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최악의 시즌 (4)
[이인영, 마이너리그 선수들에게 기부 거부]
[피자 한 판도 안 돌렸다.]
이인영의 메이저리그 복귀를 앞두고 뉴욕 현지에서 기사가 떴다.
최근 많은 구단들이 마이너리그 규모를 축소하면서 마이너리거들의 생계가 막막해진 게 사실, 가끔 재활을 위해 마이너리그로 내려간 고액 연봉자가 음식을 돌리는 일이 있긴 한데, 이번 일은 조금 달랐다.
한 두 푼도 아니고 연봉 6천만 달러를 받는 선수가 이렇게 행동해도 되는 건가.
하지만 이인영은 지역 인터뷰에서 그건 당신들의 오해라고 선을 그었다.
“저는 솔직히 마이너리그에 투자하는 거 아깝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자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기부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미국 문화, 약간의 성의는 베풀어도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이인영은 그건 당신들의 착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1억 달러를 버는 사람에게 1만 달러가 별 것 아닌 돈처럼 느껴질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를 벌든 1만 달러는 큰돈이죠. 돈의 무서움을 아는 사람이 부자가 되는 법입니다.”
내 손에 100달러가 있으면 1달러는 정도는 써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다.
하지만 이인영은 그렇게 살지 않았다. 마트에서 장을 볼 때도 50원 짜리 봉투에 벌벌 떨고, 내가 어디에 얼마나 돈을 쓰고 있는지도 철저히 따지는 편, 야구를 대하는 자세도 다르지 않다.
‘쳇!! 땅볼이잖아.’
홈런을 노리고 스윙을 했는데 땅볼이 나왔다고 가정해 보자.
한 시즌에 40홈런 - 200안타를 치는 선수라도 1안타의 가치를 안다면 1루까지 전력질주 하겠지, 그러나 그 반대로 행동하는 선수들도 있다.
내가 한 시즌에 200안타를 치는 기량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1안타를 위해 전력질주를 해야 3할 타율을 치고 슈퍼스타의 자리에 오르는 거다.
그런데 그걸 모르는 선수들이 너무 많다.
내가 지금 쏟아붓는 노력이 한 시즌의 결과로 이어진다는 걸 알아야 성공할 수 있는 법, 이인영은 마이너리그의 선수들에게도 같은 기준을 들이밀었다.
“저는 하루아침에 연봉 6천만 달러를 받는 선수가 된 게 아닙니다. 이런 대접을 받을 때까지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거든요. 그런데 제 몸값을 두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인간들이 많습니다. 제가 아무리 많은 돈을 기부해도 당연한 거다, 그 친구 1년 수입에 비하면 벌 것 아니다, 이런 말을 지껄이는 인간들이 있죠. 하지만 그런 인간들은 절대 성공 못 합니다. 남의 노력과 성공을 폄하 하는 자들이 자신의 노력을 인정받을 자격이 있을까요? 마이너리그 선수들도 이걸 기억해야 합니다.”
마이너리그에 비해 메이저리그가 너무 많은 특혜를 누린다고? 왜 그런 말을 지껄이는 건가.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고 그만큼 결과를 냈기 때문에 고액연봉을 받는 거다. 실력도 없는 주제에 하위 리그에서 대접을 받길 바라나?
세상에는 엄연히 격차라는 게 있는 법, 그걸 인정 못 하고 나와 저 사람의 차이가 좁혀지기만을 바라니 뭐가 달라지겠나.
‘너희들이 선수냐? 그러니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이너리그지’
이인영은 마이너리그에서 뉴욕 선수들의 플레이를 지켜봤다.
절대 성공할 수 없는 실력과 정신상태, 이러니까 어떤 선수를 콜 업해도 메이저리그에서 정착을 못하는 거다.
내가 이런 얼간이들에게 수백 달러 씩 지불하고 생색을 내야 되나? 이인영은 나는 그런 생색내기 기부를 할 생각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마이너리그에 내려가면 고액연봉자들은 통 크게 기부를 하죠? 솔직히 그거 허세입니다. 내가 이만큼 돈을 버니까 이 정도는 베풀 수 있다고 허세 떠는 거죠. 하지만 저는 아닙니다. 돈을 쓰더라도 미래가 안 보이는 선수에겐 1달러도 쓰기 싫습니다. 충분한 답이 됐습니까?”
뉴욕 여론은 혀를 내둘렀다.
그동안 수많은 선수가 뉴욕의 역사에 이름을 새겼지만 역시 뭔가 다른 아우라를 뿜어내는 선수, 이인영의 연봉을 두고 트레이드를 논하던 전문가들도 입을 다물었다.
전문가면 전문가지 왜 남이 받는 연봉을 두고 이래라 저래라 따지는 건가. 뭐라 반박할 근거가 없으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긴 재활을 거쳐 돌아온 그라운드, 이인영은 복귀전에서 홈팬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우리가 원했던 건 저런 전투적인 자세를 가진 선수, 한동안 패배에 물들어 있던 뉴욕 선수단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았다.
“자, 이제 뉴욕의 1회 말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선두 타자는 폴 보그만, 올 시즌 28타수 8안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캇 햄프리 선수가 부상으로 결장하면서 출장기회를 잡고 있거든요. 이럴 때 자리를 잡아야 되는 겁니다.”
폴 보그만은 초구를 신중히 골라냈다.
누구 말대로 1안타의 가치를 알아야 성공하는 법, 첫 타석부터 땅볼을 때렸지만 죽기 살기로 1루까지 내달렸다. 아웃은 됐지만 근성을 보여준 플레이, 앤더슨 감독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음 타자 커티스 보너는 좌중간에 떨어지는 안타로 1루 진출, 이인영이 타석에 들어섰다.
시애틀 배터리는 초긴장 상태, 일단 바깥쪽으로 하나 빼 탐색전을 벌였다.
‘발목이 신경 쓰인다면 몸쪽 변화구에 약점을 보일 수도?’
시애틀의 감독 타일러 리베라가 사인을 냈다.
초구를 맞이할 때 스트라이드를 빨리한 타자, 몸쪽 빠른 공을 의식하고 있다는 뜻 아닌가. 이런 때는 몸쪽 변화구가 먹힐 확률이 높는 판단을 내렸다.
문제는 이인영이 산전수전 다 겪은 베타랑이라는 것, 이 정도 볼 배합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
“지켜봅니다.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지금도 약간 스트라이드를 빨리 하거든요. 역시 빠른 볼에 대한 감각을 익히는 게 중요하겠죠.”
“아직 건재하다는 걸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솔직히 이 친구를 보낼 마음의 준비가 안 됐거든요.”
박한우 위원은 애제자를 향한 애정을 드러냈다.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 10여년 동안 야구를 보는 맛을 알게 해 준 선수, 미국 나이로 34살이면 아직 몇 년은 더 뛸 수 있지 않나.
이 친구가 은퇴해버리면 내가 무슨 낙으로 마이크를 잡겠나. 아직 건재하다는 걸 이 자리에서 증명하길 바랐다.
‘뭘 망설여. 답은 하난데’
한편, 이인영은 차분히 3구를 기다렸다.
게스 히팅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경험이 쌓이다보니 다음 공이 뭐가 들어올지 대략 감이 온다.
초구는 빠른 볼, 2구는 몸 쪽 변화구, 카운트도 몰렸으니 투수는 이제 잔재주를 부릴 여유가 없다.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면 볼넷을 내줄 뿐, 백전노장은 도망치는 적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저 친구도 성공하긴 글렀군.’
결과는 볼넷, 스트라이크를 못 던지는 투수가 어떻게 성공을 하겠나.
한 달 전 메이저리그에 올라왔지만 얼마 못 가 사라질 선수, 기억할 가치도 없는 이름이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쨌든 경기는 계속 흘러 2대 1로 앞선 뉴욕의 3회 말 공격, 두 번째 타석을 맞이한 이인영은 초구를 기다렸다.
‘바깥쪽 공에 반응 없고, 몸 쪽 변화구도 소용없었어.’
시애틀의 선발 데니스 위어는 생각에 잠겼다.
어정쩡한 유인구가 통하지 않을 상대라는 건 첫 타석에서 눈치챘다. 그렇다면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들어갈 뿐, 포수도 같은 생각을 하면서 승부가 결정됐다.
[따아악~!!]
“어?! 가나요?!! 가나요?!!! 시청자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인영 선수의 시즌 첫 홈런이 터져나옵니다!!!!”
“정말 너무 오래 기다렸습니다!! 이제는 야구를 볼 맛이 나겠네요!!!!”
쏟아지는 관중의 환호, 우리가 얼마나 이 날을 기다렸던가.
더그아웃의 뉴욕 선수단도 박수를 아끼지 않았지만, 이인영은 별 반응 없이 홈을 밟았다.
어중간한 투수에게 홈런을 때려봤자 기량을 회복했다는 증거는 못 되겠지, 냉정한 타격은 다음 타석에서도 계속됐다.
[따악~!!]
“이번에는 밀어냈는데요!! 좌익수 앞에 떨어집니다!! 오늘 이인영 선수는 볼넷 포함 2타수 2안타!! 전 타석 출루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수 한 명이 돌아왔을 뿐인데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지잖아요. 역시 이인영 선수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뭔가가 있습니다. 이러니까 월드시리즈 우승을 3번이나 경험한 거죠.”
“저는 이 선수가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정도로 들뜨진 않겠습니다.”
이인영은 7회 말 4번째 타석에서도 볼넷을 걸러내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이 정도면 복귀전 치고 훌륭한 것 아닌가. 앤더슨 감독은 교체를 생각했지만 역전의 용사는 8회 말 1사 1 – 2루에서 다시 타석에 섰다.
딱~!!
유격수 정면으로 가는 타구, 2루 주자는 3루로 향했지만 1루 주자는 2루에서 잡혔다.
이인영도 최선을 다해 뛰었지만 아웃이 되면서 병살타, 아쉬운 마음에 헬멧을 집어던졌다.
땅볼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겠다는 말을 실천한 플레이, 거기다 발목 부상에서 복귀한 선수가 저렇게 열심히 뛰지 않았나.
뉴욕 팬들은 박수갈채를 보냈지만 이인영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날 경기는 9대 3 뉴욕의 완승으로 종료, 복귀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인영은 기자들의 질문에 휩싸였다.
“지금 뉴욕은 32승 37패로 동부지구 5위에 머물고 있습니다. 남은 경기에서 반등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질문은 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도 그게 얼마나 의미 없는 질문인지 알고 있잖아요?”
내가 무슨 점쟁이도 아니고 반등할지 못할지 어떻게 아나.
지금은 팀 승리보다 완전하지 않은 타격감을 회복하는 게 우선, 속마음을 털어놨다.
“제가 잘 쳐야 팀 성적도 올라가는 겁니다. 오늘 홈런을 치긴 했지만 타격감이 완전히 회복됐다는 말씀은 못 드리겠네요. 앞으로 팀에 대한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제가 신경 써야 할 건 그게 아니니까요.”
질문을 던진 기자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에 냈다.
복귀전에서 홈런을 쳤는데도 까칠한 반응, 하긴 마지막 타석에서 병살타를 쳤는데 기분이 좋을 리 있나.
상대는 안타 하나에도 죽기 살기로 달려든 선수, 이 정도 반응은 어느 정도 예상했어야 했다.
어쨌든 주축 타자가 복귀한 것만으로도 뉴욕 여론은 한숨 돌린 분위기, 뉴욕 팬들은 내일의 승리를 기대하며 야구장을 떠났다.
인터뷰를 마친 이인영도 클럽하우스에 복귀, 대기하고 있던 클러비가 잔심부름을 자처했다.
“그래봤자 팁 안 줄 거야.”
“내가 팁 때문에 이런다고 생각해?”
“솔직히 나만큼 팁 잘 주는 선수도 없잖아?”
주위에 있던 선수들은 피식 웃고 말았다.
연봉도 많이 받는 녀석이 틈만 나면 저 소리니, 하지만 1달러의 값어치를 알아야 성공한다는 말을 들은 터라 대꾸도 하지 못했다.
“자, 받아.”
“이거 나 줘도 되는 거야?”
“넌 팁 받을 자격이 있어. 그러니까 받아도 돼”
마이너리그에선 1달러도 쓰지 않았지만, 이인영은 여기서는 괜찮은 씀씀이를 보여줬다.
매 경기 선수들 뒤치다꺼리하느라 고생하는 직원들, 돈의 가치를 아는 만큼 투자할 가치가 있는 사람들에겐 구두쇠처럼 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