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최악의 시즌 (2)
“무엇으로 드릴까요?”
“푸어 오버에 헤이즐넛 추가요. 다른 하나는 루이보스 에스프레소로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탈리안 소다도 하나요.”
“알겠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리(Lee)라고 합니다.”
이곳은 뉴욕의 평범한 카페, 계산대 직원은 곁눈질로 손님을 살폈다.
미국에서는 계산대 직원이 주문자의 이름을 묻는 경우가 많은데, 유명인은 대부분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길 꺼려해 가명을 쓰곤 한다.
하지만 이인영은 그런 건 신경쓰지 않는 편, 주문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다.
“자기야, 그냥 내가 주문할 걸 그랬나?”
“영어울렁증 있는 사람이 그런 말 해 봤자 설득력 없어.”
혜진 씨는 남편의 공격에 입을 비쭉 내밀었다. 그 힘든 임용고시도 합격했는데 왜 영어를 할 때마다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는 건지, 발목 수술을 한 지 얼마 안 되는 남편을 대신해 주문을 하려고 했는데 결국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주문할 때 어떻게 했어?”
“뭐가?”
“이름말이야, 가명 썼어?”
“아니, 그냥 내 이름 불렀어.”
혜진 씨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 남자는 주위 사람이 자기를 알아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건가. 하긴 호텔 예약도 본인 이름으로 하는데 커피 주문이라고 다르겠나.
어쨌든 가족들과 카페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낸 이인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이요.”
“그냥 가셔도 됩니다. 대신 사인 하나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런데 카페 주인이 의외의 제안을 했다.
카페 주인은 뉴욕의 골수팬으로 작년 시즌 팀을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이인영의 열렬한 팬이 됐다.
그런 선수에게 들러붙은 부상 악령, 힘내라는 뜻으로 커피 한잔 정도 대접 못 하겠나. 하지만 이인영은 그런 동정은 필요 없다고 손을 저었다.
“제가 불쌍해 보이세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저 … ”
“저는 커피를 얻어 마셔야 할 정도로 몰락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커피값은 지불 하겠습니다.”
가게 주인이 됐다고 했지만 이인영은 커피 값과 사인을 모두 제공했다.
연봉 6천만 달러를 받는 내가 타인의 동정을 받다니, 보란 듯이 재기할 때까지는 가게를 들릴 때마다 가명을 쓰기로 했다.
“자기는 그게 기분 나빠?”
“그냥 그래, 난 누구한테 동정 받는 거 싫어.”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혜진 씨는 옆좌석의 눈치를 살폈다.
남편은 잘 베푸는 성격인데 본인이 남에게 대접받으면 불편하게 여긴다. 자존심이 너무 강한 탓일까.
하긴 중요한 무대를 앞두고 부상을 당했는데 내색은 안 해도 속은 얼마나 쓰리겠나, 하지만 가족 앞에서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건 조금 서운했다.
연애할 때만해도 귀여운 면이 있었는데 출세하면서 사람이 약간 변했다고 해야 하나. 혜진 씨는 그게 불만이었다.
“자기는 남들한테 얕보이는 게 싫어?”
“응”
“그래도 가족 앞에서는 조금 약한 모습 보여도 괜찮잖아.”
“가장이 약해지면 가족들이 동요하는 거야.”
하지만 이인영도 나름 할 말은 있었다.
부상과 기량 하락 때문에 예정보다 일찍 은퇴하게 됐던 아버지, 은퇴 후 많이 힘들어 하셨고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 하셨다.
1년 남짓한 방황이었지만 아버지의 불안한 모습은 자녀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가족이 동요하지 않겠나.
그때부터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속으로 삭이고 말았고,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으로 변했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건 내가 험난한 세상을 버텨온 무기, 앞으로도 고칠 생각은 없었다.
“재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
“뭐가요?”
“아빠가 아파서 쉬고 있잖아. 무슨 생각이 들어?
혜진 씨는 아들에게 협공을 유도했다.
가족을 위해 지금까지 열심히 헌신해 온 아빠, 그럼 지금은 우리가 위로를 해드려야 하지 않을까.
뒷좌석에서 잠시 고민에 잠긴 재찬이는 목소리를 높였다.
“아빠, 미안해요.”
“뭐가?”
“아빠는 매일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데 저는 아빠한테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네요.”
이인영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서가 아니라 날 동정하는 시선을 참을 수가 없다고 해야 하나. 6살 밖에 안 된 녀석이 왜 이렇게 어른스럽게 구는 건지, 한편으론 씁쓸하기도 했다.
“넌 아빠한테 미안해 할 거 아무것도 없어. 아빠가 너한테 바라는 건 건강하고 밝게 자라는 것뿐이야.”
“아빠가 웃어야 제가 밝게 자라는 거 아닌가요?”
연타 공격에 머리가 어질어질, 어쨌든 가족들의 애교 공세 덕분에 씁쓸했던 기분이 조금은 풀렸다.
어쨌든 이렇게 마무리 된 시즌, 재활훈련에 전념하며 다음 시즌을 기약했다.
* * *
[뉴욕 월드시리즈 진출 실패]
[세대교체 필요할 듯]
10월 10일, 뉴욕의 통산 30번 째 월드시리즈 도전기는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ALDS에서 미네소타를 3승 무패로 쉽게 제압했지만 올 시즌 다크호스로 떠오른 탬파베이에게 ALCS에서 2승 4패로 무너져 내린 것, 특히 작년 시즌 우승을 이끈 주역들의 부진이 뼈아팠다.
작년 포스트 시즌에서 4승 무 패, 평균자책점 2.40을 기록한 리차드 케이시,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ALDS에서 미네소타를 잡아내는 활약을 했지만, ALCS 1차전에서 9타자를 상대로 안타 4개 - 볼넷 3개를 허용하며 6실점을 해버린 것, 40개 중 절반이 볼일 정도로 끔찍한 투구였다.
이어지는 5차전은 악몽 그 자체, 아웃카운트를 하나도 잡지 못하고 4실점 강판, ALCS에서 평균자책점 38.62를 기록했다.
작년과는 너무 달랐던 활약, 올해가 뉴욕과 맺은 8년 계약의 마지막이라 이번 부진은 더욱 뼈아팠다.
뉴욕 현지 분위기는 리차드와 이별을 하는 쪽으로 기울었고, 선수 본인도 이별을 부정하지 않았다.
에이스를 떠나보내게 된 뉴욕, 그 자리를 채워줄 선수를 어디서 구해오나. 팜에서는 보충이 불가능하다는 판정,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뉴욕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군림해온 마이크 서튼과 에드워드 칼슨,
마이크 서튼은 작년부터 지명타자로 출장하면서 타격만큼은 팀에 큰 보탬이 됐지만 올 시즌은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3할이 넘는 타율은 0.286까지 하락, 타율은 그렇다 쳐도 홈런 30개를 넘겼던 파워마저 하락했다.
전반기에 홈런 16개를 기록했지만 후반기 기록은 겨우 5개, 포스트 시즌에서도 부진은 계속됐다.
야구는 비즈니스, 언제까지 프랜차이즈 스타라는 이유만으로 끌고 가야 하나. 마이크 서튼도 인터뷰를 통해 착잡한 심정을 드러냈다.
“제가 이 팀에 큰 보탬이 못 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정든 팀을 떠나야 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서운한 감정은 없습니다. 저는 이 팀에서 메이저리거가 되는 영광을 누렸고 좋은 기억도 많으니까요. 야구는 비즈니스입니다. 팀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저는 앞으로도 뉴욕의 선수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담담했지만 왠지 서글프게 들리는 인터뷰, 구위 하락으로 고생하는 에드워드 칼슨도 서튼과 비슷한 입장을 내놨다.
젊은 선수들은 계속 치고 올라오는데 우리 같은 노장이 얼마나 버틸 수 있겠나. 서튼과 칼슨을 겨눴던 여론의 칼날은 이인영을 겨냥했다.
빨라도 내년 6월~ 7월에 복귀하는데, 그때까지 뉴욕은 성적을 유지할 수 있을까.
거기다 이인영은 내년 시즌에는 한국 나이로 35살에 접어드는 노장이다. 발목 부상을 잘 이겨내고 예전과 같은 모습을 보여줄지도 의문, 일각에서는 이인영이 내년 시즌 건재한 모습을 보이면 트레이드를 시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반응을 내놨다.
재정비가 필요한 뉴욕의 사정을 고려하면 연봉 6천만 달러를 받는 이인영은 뉴욕의 영웅이 아니라 짐이 될 신세, 1년 만에 이렇게 대접이 달라져도 되는 건가.
하지만 이게 현실, 아무 말 없이 재활훈련에 열중했다.
“임신이라고요?”
“네, 축하드립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12월, 이인영은 아내의 임신 소식을 접했다.
계획적인 사건은 아니고 어쩌다 보니 벌어진 해프닝, 심적으로 약간 내몰렸을 때 내려온 축복이라 기쁨은 더했다.
‘그래, 아직은 더 벌어야지.’
둘 째 소식은 몸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뭣 때문에 돈을 버는가. 내 가족을 위해서, 그리고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있다.
책임질 게 많은 사람은 약한 모습을 보일 여유도 없는 법, 재기를 위한 몸부림은 계속됐고 어느 날 의외의 전화를 받았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친하지도 않은 사람한테 왜 전화를 거냐? 또 혼나고 싶어?”
전화를 건 인물은 모토니시 사부로,
초반엔 많이 헤매는 모습을 보였지만 모토니시는 10승 7패, 평균자책점 3.72를 기록하며 메이저리그에 연착륙 했다.
리차드 케이시가 팀을 떠나면서 선발진이 얄팍해진 뉴욕, 내가 좀 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내년을 기약하며 훈련에 열중하는 중, 부상으로 잠시 팀을 이탈한 주축 선수에게도 관심을 보였다.
[요즘은 당신한테 구박을 받던 시절이 그립네요. 건강하게 돌아오세요.]
“너한테 그런 말 들을 정도로 몰락하지 않았으니까 쓸데없는 위로는 하지 말라고”
[저한테 뭔가 해주실 말은 없나요?]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건데?”
[당신이 없는 동안 제가 팀을 지탱해야 하잖아요. 팀을 잘 부탁한다는 말 정도는 해주시죠.]
이인영은 머리에 핏대를 세웠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어린놈이 팀의 주인 노릇을 하려는 건가. 뭣보다 날 대신하겠다는 말이 너무 괘씸했다.
“너 거기서 기다려, 내가 최대한 빨리 복귀할 테니까.”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하세요. 또 부상당하면 안 되니까요.]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건가.
내가 구박했던 자식이 머리 위로 기어오르는 기가 막힌 상황, 바로 쓴 소리를 날렸다.
“까불지 마라. 난 메이저리그에서 타격왕 7번에 MVP도 4번이나 차지했어. 이렇다 할 타이틀도 없는 너한테 그딴 소리 들을 처지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도 노력을 하는 거죠.]
“그래, 어디 해 보셔, 얼마나 하나.”
애송이의 도발 덕분에 재활훈련은 속도가 붙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그라운드로 달려가고 싶을 정도로 회복된 몸, 하지만 의사의 진단은 달랐다.
“앞으로도 절대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상태가 그 정도로 안 좋은 건가요?”
“노파심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발목뼈에 금이 가면서 인대가 손상된 부상,
수술을 집도한 의사는 파열된 인대뿐만 아니라 주변 조직을 재건하는 대공사를 치렀다.
부상 부위에 체중이 집중되는 걸 막기 위해 체중 실리는 부위를 옮기는 수술까지 플러스, 발목은 다른 신체 부위에 비해 얇고 별다른 조직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많은 근육과 연골이 톱니바퀴처럼 엮여 체중을 지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중 하나만 무너져도 몸을 지탱하는 건 불가능, 이인영은 발목에 4번이나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보강 공사를 하긴 했지만 또 무리하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환자는 의사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다.
“어쨌든 이제는 나이도 있으시니까. 절대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예 … 알겠습니다.”
이제는 나이도 있으시다는 말이 왜 이렇게 가슴에 박히는 걸까.
의식하면 진짜 나이를 먹은 거라고 하는데 생각할수록 씁쓸, 그래도 아직 마지막을 준비할 때는 아니지 않은가.
건강했다면 이런 말을 들을 이유도 없겠지, 재기하겠다는 의지는 더욱 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