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273화 (273/309)

273화. 최악의 시즌 (5)

[보스턴 – 뉴욕 드디어 맞붙는다]

올스타전을 사흘 앞두고 숙명의 맞대결이 예고됐다.

뉴욕을 떠난 리차드 케이시의 조롱과 이에 대한 뉴욕 구단의 맞대응으로 긴장감은 끊어질 정도로 팽팽해진 상황, 플레어티 단장은 보스턴 원정길에 동행했다.

좀처럼 올라오지 않는 승률, 일각에선 뉴욕이 재정비에 초점을 둬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포기를 모르는 플레어티 단장은 시즌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최근 원정경기는 모두 참석하는 편,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야, 하나님은 남자일까 여자일까?”

“글쎄, 자웅동체 아닐까?”

“그렇지? 하나님이 성경에 여자를 통해 아들을 얻었다는 내용은 없잖아? 진짜 있다면 자웅동체가 틀림없어.”

그런데 비행기 안에서 사소한 소동이 일어났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는 법, 조용히 휴식을 하는 선수도 있지만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고 농담을 주고받는 선수도 있다.

얼마 전 콜 업 된 폴 보그만과 커티스 보너도 그런 유형, 마이너리그 시절부터 각별한 사이를 유지했던 두 선수는 쓸데없는 농담을 이어갔다.

“야, 하나님은 백인일까 흑인일까?”

“글쎄, 내가 직접 본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아?”

“분명 물라토(혼혈)일거야.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식이잖아. 그러니까 검둥이도 흰둥이도 노랑이도 태어나는 거겠지. 하나님이 백인이라면 다양한 인종이 태어날 리가 없잖아?”

“오~ 일리가 있는데?”

“너희들 좀 닥칠 수 없냐?”

이때 마이크 서튼이 목소리를 높였다.

시답지 않은 농담을 싫어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 신을 모욕하는 농담이 이날따라 귀에 거슬렸다.

“별 것도 아닌데 왜 그래?”

“짜증난다고!! 시시한 소리 할 거면 뒤쪽으로 가서 해서!!”

순식간에 싸늘해진 분위기, 이제 막 메이저리그에 발을 들인 루키들에겐 고참에게 달려들 명분도 힘도 없었다.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신세, 이인영은 일단 귀를 닫았다.

시시한 농담의 잘잘못을 따질 생각도 없고 내가 여기서 목소리 높여봤자 분위기만 더 가라앉을 뿐, 경기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고참이면 다나.’

‘야구도 못하면서’

폴 보그만과 커티스 보너는 마이크 서튼에게 불만을 품었다.

지명타자를 하면서도 WAR가 0.2밖에 안 되는 캡틴, 이 정도면 서튼을 치우고 그 자리에 마이너리거 중 아무나 데려와도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거다.

야구가 잘 안 되니 괜히 까칠한 반응을 보이는 거겠지. 야구를 못 하면 분위기 파악이라도 해야 될 거 아닌가.

암울한 분위기에서도 친목을 다지는 선수들을 왜 방해하는 건지, 전혀 도움이 안 되는 폐물이라며 험담을 이어갔다.

어쨌든 뉴욕 선수단은 노고를 풀 여유도 없이 경기장에 도착, 앤더슨 감독은 굳은 얼굴로 그라운드를 살폈다.

작은 농담도 웃어넘기지 못할 정도로 몰려 있는 마이크 서튼, 이대로 경기에 내보내도 되는 건가.

다른 선수를 투입하고 싶었지만 이게 서튼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건 아닌지, 고심을 거듭하다 명단을 제출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 오늘 경기마저도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다면 단장과 논의해 당분간 라인업에서 제외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자, 리차드 케이시가 시즌 17번째 등판에 나섭니다. 올 시즌 10승 4패 평균자책점 3.36, 99이닝 동안 볼넷 34개, 탈삼진은 93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7월 중순까지 2점대 평균자책점을 유지했는데, 최근 몇 경기 성적이 좋지 않죠. 뭔가 반전이 필요한 입장입니다.”

1회 초 뉴욕의 공격, 성공적으로 메이저리그에 연착륙한 폴 보그만이 타석에 들어섰다.

무릎 부상으로 15일자 부상자 명단에 오른 스캇 햄프리는 지금도 복귀를 못하고 있다. 험프리에겐 안 된 일이지만 승격을 노리는 유망주들에겐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있을까.

보그만은 냉혹한 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초구 지켜봅니다. 카운트는 노 볼 원 스트라이크”

“이 선수는 학창 시절 재미있는 일화가 있죠. 대학 야구팀에 원서를 냈다가 불합격 판정을 받았는데도 훈련장에 나가서 기어이 감독을 납득 시켰다고 합니다.”

“그래도 근성만으로는 안 되는 게 메이저리그죠. 좀 더 생산력 있는 타구를 보여줘야 합니다.”

[따악~!!]

“말씀 드리는 사이!! 2루수 옆을 빠져 나가는 안타!! 보그만이 팀에 첫 안타를 선물합니다!!”

1루에 안착한 보그만은 마침 보이는 카메라를 향해 손가락 세리머니를 날렸다.

한방을 중시하는 뉴욕 현지에서 보그만은 툭 툭 건드리기만 할 줄 아는 슬랩 히터라는 비아냥거림을 받는 신세,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이런 안타도 제대로 못 때려내는 선수들이 넘쳐나는 뉴욕, 그러니까 나같은 똑딱이가 주전 노릇을 하는 거 아닌가. 불만 있으면 나보다 더 뛰어난 선수를 영입하면 그만, 보란 듯이 1루에서 멀어졌다.

“다시 견제, 보그만 선수는 그래도 1루에서 멀어집니다.”

“마이너리그에서 특출 난 타격 능력은 보여주지 못했지만 도루만큼은 대단했거든요. 최근 3년 동안 마이너리그에서 기록한 도루가 106개, 올해도 메이저리그에 승격되기 전까지 도루 22개를 기록했습니다.”

눈치를 살피던 보그만은 기어이 2루를 훔쳐냈다.

도루 센스만큼은 메이저리그 정상급, 그 재능을 인정한 앤더슨 감독도 단독 도루에 불쾌함을 표하지 않았다.

주자가 득점권에 진출하면서 넓어진 내야 구멍, 다음 타자 커티스 보너는 정확한 타격에 초점을 맞췄다.

따악~!!

2루 쪽으로 갔지만 주자가 3루까지 가기엔 충분했던 타구, 1사 3루에서 이인영이 타석에 들어섰다.

“아~ 포수가 일어나는데요?”

“다음 타자가 마이크 서튼이거든요. 서튼 선수가 최근 타격감이 워낙 안 좋기 때문에 여기서 굳이 승부를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보스턴의 도발에 마이크 서튼은 핏대를 세웠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던 리차드 케이시, 볼 배합을 두고 싸운 적도 있지만 그건 좀 더 잘 해보자는 대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리차드 케이시는 뉴욕을 떠난 후 계속 언론 플레이를 벌이며 ‘뉴욕 선수단은 팀 원 간에 애정이 전혀 없다. 고참들은 더욱 그렇다’ 이런 루머를 퍼트렸다.

아무리 뉴욕이 싫었어도 그런 말을 했어야 했나. 팀에 대한 애정이 깊은 서튼은 케이시를 단죄하기 위해 배트를 손에 쥐었다.

“스윙!! 크게 휘두릅니다.”

“서튼 선수의 문제는 빠른 볼에 대응이 안 된다는 거죠. 95마일 이상 빠른 볼 타율이 0.222밖에 안 됩니다.”

3구를 공략했지만 타이밍이 늦으면서 파울, 결국 서튼은 백 도어 슬라이더에 얼어붙었다.

첫 타석부터 기대 이하의 모습, 특별석에 앉은 플레어티 단장의 표정도 굳어졌다.

따악~!!

“그렇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후속 타자 벤 자일스가 적시타를 날려준 건 그나마 위안거리, 뉴욕은 2회에도 득점을 추가하며 2대 0으로 앞서나갔다.

그동안 사람 구실을 못했던 하위 타선에서 득점이 나왔다는 게 뭣보다 고무적, 팬들도 오늘 경기가 반등의 계기가 되길 기대했다.

경기는 흘러 3회 초 뉴욕의 공격, 선두 타자로 나선 이인영은 차분하게 초구를 기다렸다.

구속은 빠르지만 타자를 압도하기엔 구위가 부족한 케이시, 안 좋은 결과도 감수하고 배트를 돌렸다.

[따악~!!]

“우측!! 파울입니다.”

“지금은 몸 쪽으로 바짝 붙었거든요. 케이시 선수가 여느 때보다 집중하고 있습니다.”

포수가 던진 공을 받아든 케이시는 이번에도 몸쪽 사인을 냈다.

뉴욕에서 이인영과 잠시 한솥밥을 먹었지만 친하게 지냈던 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서로 독설도 주고받은 관계, 그래도 상대의 실력만큼은 인정했다.

실력을 알기 때문에 방심할 수 없는 것, 자만했다면 가운데 빠른 공을 밀어 넣었을 거다. 승리를 위해선 제구가 생명, 이인영도 케이시가 무모하게 달려들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엇?!!’

발목 근처로 날아온 빠른 볼, 회복에 7개월이나 걸렸던 그 부위 아닌가.

뉴욕 원정 팬들이 야유를 퍼붓고 보스턴 팬들이 맞대응을 하면서 분위기는 더 살벌해졌다.

미안한 기척 없이 돌아서는 케이시, 자리에서 일어난 이인영도 별다른 감정은 품지 않았다. 빈볼을 던져도 당당하게 행동하는 게 메이저리그 투수, 내가 예상했던 몸 쪽 공이 들어왔다는 것에 의의를 뒀다.

“바깥쪽, 빠지네요. 카운트는 투 볼 원 스트라이크가 됩니다.”

“케이시 선수가 배짱이 좋아도 3연속 몸 쪽 승부는 부담이 됐겠죠. 이렇게 되면 유리한 건 타자입니다.”

“이인영 선수는 무슨 공이 들어올지 아는 것 같습니다. 몸쪽 공이 계속 들어왔는데도 앞발을 닫아뒀거든요. 승부구는 바깥쪽이라는 걸 예상한 겁니다. 그게 볼이 됐으니 배터리는 이제 던질 게 없는 거죠.”

박한우 위원의 예상대로 보스턴 배터리는 긴 사인을 주고받았다.

다시 몸 쪽으로 들어가 볼까. 문제는 타자가 빠른 볼에 대응을 했다는 것, 파울이 됐지만 타이밍이 밀리진 않았다.

조금이라도 몰렸다간 위험, 또 바깥쪽으로 뺐지만 반응은 없었다. 결국 또 볼넷, 서튼은 보스턴 배터리의 선택을 자신을 겨냥한 도발로 받아들였다.

내가 만만하니까 저 자식을 계속 볼넷으로 거르는 거 아닌가, 나름대로 발악해 봤지만 감정 조절도 되지 않았다.

“이게 스트라이크라고?!! 눈을 어디에 달고 다니는 거야?!!”

2구가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자 주심을 상대로 핏대를 올리는 신세, 4구를 타격했지만 유격수 정면으로 가면서 병살타가 되고 말았다.

“그게 왜 스트라이크냐고?!!”

난동은 더그아웃으로 이어졌다.

서튼이 집어던진 장갑은 물병을 때렸고 물병은 다시 폴 보그만을 가격, 평소 서튼에게 감정이 있던 보그만은 참지 않았다.

“왜 그걸 나한테 던져?!!”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왜 물건을 사람한테 던지냐고?!! 캡틴이면 다야?!! 왜 행패를 부려?!!”

참고 참았던 애송이의 반란, 서튼이 오히려 큰 소리를 치자 이인영도 한 소리 하고 나섰다.

“네가 미안하다고 하면 되는 일 아냐?!! 왜 일을 키워?!!”

“시끄러워!!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아!!”

“야!! 너 이리 안 와?!! 사과는 하고 가야 될 거 아냐?!!”

마이크 서튼은 끝내 사과 없이 더그아웃 뒤편으로 물러났다.

뉴욕은 막장이라는 리차드 케이시의 증언을 뒷받침 해주는 광경, 문제의 장면은 방송 카메라를 타고 각지로 퍼져 나갔다.

그렇잖아도 안 좋은 팀 분위기에 쐐기를 박은 서튼의 실망스러운 행동, 플레어티 단장도 이번 사건은 그냥 넘길 수 없다며 발끈했다.

‘아차, 이게 아닌데 … ’

한편, 서튼은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우쳤다.

물건을 집어던진 건 분명 내 잘못인데 적반하장 식으로 나왔으니, 징계를 받아도 할 말 없는 행동에 머리를 움켜쥐었다.

“미안하다. 내가 어제는 … ”

“왜 나한테 사과를 해? 넌 상대를 잘못 잡았어.”

다음 날, 서튼은 이인영에게 정식으로 사죄를 표했다.

하지만 사과를 받아야 하는 건 폴 보그만, 이인영은 너와 나 사이엔 아무 문제없다고 선을 그었다.

“가서 사과나 하고 와.”

“알았어.”

보그만에게 사과를 한 서튼은 이날 이인영과 평소처럼 대화를 주고받았다. 어제 더그아웃에서 설전을 벌인 사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 경기가 끝난 후 이인영은 기자들의 질문에 휩싸였다.

“어제 서튼과 뭔가 충돌이 있었는데 화해하신 겁니까?”

“화해라니요? 저와 그 친구 사이에는 처음부터 아무 불화가 없었습니다. 다만, 서튼이 그날 필요 이상으로 흥분을 하기에 충고를 해줬을 뿐이죠. 아무리 친한 가족이라도 살다 보면 서로 의견 충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곳은 혈기 넘치는 남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죠. 사소한 말싸움 때문에 서로 적을 진다면 모든 팀의 클럽하우스가 엉망이 됐을 겁니다.”

남자들끼리 지내다 보면 서로 싸움도 하기 마련, 뭐 그런 걸 가지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나.

이인영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뉴욕의 클럽하우스는 평온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 사건으로 이인영은 위기 상황도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받았고, 뉴욕 구단 관계자들은 다음 시즌 캡틴 자리를 이인영에게 넘기는 방안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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