하거나, 누군가가 날 지켜보고 있다는 걸 의식한다면 예민한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런 성격 문제 때문에 뉴욕이나 보스턴처럼 팬들의 관심이 쏟아지는 팀에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선수들도 제법 있다.
세인트루이스는 뉴욕이나 보스턴처럼 극성맞은 팬들이 많은 건 아니지만 야구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 이번 시범경기에서도 많은 팬들이 애리조나 캠프를 찾았다.
그런데 그걸 부담스럽게 여긴다? 이인영은 훈수보다는 몇 가지 사례를 앞세웠다.
“슈퍼스타들이 은퇴하면 가장 힘들어하는 게 뭔지 아냐?”
“뭔데요?”
“팬들의 환호를 못 듣는 거. 은퇴하면 듣기가 어렵잖아.”
은퇴를 한 몸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아나.
하지만 이인영은 박한우 위원이나 아버지, 그리고 인연을 맺은 수많은 스타들을 통해 은퇴 후의 삶을 엿 볼 기회가 많았다.
“뭐? 팬들이 너무 시끄럽게 굴어서 경기에 집중을 못해? 웃기는 소리지!! 팬들의 환호를 부담스럽게 여긴다면 사랑받을 자격도 없는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당연한 거 아니냐? 딱히 운동선수뿐만 아니라 사람은 주위의 관심을 받으며 크는 거야.”
박한우 위원은 애재자 앞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랑을 받아 본 선수는 팬들의 환호가 얼마나 소중한지 안다. 그래서 더 많은 환호를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 하지만 같은 팀의 홈런 타자 한승규 때문에 박한우 위원은 언제나 팀 내에서 2인자로 머물렀다.
그 벽을 넘기 위해 언제나 팬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최선을 다한 선수 생활, 하지만 은퇴 후 다시는 그런 환호를 들어보지 못했다.
내 생애 가장 빛났던 순간은 언제인가?
박한우 위원은 팬들의 환호를 받았던 그 시절이 내 전성기였다는 말을 애제자에게 남겼다.
“사인 요청을 거부해? 팬들의 환호가 부담스러워? 진짜 사랑도 못 받아 본 놈들이 지껄이는 허세지. 그런 놈들이 경기장에서 제대로 활약을 할 것 같냐?”
“아니죠.”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다. 진짜 사랑을 받아 본 선수는 그게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 그 맛도 못 본 놈들이 부담스럽다 뭐다 지껄여 대면 솔직히 가소로워. 나는 그런 놈들 선수 취급도 안 한다. 진짜 인기 맛도 못 본 어린애이지.”
다소 과격하긴 했지만 일리가 있었던 말, 생각해보면 이인영은 그 때부터 팬들의 환호와 관심을 소중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팬들의 관심과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 고액연봉을 받는 입장이 돼도 그런 마음가짐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젊은 친구는 주위에서 주는 관심을 부담스럽게 생각한다니, 팬들이 주는 인기와 사랑을 제대로 맛 본 적은 있는 걸까.
아니면 그럴 기회가 없었을지도 모르지, 이인영은 그걸 깨달아야 진짜 거물이 될 수 있다는 충고를 던졌다.
“어쩌면 너는 그런 사랑을 받아 볼 기회가 없었을지도 몰라, 앞으로 어떤 상황에서든 최선을 다해 봐. 그리고 팬들의 함성에 귀를 기울여 보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을 날도 올 거다.”
선배의 충고에 이충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3년 전, 세인트루이스는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지만 나는 그 영광스러운 무대에 끼지 못했다.
재능은 인정받았지만 아직 미숙하다는 구단의 판단 때문, 결국 팬들의 환호성을 들을 기회도 없었다.
누군가가 주는 관심이나 사랑보다는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주위를 살펴보는 여유를 잃어버린 건 아닐까.
다른 사람은 다 욕해도 언제나 날 응원해 줬던 부모님, 그 관심마저 부담스러워 하는 신세가 됐으니,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예민해진 건가.
원래는 이렇지 않았는데,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4월 1일, 세인트루이스는 홈에서 개막전을 맞이했다.
이날 누구보다 많은 환호를 받은 선수는 이인영, 압도적인 환영과 박수갈채에 손을 흔드는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나는 저런 환호를 받아본 적이 없지.’
이충재는 그런 선배를 먼 곳에서 바라봤다.
세인트루이스 유니폼을 입고 안타 하나 못 친 선수가 저런 환대를 받을 수 있을까.
작년 시즌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45경기를 뛴 나도 저런 환대를 못 받았는데 뭔가 부조리한 기분, 하지만 내가 그만큼 팬들에게 인상적인 활약을 하지 못했다는 증거 아니겠나.
반면 이인영은 메이저리그에서 9년 동안 확실한 성과를 낸 선수, 팬들이 보내는 환호와 사랑이 각별한 건 당연했다.
‘잘못하면 밀려나겠는데, 정신 차리자.’
세인트루이스의 간판스타 테드 반디도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지난 8년 동안 세인트루이스 팬들의 압도적인 사랑을 받았는데 그 관심이 저쪽으로 쏠린 기분, 거기다 지난 8년 동안 2번의 월드시리즈에서 모두 준우승에 그쳤으니 테드 반디도 팬들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이 팀을 우승시키는 건 나야. 저 녀석이 아니라고.’
이인영이 합세하면서 단숨에 우승권으로 뛰어오른 세인트루이스,
하지만 테드 반디는 저 선수가 아닌 내가 팀을 우승을 시키겠다는 결심을 세웠다.
오랫동안 팬들의 사랑을 받은 만큼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입지, 굴러들어온 돌에게 간판스타 자리를 내주긴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