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최악의 시즌 (6)
[이인영 규정타석 진입 가능?]
[9년 연속 타율왕 가능할까?]
시간은 흘러 8월 12일, 뉴욕 여론에서 기사가 났다.
1948년까지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규정타석 개념, 전체 경기의 3분의 2이상을 출장한 선수에게 타이틀을 인정했을 뿐이다.
이러다보니 웃지 못할 일도 생기기 마련, 실제로 메이저리그에서는 한 선수의 규정 타석을 억지로 채우기 위해 타순을 조정한 사건도 있다.
지난 2002년, 토론토의 길레르모 에반스는 시즌 종료 8게임을 앞두고 타율 0.357, 메이저리그 타율 1위를 달렸다.
문제는 부상 때문에 시즌 복귀가 늦어 규정 타석까지 40타석이나 부족했다는 것, 이대로 시즌이 끝나면 타율 2위(0.333) 조셉 로저스에게 타율 타이틀을 내 줄 위기에 처했다.
이때부터 1번 타자로 출장하기 시작한 에반스, 하지만 마지막 경기에서 500타석에서 그치며 끝내 규정타석(502타석)을 채우지 못했다.
이렇게 타격왕은 조셉 로저스에게 넘어가는 듯 했지만 토론토 여론에서 문제를 제기하면서 논란이 일어났다.
“규정타석에 부족한 2타석에서 모두 아웃을 당했다고 쳐도 타율은 에반스가 더 높다. 그러니 에반스를 타율왕으로 인정해야 한다.”
“많은 경기를 부상 없이 뛰는 것도 실력이다. 조셉 로저스는 무려 704타수를 소화했고 타율 0.342를 기록했다. 에반스가 로저스처럼 700타수를 소화하고도 그런 타율을 기록할 수 있다고 보는가?”
예전이나 지금이나 기록 싸움은 언제나 논란거리가 되기 마련,
이 사건을 계기로 메이저리그에는 조셉 로저스 룰이 개설됐다.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한 선수는 어떠한 경우에도 타이틀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 결국 2002년 타율 왕은 조렙 로저스에게 넘어갔다.
그렇다면 이인영은 올 시즌 개인 타이틀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까.
6월 중순에 복귀했으니 대략 55경기를 날려 먹은 건데, 107경기에서 5타석을 소화한다면 대략 535타석을 소화할 수 있다.
문제는 뉴욕의 타선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 작년 시즌 뉴욕은 선발멤버 9명이 규정타석을 모두 채우는 기록을 세웠다. 그만큼 선수들이 부상 없이 시즌을 잘 치렀다는 것,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테이블 세터를 이뤘던 햄프리 – 몬테로는 부상에서 허우적, 허리를 책임져 줬던 마이크 서튼은 부진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질 못하고 있다.
타순의 순환이 제대로 안 되고 있으니 이인영이 한 경기에서 5타석을 소화하는 건 무리, 지금 페이스라면 500타석도 힘들다.
8년 연속 메이저리그 전체 타율왕을 차지했던 이인영의 전설이 여기서 끝나는 건가. 하지만 이인영은 여론의 걱정을 뒤로 하고 휴가를 택했다.
아내가 곧 둘째를 출산하는데 옆에 있어줘야 할 거 아닌가.
기록은 평생 남는다는 말도 있지만 가족의 탄생은 평생의 추억이 되는 법, 볼티모어 원정을 포기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아빠, 왜 우리는 밖에 있어야 돼요?”
“안에 있어 봤자 별 도움이 안 되니까.”
“그래도 이건 불공평해요. 우리는 가족인데 … ”
분만실 앞에서 재찬이는 불만을 중얼거렸다.
가족이 옆에 있어야 엄마도 힘을 내서 동생을 낳을 거 아닌가. 나는 그렇다고 쳐도 경기까지 포기하고 온 아빠의 입장은 뭐가 되는 건지, 이렇게 밖에 세워 둘거면 아빠는 경기장에 가는 게 나았다며 투덜댔다.
“너 엄마나 나중에 색시 될 사람 앞에선 그런 말 하지 마라.”
“왜요?”
“이런 때 남자가 옆에 없으면 여자에겐 평생의 서운함이 되거든”
인생의 교훈이 담긴 아빠의 말, 하지만 아직 어린 꼬맹이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축하합니다. 공주님이네요.”
얼마나 기다렸을까.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온 생명, 이인영은 핏기도 채 가시지 않은 둘째를 가슴에 품었다. 나오느라 고생이 많았을 녀석, 까치발을 든 아들에게도 관심을 줬다.
“어때? 기다린 보람이 있지?”
“네 … ”
재찬이는 꿈틀대는 생명 앞에서 말로 표현 못 할 감동을 느꼈다. 나도 이젠 오빠가 되는 건가. 책임감까지는 아니지만 동생을 잘 보살펴야겠다며 생각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건강히 태어났지만 예정보다 일찍 태어난 탓에 아기는 인큐베이터로 이동, 이인영은 아내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대기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제 엄마 봐도 돼요?”
“그래, 가서 껴안아드려”
“네에~ ”
말은 참 잘 듣는 녀석, 분만실로 뛰어든 재찬이는 겨우 몸을 가눈 엄마와 포옹을 나눴다.
뭔가 훌쩍거리는 것 같은데 우는 거냐고 묻는 건 실례겠지. 이인영은 아들이 부끄러운 흔적을 지워낼 때까지 시간을 줬다.
“자기야, 우리 애기 봤어?”
“당연히 봤지. 벌써부터 이목구비가 뚜렷하던데? 누굴 닮았는지 몰라도 우리가 딸은 참 예쁘게 잘 낳았어.”
“아들도 잘 낳았잖아.”
“그건 당연한 말이라 할 필요가 없고”
닭살이 돋아나는 가족의 대화, 이때 아빠가 무심코 던진 말이 재찬이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그건 그렇고 이거 곤란하네.”
“뭐가요?”
“애기는 미국에서 태어나서 이제 미국인이야.”
“그게 뭐가 문제에요?”
“너는 한국인이고 애기는 미국인이잖아. 따로 살아야 될지도 모르겠네.”
격하게 일그러지는 아들의 얼굴, 재찬이는 내 동생은 여기에 못 놔두고 간다며 시위를 벌였다.
장난으로 던진 말인데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녀석, 어른스러운 척 해도 애는 애라는 건가. 이인영은 지금 당장 동생을 되찾으러 가겠다는 아들을 붙잡았다.
“괜찮아. 아빠가 어떻게든 동생 한국으로 데려가게 해 볼 게”
“정말이요?”
“그럼, 아빠가 누군데? 그 정도는 어떻게든 될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제가 가서 데리고 올 게요.”
아들의 너무 진지한 태도에 혜진 씨도 웃음을 겨우 억눌렀다.
오빠의 강력한 요청으로 다시 가족 옆으로 돌아온 아기, 동생을 회수한 재찬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유~ 뺏기는 줄 알았네. 이래서 아기가 태어날 때 남자가 옆에 있어야 되는구나.”
“그래, 그러니까 아빠가 여기 온 거야.”
볼 때마다 흐뭇한 웃음을 짓게 하는 녀석, 어쨌든 이렇게 4인 가족은 한 공간에서 즐거운 대화를 나누게 됐다.
“자기야, 내일은 출근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기록도 신경 써야지. 9년 연속 타격왕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잖아.”
“아~ 아~ 됐어, 타격왕 못 했다고 내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니까.”
이인영은 아내의 말에 허세를 떨었다.
복귀 이후 43경기에서 타율 0.344 - 홈런 12개 - 31타점을 기록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는데, 규정타석을 못 채웠다고 내 가치를 폄하할 사람이 있을까.
예기치 못한 부상에 발목이 잡혔을 뿐, 개인 타이틀은 놓쳐도 옵트 아웃을 발동할 명분만 챙기면 상관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이인영은 이틀 휴가를 꽉 채우고 현장에 복귀, 디트로이트 원정 경기에 합류했다.
“너 규정타석 채우려면 앞으로 바빠지겠는데?”
“걱정하지 마. 우리가 힘 좀 써 줄게”
“웃기고 있네.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너희들한테 무슨 도움을 받겠냐?”
돌아온 슈퍼스타는 동료들에게 독설을 쏟아냈다.
내 규정타석보다 본인들의 위태로운 입지를 신경써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 페이스라면 뉴욕에서 규정 타석을 채울 선수는 많아 봤자 3~4명뿐이다.
그만큼 부상자도 많고 부진에 시달려 온 뉴욕, 상황은 최악이지만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는 게 인생 아니겠나. 볼티모어 원정을 시작으로 앞으로 12일 동안 이어질 가시밭길, 이인영도 각오를 다졌다.
[이인영은 돌아왔는데 왜 발렌틴은 아무 소식도 없는 건가?]
[살아 있긴 한 건지 모르겠다.]
[현상금이라도 걸어야 할 판]
한편, 경기를 디트로이트 여론은 자폭 개그를 쏟아냈다.
지난 2027년, 디트로이트는 주포 르로이 발렌틴에게 7년 2억 2천만 달러라는 초대형 계약을 선물했다.
장기계약을 맺기 전 발렌틴은 2년 연속 35홈런 이상을 기록, 2026년은 부상으로 삐걱거렸지만 132경기 만에 41홈런을 때려내는 괴력을 과시했다.
건강하기만 하면 매 시즌 40홈런도 기대해 볼만한 선수, 하지만 2028년, 르로이 발렌틴은 22경기 만에 부상으로 시즌 아웃 됐다.
그 다음 해인 2029년은 출전 기록 제로, 올 시즌도 감감 무소식이다.
발목 근육 조직을 재건하는 대수술을 받은 이인영도 돌아왔는데, 발렌틴은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가.
7년 계약을 맺었는데 벌써 3년을 먹튀로 흘려 보냈으니, 돈만 먹고 해외로 도피한 거 아닌가.
하지만 주급이 꼬박꼬박 지급되고 있다는 건 어딘가엔 살아 있다는 뜻, 디트로이트 팬들은 그 잘난 얼굴 좀 보자며 분노를 쏟아냈다.
속이 터지는 건 디트로이트도 마찬가지, 얼마 전 연락을 시도해 봤지만 발렌틴은 지금 재활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향후 복귀는 어떻게 할 생각인지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단은 발렌틴을 태만 혐의로 고소까지 한 상황, 반면 이인영은 부상 이후에도 성실한 재활과 훈련으로 신속하게 현장에 복귀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같은 고액 연봉자인데 이렇게 차이가 나도 되는 건가. 이인영의 성실한 모습은 디트로이트의 속을 한 번 더 뒤집어 놨다.
‘저 집안은 뭘 해도 안 되는 건가?’
1회 초 뉴욕의 공격, 디트로이트는 칼 바셋을 마운드에 올렸다.
먹튀는 아니지만 발렌틴만큼 디트로이트 팬들의 혈압을 올리는 선수, 바셋은 장기 계약을 맺기 전까지만 해도 디트로이트에서 5년 동안 53승 47패, 평균자책점 3.57을 기록하며 에이스 노릇을 해줬다.
하지만 장기계약 이후 성적은 6승 22패 - 평균자책점 6.44, 일이 이렇게 꼬일 수 있는 건가.
대형 계약이 연달아 실패하면서 디트로이트는 생명유지 장치까지 떼버린 식물인간 신세, 승리가 필요한 뉴욕은 이 좋은 먹잇감을 놓치지 않았다.
[따악~!!]
“이번에는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뉴욕이 연속 안타로 선취득점 기회를 잡습니다.”
“자, 이제 이인영 선수 타석이죠. 갈 길이 먼 만큼 열심히 달려줘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볼넷 하나도 아쉬운 타석, 초구를 지켜본 이인영은 2구를 밀어 쳐 좌중간으로 보냈다.
잡혔지만 2루 주자가 3루로 향하기엔 충분했던 타구, 이인영은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더그아웃에 들어섰다.
“야, 레만스키 오늘도 2안타 쳤데”
“그런 건 나한테 왜 알려 주는 거야?”
“너 약 올리려고.”
하지만 동료들의 장난 섞인 압박은 계속됐다.
작년 시즌, 미네소타에서 두각을 드러낸 로니 레만스키의 무서운 질주, 올 시즌 레만스키는 타율 0.342, 홈런 24개, 69타점을 올리며 MVP급 시즌을 보내고 있다.
반면 이인영은 규정 타석도 못 채웠고 누적 스탯에서 너무 떨어지는 게 사실, 남은 경기에서 그럴 듯한 성과를 낼 수 있을까.
하지만 이인영은 눈과 귀를 닫고 한 타석 한 타석에 집중했다.
[따악~!!]
“네!! 그렇죠!!”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2루 주자!! 3루 주자!! 모두 홈으로 들어옵니다!! 이인영 선수의 적시타!! 뉴욕이 8대 0으로 앞서나갑니다!!”
“여기서 그치면 안 됩니다. 더욱!! 더 매우 쳐야 됩니다!!”
박한우 위원은 오늘 따라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간만에 대폭발한 뉴욕 타선, 이런 때 애재자가 부족한 타석을 채워야 하지 않겠나. 규정타석만 채우면 올해도 MVP 후보에 이름을 올릴 선수라는 믿음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