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276화 (276/309)

276화. 날 만족시켜 봐 (1)

‘많이 늦네.’

이곳은 대구의 한 집, 혜진 씨는 귀가가 늦은 남편을 기다렸다.

다음 시즌을 대비해 몸을 만들어야 하는 남편의 입장은 이해했지만 그래도 여유가 있을 때는 가족에게 좀 더 신경을 써줬으면 하는 마음, 내가 너무 이기적으로 생각하는 건가.

어쨌든 이 시간까지 전화를 안 한 건 남편 잘못, 약간 비뚤어지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왔다.’

마침 현관 쪽에서 들려오는 인기척,

자리에서 일어난 혜진 씨는 안방으로 급히 몸을 숨겼다. 거실에 나와 있으면 내가 남편을 기다린 것처럼 보이지 않겠나.

당신이 늦든 말든 난 관심 없었다는 항의의 뜻을 최대한 드러냈다.

‘역시나 … ’

거실에 들어선 이인영은 아내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 봤다. 한 공간에서 생활한 게 벌써 몇 년인가. 원래는 7시 정도에 들어올 생각이었는데 함께 훈련하는 후배와 야구를 논의를 하다 보니 시간이 너무 흘러버렸다.

이제 와서 전화를 해봤자 무의미,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시도했다.

“내가 전화도 없이 늦어서 서운했어?”

“알면서 왜 전화를 안 해?”

“이미 늦었잖아. 그래서 직접 출석해서 해명하려고 했지”

혜진 씨는 입을 비쭉 내밀었다. 무슨 경찰 출두도 아니고 출석해서 해명을 한다는 건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서운함이 하나 둘 새어나왔다.

“자기는 집보다 밖에 있는 게 더 좋아?”

“갑자기 그건 왜?”

“아니 … 오프 시즌에는 가족이랑 조금 더 오래 있을 수 있잖아.”

“나 참,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노력하는 건데.”

이인영도 나름대로 해명에 나섰다.

남편이 밖에서 대접도 못 받고 여기저기 치이고 다니면 아내도 마음이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밖에서 대접받는 사람이 돼야 안에서도 당당해질 수 있는 법, 이인영은 그동안 가슴에 담아두고 있던 말을 꺼냈다.

“나는 당신한테 멋진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 그래서 계속 노력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발전한 거야.”

“정말 그런 생각을 했어?”

“그럼, 내가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노력을 하겠어?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이런 생각을 했어. 아, 이 사람은 멋진 사람이니까 나도 그에 어울리는 사람이 돼야겠구나. 그래서 지금까지 노력하는 거야. 당신하고 결혼 안 했으면 이렇게까지 노력도 안 했을 걸?”

당황한 혜진 씨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러고 보니 이건 내가 남편에게 프로포즈를 받았을 때 들었던 말 아닌가. 당신은 멋진 사람이니까 나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 여느 값진 반지보다 마음에 콱 박혔던 말이다.

그런데 그걸 잠시 잊고 있었다니, 남편이 누굴 위해 악착같이 운동하고 기량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하겠나. 잠시나마 서운한 마음을 품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왜 얼굴을 돌려?”

“아니야.”

“왜? 혹시 감동 받았어?”

“아니라니까.”

“에이~ 그냥 다시 반했다고 말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이인영은 아내를 쥐고 흔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는 사람, 프러포즈 할 때 써먹은 말이 이렇게 멋지게 효과를 발휘할 줄이야. 내친 김에 일을 더 크게 저질렀다.

“우리 결혼식 한 번 더 할까?”

“무슨 결혼식을 또 해?”

“아까 내가 한 말 프로포즈 할 때 했던 말이잖아. 우리의 영원히 변치 않을 사랑을 한 번 더 기념하자고”

“됐거든요? 밥 해 놨으니까 얼른 저녁이나 드세요.”

“기왕이면 서방님 식사하세요~ 이렇게 애교 좀 부려 봐.”

남편의 장난에 완전히 말린 혜진 씨는 서둘러 주방으로 도망쳤다.

장난치고는 제법 진지했던 분위기, 어쨌든 위기를 무사히 넘긴 이인영은 오늘도 가정의 평화를 지켰다.

‘그건 그렇고 나도 자극이 좀 필요한데’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 이어진 잡념, 평생을 약속한 사이라도 가끔 이렇게 자극이 되는 일이 있어야 사랑이 계속되는 거다.

그렇다면 나와 구단의 관계는 어떤가.

뉴욕 구단은 FA 시장에 나온 이인영에게 무려 10년 6억 달러의 대형 계약을 제시했다. 프러포즈를 할 때 반지는 얇아도 알은 커야 한다는 원칙을 지킨 것, 덕분에 별 문제 없이 3년 동안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충분한 건가. 뉴욕은 지금도 날 간절하게 원하고 있는 건가?

결혼까지 했는데 굳이 사랑을 증명 받아야 속이 시원하냐고 물을 사람도 있겠지만, 이인영은 그걸 바랐다.

‘그래, 해 버리자. 날 간절히 원하는 구단에게 다시 청혼 받는 거야.’

12월 10일, 이인영은 옵트 아웃을 실행해버렸다.

작년 시즌 부상을 당해 109경기 밖에 출장하지 못한 선수가 옵트 아웃을 실행하다니, 거기다 이인영은 내년 시즌 미국 나이로 35살이 되는 노장이다.

뉴욕과 7년 4억 2천만 달러가 남아 있는데도 옵트 아웃을 발동하다니, 제정신인가. 쏟아지는 취재요청에 메일로 답을 대신했다.

[평생을 약속한 사이라도 자극이 필요한 법이다. 난 뉴욕 구단이 정말 날 원하고 있는지 증명 받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프러포즈를 할 때 반지는 얇아도 알은 커야 한다는 원칙도 지켜줬으면 좋겠다.]

기사를 접한 플레어티 단장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단장 경력 8년에 접어들었지만 이런 선수는 처음, 프러포즈를 다시 받고 싶다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 문제는 반지 알, 6천만 달러에서 더 늘어나야 된다는 건데 이건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미인은 미인데 요구조건이 까다로운 상대, 어쨌든 옵트 아웃을 실행한 이인영은 다른 구단과 모두 협상할 수 있는 입장에 섰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냐?]

[프러포즈하다 집안 살림 거덜나겠다.]

뉴욕팬들은 아연실색했다.

연봉 6천만 달러도 어지간한 고액 연봉자의 2배에 근접하는 수치, 그런데 그것보다 더 많은 액수를 요구한다니 너무 이기적인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응, 그런 거였군.’

이인영은 팬들의 반응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건 뉴욕 구단과 팬들이 날 진심으로 원한다는 증표다. 그리고 내가 언제 반지 알이 6천만 달러보다 더 커져야 한다는 말을 했나.

그저 반지 알이 컸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뿐, 내가 뉴욕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납득 시켜주면 반지 알 크기는 합의를 봐 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반응이라니, 팬들은 그렇다고 쳐도 구단의 반응에 기대를 걸었다.

‘잠시 뭔가 착각한 거겠지.’

‘조금만 버티면 돌아올 거야.’

뉴욕 구단은 별 다른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옵트 아웃을 실행했다가 아차하고 고개를 숙이는 선수들도 있지 않나. 연봉 6천만 달러를 주는데 도대체 왜 옵트 아웃을 실행한 건지, 뭣보다 그만한 돈을 줄 수 있는 구단은 뉴욕뿐이다.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한 선수, 다음 시즌 캡틴으로 추대할 생각도 있었지만 너무 오냐오냐 하는 것도 아니라고 판단했다.

* * *

“화제성과 실력은 확실한 선수입니다.”

“테드 반디와 함께 타선을 이루면 팬들을 더 끌어 모을 수 있겠죠.”

“문제는 반지알 아닙니까? 그 선수를 우리가 어떻게 만족 시키겠습니까?”

이곳은 세인트루이스 구단 사무실, 세인트루이스는 21세기 들어 4번이나 우승을 차지한 강팀이다.

하지만 최근 15년 동안 쓴맛을 봤다는 게 문제, 7년 전 – 3년 전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지만 필라델피아와 뉴욕에 막혔다.

공교롭게도 그 앞을 가로막은 선수는 이인영, 그 천적이 지금 옵트 아웃을 실행하고 FA 시장에 나왔다.

잡는다면 대박이지만 실행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장기계약은 몰라도 단기계약이라면 가능하겠지, 구단주 조셉 브라운은 영입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일단 5년 2억 5천만 달러 제시해보게.”

“실행가능성이 별로 없습니다.”

구단주의 제안에 단장은 고개를 저였다.

7년 4억 2천만 달러 계약을 걷어차고 나온 선수에게 5년 2억 5천만 달러라니, 이게 말이 되는 짓인가.

프러포즈 했다가 따귀나 안 맞으면 다행, 하지만 조셉 브라운은 목소리를 높였다.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 자네가 어떻게 알아? 자네가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내가 직접 하겠네.”

브라운은 이인영의 전속 매니저 제프 메츠와 접촉했다.

이번 사건은 에이전트 입장에서도 어이가 없긴 마찬가지, 제프 메츠는 우리 고객님은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일은 벌어졌으니까 자네도 수습은 해야 할 거 아닌가.”

“뭐 … 그렇지요.”

“나는 자네 고객을 정말 간절하게 원하네. 자네 고객 때문에 뺨 맞은 아픔이 있으니까.”

월드시리즈 우승을 앞두고 2번이나 고꾸라진 세인트루이스, 적을 이길 수 없다면 내 편으로 끌어들여야 하지 않겠나.

마침 세인트루이스는 내셔널리그 최강의 타자 테드 반디를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이인영까지 가세한다면 무서울 게 뭐가 있겠나.

오프 시즌 동안 전력 유지를 위해 재계약에 많은 돈을 투자한 세인트루이스, 그래도 없는 살림에서 최대한 돈을 긁어모았다.

“자네 고객이 만족할지 모르겠지만 받아줬으면 좋겠네.”

“그런 말씀 해봤자 소용없습니다. 허락을 하고 마는 건 제 고객의 뜻에 달려 있으니까요.”

제프 메츠는 세인트루이스의 성의가 담긴 계약을 고객에게 전송했다.

걷어찬 계약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 하지만 없는 살림에 이 정도 긁어모은 건 성의가 대단한 거 아닌가.

이인영은 만족한 반응을 보였다.

“자기야, 정말 이렇게 해야겠어?”

“자기도 나한테 프러포즈 2번 받아서 좋았잖아? 나도 마찬가지야. 날 정말 필요로 하는 구단에서 뛰고 싶다고, 이건 내 가치를 인정받는 작업이야. 절대 양보 못해.”

혜진 씨는 남편의 말에 혀를 내둘렀다.

혹시 남편은 욕구 불만이 있는 건가. 내가 애정을 덜 줘서 이런 짓을 벌이는 건 아닌지, 하지만 이인영은 그런 문제가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운동선수는 나이 먹으면 이리저리 치이면서 비참한 말년을 보내잖아, 난 그런 식으로 커리어를 마무리하고 싶지 않아. 마지막까지 구단과 팬들에게 필요한 선수로 대접받고 싶다고.”

이인영은 바로 브라운 단장에게 답장을 보냈다.

당신이 날 필요로 하는 건 이해했지만 팬들은 어떤 생각일까. 구단이 원해도 팬들이 거부한다면 가지 않을 생각, 브라운 단장은 바로 이 내용을 여론에 내보냈다.

야구를 종교처럼 떠받드는 세인트루이스는 말 그대로 발칵 뒤집혔고, 강림하여주신다면 영광이라는 반응이 쏟아져 나왔다.

이게 바로 내가 원했던 반응, 이인영은 정식으로 계약을 맺기 위해 세인트루이스로 향했다.

“2년 뒤에 옵트 아웃 실행할 수 있도록 해주십쇼.”

“이유가 있습니까?”

“사랑을 재확인받기 위해서입니다.”

브라운 구단주는 상대의 요구에 폭소를 터뜨렸다. 우리는 2년 뒤에도 이 선수에게 아이 러브 유를 연발해야 하는 입장인가.

그까짓 거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며 옵트 아웃 조항을 승인했다.

[이인영, 세인트루이스와 5년 2억 5천만 달러 계약]

[게임에서만 가능했던 최강 타선이 현실화 됐다]

세인트루이스는 열광했지만 뒤통수를 맞은 뉴욕은 어안이 벙벙, 비난이 빗발쳤지만 이인영은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뉴욕은 우승을 위해 절 영입했죠. 저는 그 요구를 만족시켜줬고, 그 시점에서 우리의 계약은 끝난 겁니다. 그래도 저는 뉴욕에서 계속 뛸 마음이 있었고, 구단과 팬들이 절 진심으로 원하는지 확인받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뉴욕은 이를 거부했죠. 그럼 인연도 끝난 겁니다. 더 이상의 설명은 의미가 없을 것 같네요. 뉴욕에 행운이 있길 바랍니다.”

이렇게 세인트루이스로 떠나 버린 뉴욕의 슈퍼스타, 정말 그 선수가 원했던 건 날 필요로 하는 팬들과 구단의 성의였던 건가.

기다리면 알아서 포기할 거라는 안일한 생각이 불러온 비극, 하지만 후회해 봤자 떠나버린 인연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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