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최악의 시즌 (3)
[리차드 케이시 – 보스턴과 3년 6500만 달러 계약]
12월 23일, 뉴욕과의 8년 계약을 정산한 케이시는 보스턴 유니폼을 입었다.
케이시의 이탈은 예상은 했지만 하필이면 보스턴으로 갈 줄이야, 뉴욕 프랜차이즈 스타로 명예의 전당에 오른 로제리오 버넷은 케이시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연봉에 어울리는 선수는 아니었다. 평균보다 조금 나은 성적으로 뉴욕의 에이스가 됐고, 8년 계약 동안 구단의 관리를 받으면서도 이렇다 할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올해 포스트 시즌에서 무너지긴 했지만 어쨌든 월드시리즈 우승을 선물한 선수에게 너무 매정한 대우 아닌가.
문제는 뉴욕 여론이 로제리오의 말에 동조했다는 것, 비난이 계속되자 리차드 케이시는 코웃음을 쳤다.
“그 인간은 나이를 먹더니 헛소리가 늘었다. 평균보다 나은 투수가 에이스 노릇을 하는 게 뉴욕의 수준이라면 앞으로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는 일은 없을 거다.”
저주에 가까운 악담, 여기에 케이시는 이인영을 언급하며 뉴욕의 쇄락을 암시했다.
“그 친구는 뉴욕을 떠날 수밖에 없을 거다. 평균 밖에 못 되는 투수가 에이스 노릇을 하는 팀이 어떻게 우승을 할 수 있겠나? 뉴욕은 앞으로 긴 암흑기를 맞이할 것이고, 그 친구는 언제나 이기는 경기를 추구하기 때문에 팀을 떠날 것이다.”
여론은 케이시의 독설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인영은 아직 뉴욕과 8년 4억 8천만 달러 계약이 남아 있다. 부상을 당하면서 커리어가 불투명해졌는데 위험을 감수하고 옵트 아웃을 택할까.
문제는 뉴욕 구단의 태도, 8년 3억 달러 계약을 맺은 케이시가 떠났으니 이제 샐러리 캡에서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게 됐다.
노장을 치워내고 유망주 중심으로 팀을 재건한다고 해도, 최소한의 전력은 유지해야겠지. 이인영은 팀의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선수다.
그 가치를 인정한다면 트레이드나 옵트 아웃이라는 말은 입에 담아선 안 되겠지, 뭣보다 케이시의 비난은 뉴욕 구단의 결집으로 이어졌다.
“리(Lee)가 트레이드 되는 일은 없을 거다. 그가 옵트 아웃을 선택한다면 그것도 자유지만, 우리가 먼저 그를 저버리는 일은 없을 거다.”
플레어티 단장은 신속하게 선수를 쳤다.
케이시는 대체 할 수 있는 투수가 얼마든지 있지만 이인영은 그렇지 않다는 것, 햄스턴 구단주도 바통을 이어 받았다.
“케이시? 내 흐릿한 기억 속엔 실력에 비해 연봉만 잡아먹는 급료 도둑이었다. 뉴욕을 떠나줘서 너무 고맙고, 앞으로 구단 행사에서 그 얼굴을 볼 일은 없을 거다.”
그래도 29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함께한 멤버인데 구단 행사에 초대하지 않겠다니, 완전한 이별을 뜻하는 거 아닌가.
뉴욕 구단은 말로 그치지 않고 케이시와 관련된 흔적을 신속히 지워버렸다. 햄스턴 스퀘어 가든 외벽에 걸려 있는 옛 에이스의 얼굴을 치워냈고, 29번 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기념하는 사진에도 칼을 댔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숙청된 실력자를 지워내는 것처럼 철저하게 진행된 작업, 그만큼 뉴욕은 케이시의 발언에 배신감을 느꼈다.
그건 케이시도 마찬가지, 떠나는 선수에게 연봉에 비해 형편없는 선수라는 비난을 퍼부은 게 누구인가. 보란 듯이 갚아주겠다며 이를 갈았다.
뉴욕 현지도 다음 시즌은 무조건 우승해야 한다는 분위기, 기자들은 부상에서 회복 중인 이인영의 몸 상태를 예의주시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회복에 최대한 집중하고 있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부상이 당신의 커리어에 영향을 줄거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는데요. 그 의견에 동의하십니까?”
“근거 없는 말이라곤 못하겠네요. 발목은 생각보다 타격에 주는 영향이 크니까요.”
발목이 안 좋은 타자는 스트라이드를 조금 빨리하는 경향이 있다.
느린 공은 중심을 뒷발에 둬도 어느 정도 대응이 가능하지만 빠른 볼은 그게 어려운 게 사실, 특히 메이저리그처럼 평균 구속이 93마일을 넘는 무대라면 빠른 공 공략이 더 중요하다.
내가 타자인데 발목을 다쳤다면 어떻게 타이밍을 잡겠는가.
빠른 공에 대응하기 위해 스트라이드를 약간 빠르게 하겠지, 경험이 부족한 배터리라면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메이저리그에는 눈썰미가 좋은 포수들이 많다.
빠른 볼 타이밍에 변화구가 들어오면 타자는 생각을 많이 하기 마련, 이런 때가 정말 위험하다.
분명 나는 빠른 볼을 노리고 있는데, 변화구를 계속 생각하다보니 스트라이드를 줄였다 늘였다 하면서 타격 타이밍까지 흔들린다.
슬럼프는 이렇게 시작되는 것, 몸이 건강해야 정신도 흔들리지 않는다.
발목을 다쳤다고 소극적으로 행동한다면 타격 부진으로 이어질 뿐, 이인영은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할 거라는 입장을 드러냈다.
“팬들은 제가 하루 빨리 복귀하길 바라 겠지만, 어설픈 몸으로 복귀해 봤자 저는 물론 팀에도 좋을 게 없습니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완전히 회복해서 돌아오겠습니다.”
“복귀 시기는 대략 언제가 될 까요?”
“글쎄요. 의사와 더 대화를 나눠봐야겠지만 대략 7월 중순으로 보고 있습니다.”
질문을 던진 기자의 얼굴은 굳어졌다.
이게 사실이면 전반기를 통째로 날리는 거 아닌가. 그때까지 뉴욕이 순위 경쟁을 잘 버텨줄지도 의문, 불길한 예감은 빗겨가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 3월 27일, 일본에서 개막전을 맞이한 뉴욕은 모토니시 사부로를 마운드에 올렸다.
케이시를 대신해 뉴욕의 에이스로 성장해 줘야 하는 선수, 그런데 최고 100마일을 웃도는 구속이 3회 들어 88마일로 떨어졌다.
단순한 완급조절로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 앤더슨 감독은 급히 마운드에 올랐다.
“자네 혹시 어디 불편한가?”
“ … 솔직히 오른쪽 팔이 불편합니다.”
모토니시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작년 시즌 어느 정도 성과를 보였고 올해를 위해 많은 투자를 했는데 개막전부터 탈이 날 줄이야.
개막전부터 1선발을 잃어버린 뉴욕은 수렁에 빠졌다.
선발진이 붕괴 되면서 4월 25일 기준으로 불펜 투수 이닝 1위를 기록, 불펜에 과부하가 걸리면서 투수진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심지어 재활피칭을 하던 모토니시는 또 통증을 느끼고 MRI 촬영, 어깨 손상이 발견되면서 관절경 수술을 받게 됐다.
야수진도 엉망, 우익수 스캇 험프리는 수비 중 발목을 접질리는 부상을 당하면서 15일 짜리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중견수 몬테로는 종아리 부상으로 이탈, 이인영은 7월까지 복귀 불가능, 4번 타자 마이크 서튼도 부진으로 여론의 맹폭을 받았다.
5월 3일 기준으로 5할 승률(22승 24패)도 지키지 못하는 처량한 신세, 플레어티 단장은 비상 회의를 소집했다.
“이 기록을 봐. 이게 정상적인 팀인가?”
플레어티 단장은 측근들과 최근 경기를 낱낱이 분석했다.
최근 4경기에서 뉴욕은 한 번도 리드를 잡지 못했고 타선이 낸 점수는 6점, 이 중 5점이 9회에 나왔다.
막판에 선수들이 집중력을 발휘한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잔혹, 승패가 기운 상태에서 나온 그저그런 투수들을 상대로 점수를 낸 것 뿐이다.
초반에 점수를 내고 승기를 잡았던 작년과는 너무 다른 전개,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햄프리 – 몬테로 – 이인영으로 이어지는 살인 타선 라인이 무너졌는데, 어떻게 초반에 점수를 내나.
더 큰 문제는 지금부터, 어찌어찌 5할 승률 근처를 유지하고 있지만, 불펜진이 한계에 이르면서 대대적인 붕괴 조짐이 보이고 있다.
팬들은 당장의 승리를 원하는데 팀 사정은 시즌 접어야 하는 분위기, 돌파구는 없는 건가.
이때 현장에서 믿을 수 없는 소식이 들려왔다.
“복귀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벌써? 7월 중순이라고 하지 않았나?”
“회복이 빨리 예정보다 일찍 복귀해도 문제 없다고 합니다.”
“그거 정확한 진단이야? 확실하냐고?”
이인영이 복귀한다는 소식,
작년 시즌, 뛰어도 상관없다는 돌팔이 의사 말을 믿었다가 이인영은 더 큰 부상을 입었다.
의료진에 크게 데인 경험이 있는 플레어티 단장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 아무리 팀 상황이 안 좋아도 주축 선수를 성급히 복귀시킬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자기야, 정말 뛰어도 된데?”
“어, 어제 재촬영했는데 아무 문제 없었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좀 더 지켜봐.”
혜진 씨도 남편을 말리고 나섰다.
예상 완치 판정은 6월, 마이너리그에서 타격감을 조율하고 7월에 복귀하는 게 원래 계획이다.
예정보다 한 달이나 빨라진 복귀 계획, 하지만 주위의 반대에 막힌 이인영은 팀의 붕괴를 지켜봐야 했다.
[따악~!!]
“유격수 정면!! 아~ 이게 뭔가요?!! 실책이 나오면서 3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옵니다!! 8회의 동점 홈런이 물거품이 되는군요.”
“약팀의 전형적인 패턴이죠. 기껏 동점 홈런 쳐 놨는데 불펜이 방화 … 이런 경기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뉴욕이 최근 불펜 소모가 워낙 심했거든요. 어느 정도 예견된 비극이었습니다.”
5월 17일, 뉴욕은 디트로이트 원정에서 극적인 패배를 당했다.
8회 초까지 3대 1로 끌려갔지만 벤 자일스가 디트로이트의 철벽 불펜 호세 에르난데스에게 동점 투 런 홈런을 때려냈다.
드디어 8연패에서 벗어나는 건가.
하지만 희망도 잠시, 내야진의 실책이 나오면서 허무하게 재역전, 9연패를 당하면서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최하위로 내려앉았다.
[거 봐, 내 말이 맞잖아?]
보스턴의 에이스로 거듭난 케이시의 조롱은 덤,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한 뉴욕 팬들은 햄스턴 스퀘어 가든을 포위하고 시위를 벌였다.
가차 없이 내친 케이시는 보스턴에서 8승 2패 평균자책점 2.90을 기록하며 선전 중, 반면 뉴욕은 어떤가.
지금까지 투입된 선발투수만 12명, 이럴 거면 케이시를 왜 쫓아낸 건가. 대책은 세워놓고 선수를 내보내야지, 개막전 선발로 내세운 모토니시는 어깨 부상으로 시즌 아웃, 투입하는 유망주들도 다 실패했다.
거기다 완치 판정을 받은 이인영도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중, 올해는 그냥 포기하는 건가. 뭐든 해보라는 질책이 쏟아졌다.
“워싱턴 원정 경기에 합류하라고 합니다.”
“하아~ 너무 길었네요.”
6월 1일, 이인영은 드디어 출전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시애틀 산하 마이너리그 팀, 타코마 레이더스와의 원정 경기에 출정할 예정, 작년 10월 이후 8개월 동안 그라운드를 밟지 못했다.
집에 너무 오래 있었더니 몸이 근질근질할 지경, 다만 배가 점 점 불러오는 아내가 마음에 걸렸다.
“얼른 가.”
“가지 말라고 하더니 이젠 등을 떠미네?”
“그게 아니라 요즘 당신이 별로 행복해 보이질 않아서 … ”
혜진 씨는 그동안 남편을 유심히 지켜봤다.
내가 옆에 있으면 심심해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야구 선수는 그라운드에 있을 때 행복을 느끼는 건가.
밖에서 뛰어놀아야 할 아들을 집에 가둬놓은 느낌, 남편이 조금 더 옆에 있어주길 바랐지만 풀이 죽은 얼굴도 더는 보기 어려웠다.
“내 표정이 그렇게 암울했어?”
“그래, 무슨 감옥에 있는 사람 같았어.”
이인영은 아내의 말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최대한 내색 안 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티가 났나. 그렇다고 집에 있는 게 싫은 건 아니었다.
아이가 밖에서 신나게 뛰어놀아도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법, 당분간 집을 비우겠지만 결국 내가 돌아와야 할 곳은 여기 아니겠나.
아내에게 소소한 애정을 표했다.
“그럼 나갔다 올게.”
“어휴~ 제발 다치지 말고 와. 불안해 죽겠어.”
“원래 남자들은 놀다보면 다치고 그런 거야. 뭘 그런 걸 신경을 써.”
마지막까지 장난을 치고 가는 남편, 혜진 씨는 그 뒷모습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