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최악의 시즌 (7)
“내가 깨야 할 건 찰리 데이의 기록이다. 데릴 와트의 기록은 추존의 뜻으로 남겨두고 싶다.”
시즌 종료를 앞둔 9월 20일, 미네소타의 간판스타 로니 레만스키의 인터뷰는 미국 여론을 뒤흔들어 놨다.
메이저리그 역대 한 시즌 최다 안타 기록 보유자는 데릴 와트, 데릴 와트는 지난 1966년 258안타를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신기록을 수립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찰리 데이의 기록(1911년 254안타), 문제는 신기록 달성이 유력한 레만스키가 이 문제를 인종차별 문제로 몰고 갔다는 거다.
“찰리 데이가 뛰던 시절엔 흑인이 메이저리그에서 뛸 수 없었다. 운동 능력이 뛰어난 흑인들을 배제한 시절의 기록이라 인정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찰리데이의 업적은 반쪽짜리 기록이며, 내가 역대 3위로 밀어내 버리겠다.”
방심하면 기어 나오는 인종차별 소동, 얼마 전 경찰의 지시에 불응한 흑인이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곳곳에서 인종차별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
레만스키의 발언은 그 소동에 기름을 들이부었고, 백인들은 너 따위는 메이저리그 역사에 이름을 올릴 자격이 없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이런 놈에게 MVP가 수상되는 건 말도 안 된다.”
“나는 레만스키에게 표를 던지지 않겠다. 그는 인종차별을 들먹이며 백인을 역차별 하고 있다.”
레만스키를 유력한 MVP 후보에 올렸던 기자들도 돌아섰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텐데 괜히 입방아를 찢어 표를 깎아 먹은 어리석은 행동, 덕분에 그동안 뒤로 밀려 있던 후보들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규정타석만 채운다면 MVP 수상 가능하다.]
뉴욕 여론은 이인영의 MVP 수상을 조심스럽게 점쳤다.
현재 이인영은 99경기 출장, 타율 0.339 - 홈런 27개 - 87타점을 기록하고 있다.
남은 게임을 고려하면 최종 성적은 31홈런 – 96타점, 규정타석과 30홈런, 100타점을 채우면 누적 스탯에서 레만스키에 그렇게 뒤지진 않는다.
뭣보다 레만스키가 알아서 표를 깎아먹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 탓에 MVP 수상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 상황, 다른 쟁쟁한 후보자들도 있지만 뉴욕 여론은 이인영의 통산 5번 째 MVP 수상을 부정하지 않았다.
‘에이~ 그래도 안 되겠지.’
‘표는 받을 수도 있겠지만, 수상은 무리야.’
그래도 많은 팬들은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고작 100게임 조금 넘는 경기를 출장하고 MVP를 수상한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소 경기 MVP 수상자는 신시내티의 전설적인 유격수 케빈 말론, 121경기를 뛰면서 타율 0.322 – 21홈런 – 72타점을 기록했다.
당시는 MVP 투표에서 홈런과 타점을 중시하는 시대였지만, 유격수 포지션에서 공수를 겸비한 케빈 말론의 활약은 여론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팀을 22년 만에 포스트 시즌으로 이끈 활약이 집중 조명을 받은 것도 한 몫, 반면 이인영은 작년에 비해 모든 지표가 깎였다.
3년 연속 40홈런 100타점을 넘긴 선수가 올 시즌은 30홈런 페이스, 100타점도 달성을 보장할 수 없다.
레만스키가 부적절한 발언을 한 건 사실이지만 객관적으로 따지면 표가 가야할 곳은 정해져 있지 않나.
그래도 이인영은 기자들 앞에서 포기는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남겼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저는 올해 최악의 시즌을 보내고 있습니다. 타율은 커리어 사상 가장 낮고 30홈런과 100타점도 보장할 수 없죠, 최악의 시즌에도 MVP 표를 받는다면 그것도 굉장한 일 아니겠습니까?”
기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8년 동안 정상 또는 그 근처에서 머물렀던 선수, 그런데 올해는 규정타석 달성도 불확실 하다.
최악의 시즌에서 MVP 표를 한 장이라도 받는다면 그것도 엄청난 일, MVP 후보에 올랐다고 우쭐해진 레만스키에 비하면 훨씬 의젓한 태도 아닌가.
레만스키의 발언에 한껏 민감해져 있는 백인들은 이인영이 가능한 한 많은 표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나는 그 선수를 존경한다. 하지만 그에게 표가 가는 게 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레만스키는 SNS를 통해 바로 반격에 나섰다.
이인영이 뛰어난 선수라는 건 부정하지 않지만, 올해 성적만 따져보면 내가 몰표를 받는 게 정상 아닌가.
내가 백인을 차별했다고 이인영에게 표가 간다면 이것도 흑인을 향한 백인들의 폭거라며 여론전을 펼쳤다.
또 표를 깎아 먹는 짓, 어쨌든 이런 복잡한 배경 속에서 이인영은 시즌 100번 째 경기에 나섰다.
“자, 이인영 선수가 오늘 경기 첫 타석을 맞이합니다. 올 시즌 성적은 타율 0.339, 홈런 27개, 87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인영 선수의 통산 메이저리그 타율이 0.359, 분명 그동안 보여준 성적에 비하면 낮은 수치인데, 0.339가 역대 최악이라면 이것도 대단한 거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현역 선수 중 3000타석 이상을 기준으로, 통산 타율이 0.330이 넘는 선수는 두 명 뿐이에요. 이인영 선수와 테드 반디 선수인데, 반디 선수는 올 시즌 타율 0.297에 그치고 있습니다.”
최악의 시즌에도 3할 4푼에 육박하는 타율을 찍고 있는 선수, 그동안 얼마나 압도적인 성적을 찍어왔는지 반증하는 거 아닌가.
현지 여론에서도 이 선수는 다른 선수들과 비교 될 레벨이 아니라는 말을 쏟아냈다.
“어쩌면 리(Lee)는 내년부터 급격한 하락세를 타게 될지도 모릅니다. 나이도 이제 30대 중반으로 접어들었으니까요. 그래도 분명한 건 2027년부터 2034년까지는 그의 시대였다는 겁니다. 누구도 이견을 제시할 수 없죠.”
“그렇죠. 테드 반디도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언제나 그에게 도전하는 입장이었으니까요. 우리는 이 선수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겁니다.”
이인영은 첫 타석부터 땅볼을 때렸지만 최선을 다해 1루로 뛰었다.
올해는 최고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최고라는 수식어가 붙을 자격이 있는 선수, 팬들도 어떤 결과가 나오든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반면 레만스키는 안타를 치고도 야유와 조롱을 받는 신세, 이런 분위기는 시즌 마지막 경기까지 지속됐다.
[레만스키, 시즌 255번째 안타 달성]
[단일 시즌 역대 2위 기록]
[그곳엔 박수도 환호도 없었다]
그렇잖아도 백인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미네소타,
홈팬들은 백인의 기록을 폄하하고 인정하지 않는 레만스키를 저주했다. 너같이 벼락출세한 놈은 언젠간 고꾸라질 거라는 악담 추가, 반면 이인영은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홈 팬들의 기립 박수를 받았다.
“자, 이인영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어렵다, 어렵다 말이 많았는데 기어이 규정타석을 채우네요.”
“기왕이면 30홈런 100타점도 달성했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희망이 없는 건 아니거든요.”
현재 성적은 30홈런 96타점, 4타점만 채우면 9년 연속 30홈런 100타점을 달성한다.
오늘도 첫 타석부터 빈 밥상, 그래도 공을 대하는 자세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볼넷으로 보내면 내가 죽일 놈인 건가.’
텍사스의 선발 그렉 힉스는 포수와 사인을 주고받았다.
투수가 타자 기록을 채워주는 존재는 아니지만 저런 선수를 잡아낼 때 희열을 느끼는 법, 이 대결이 볼넷으로 끝나는 건 피하고 싶었다.
‘땡큐’
초구부터 카운트를 잡으러 들어오는 공, 이인영은 망설임 없이 스윙을 돌렸다.
좌중간을 훌쩍 넘어가는 시즌 31호 홈런, 자리에서 일어난 팬들은 기립 박수를 보냈다.
‘그래도 승부한다.’
홈런을 맞았지만 그렉 힉스는 두 번 째 맞대결에서도 승부를 택했다.
대기록 달성을 앞둔 타자 입장에선 고마운 일, 이인영도 전력을 다해 응해줬다.
“음~ 다시 바깥쪽입니다. 카운트는 쓰리 볼 원 스트라이크”
“지금도 살짝 빠지긴 했는데 좋은 공이었거든요. 어쨌든 힉스 선수는 도망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회심의 4구, 이번에는 몸 쪽으로 바짝 붙었다.
이런 때는 콜이 울리기도 전에 1루로 걸어 나가는 선수들이 있지만 이인영은 자리를 지켰고, 눈치를 살피던 주심은 스트라이크 콜을 줬다.
지금 볼을 주는 건 눈치가 없는 짓, 포수가 던져준 공을 받은 그렉 힉스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타자가 스트라이크를 하나 양보해준 느낌이랄까.
그래서 더 자존심이 상했고, 너만큼은 절대 볼넷으로 내보내지 않겠다는 각오를 세웠다.
“아~!! 젠장!!”
하지만 공이 바닥에 처박히면서 볼넷, 1루로 걸어 나간 이인영은 그렉 힉스와 눈을 마주쳤다.
전력을 다해 덤벼주는 건 고맙지만 날 압도하기엔 미숙한 실력, 도발에 걸려든 힉스는 3번째 승부에서도 정면 대결을 택했다.
지금 상황은 2사 주자 1 – 2루, 홈런이 터지면 9년 연속 30홈런 – 100타점 달성이다.
이 기회를 살리는 건 내 몫, 시즌 마지막 타석이 될 수도 있는 자리라 어깨에 약간 힘이 들어갔다.
[따악~!!]
“우측!! 아~ 파울입니다.”
“굳이 드라마틱하게 갈 필요 없습니다. 저희가 원하는 건 밀당이 아니라 남자다운 화끈함입니다.”
“하하~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렇잖아요. 좋아하는 남녀 사이라면 어차피 할 거 다 할 거 아닙니까? 어차피 할 100타점이라면 여기서 확 해버리면 되는 거잖아요.”
오늘도 애제자를 향한 무한한 신뢰를 드러내는 박한우 위원, 그 사이, 힉스는 2구를 던졌고 이인영은 과격한 스윙으로 맞이해줬다.
제대로 걸렸지만 우익수 정면으로 가버린 타구, 마지막까지 배트를 놓지 않은 이인영은 허공에 발길질을 날렸다.
기회가 왔는데 살리지 못했으니 내 책임, 팬들은 물론 동료들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괜찮아, 아직 한 타석 더 기회가 있다고”
“동정하지 말랬지? 내가 너희들한테 동정 받을 입장이냐고?”
오늘도 쓸데없이 친절이 과한 녀석들, 가능하면 그 기대에 응하고 싶었지만 이인영은 끝내 100타점을 채우지 못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타율 0.337 - 홈런 31개 - 97타점, 규정타석을 채웠지만 타이틀 하나 건지지 못했고 팀도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커리어 역사상 최악의 시즌, 경기가 끝난 후 이인영은 기자들 앞에서 한해를 정리하는 인터뷰에 응했다.
“최악이다 최악이다 해도 부상을 떨쳐내고 무사히 시즌을 치렀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싶습니다. 그리고 오늘 레만스키가 시즌 259번 째 안타를 쳐냈다고 들었는데 축하의 말 전하고 싶습니다.”
대기록을 세우고도 비아냥거림을 받는 레만스키, 다들 욕 하는데 미운오리 떡 하나 준다는 말도 있잖나.
나라도 칭찬을 해 줘야겠지, 하지만 기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백인 기자들은 레만스키에게 절대 표를 던지지 않겠다고 공언,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놀라웠다.
만장일치를 받았어야 할 레만스키는 1위표 10장 획득에 그쳤고, MVP와 거리가 멀었던 이인영은 1위 표 4장을 받았다. 나머지 표는 이런 저런 선수에게 분산, 이인영은 총 점 262점으로 MVP 투표 3위에 올랐다.
최악의 시즌에도 MVP 투표 순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 것, 한 전문가는 칼럼에 이런 내용을 남겼다.
“리(Lee)는 올 시즌 최악의 한 해를 보냈다. 커리어 사상 가장 낮은 타율을 기록했고, 100타점 달성에도 실패했지만 MVP 투표에 이름을 올렸다. 최고는 되지 못 했지만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레만스키가 헛소리를 지껄인 덕분에 표가 몰렸다는 의견에 일침을 가하는 논평, 이렇게 이인영은 최악의 시즌을 보내고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한해를 마무리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