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최악의 시즌 (1)
[따악~!!]
“그렇죠!! 그래요!!”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이인영 선수가 올 시즌 200번째 안타를 달성합니다!! MLB 통산 7번째 200안타 시즌!! 159경기 만에 달성해냅니다!!”
9월 27일, 이인영은 홈경기에서 의미 있는 기록을 달성했다.
리드 오프도 달성하기 힘든 200안타를 6년 연속으로 기록, 사방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졌지만 이를 지켜보는 플레어티 단장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정말 괜찮을까.’
지난 8월 21일, 이인영은 1루를 밟다 발목을 접질리는 부상을 입었다.
회복까지 3개월이 걸린다는 의사의 진단, 하지만 이인영은 한 달 넘게 출장을 강행해 왔다.
타격이나 수비에도 적지 않은 지장이 있을 텐데, 아무런 내색도 없이 저렇게 뛰는 게 가능한 건가. 하지만 팀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저 선수가 부상으로 이탈해 버린다면 팀은 물론 팬들이 입을 정신적 충격은 상당하겠지, 지금 이인영의 공백을 채울 수 있는 선수가 누가 있나.
올해만 쓸 것도 아니고 앞으로가 더 중요한 선수, 일단 지구 우승은 확정됐으니 남은 3경기는 쉬면서 몸을 다독여야겠지,
뉴욕은 부상 사실을 숨기고 포스트시즌을 대비해 주전들을 쉬게 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앞세웠다.
“일단은 뛰셔도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무리해서 좋을 건 없습니다.”
구단 전문의는 애매한 입장을 보였다.
십자인대 파열과 달리 발목 주변의 인대는 부상 회복이 빠른 편, 비수술로도 잘 낫기 때문에 수술보다 재활이 더 중요하다.
문제는 이인영이 발목 부상을 당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거, 한국에서 데뷔 시즌을 치를 때도 심각한 발목 부상을 당했다.
몇 년 후 열린 한국 시리즈에서도 발목 부상, 그리고 한동안 괜찮다가 이번에 같은 곳을 또 다쳤다.
문제는 이게 만성으로 악화될 지 자연적으로 회복될 지는 의사도 알 수 없다는 것, 판단까지 대략 3개월 정도는 걸린다.
정말 재수가 없으면 만성적 불안정성으로 이어지는데 이런 경우에는 수술이 필요, 만약 복합 파열이 일어나면 수술이 더 복잡해진다.
이인영은 일반인도 아니고 운동선수, 발목 인대 파열은 자연치료가 가능하지만 어지간하면 즉시 수술을 받는 게 결과가 좋은 경우가 더 많다.
문제는 수술을 받으면 그대로 시즌 아웃이라는 거, 연봉을 한두 푼 받는 것도 아니고 포스트 시즌이 눈앞인데 수술을 받아야 하나.
단장과 의견을 충분히 나눈 이인영은 아내와도 의견을 주고받았다.
“수술 받는 게 더 확실하데?”
“어, 그런데 당장은 큰 문제없다고 하고 … 나는 뛰고 싶거든?”
“수술 받아, 자기는 몸이 재산인데 왜 몸을 학대 해?”
혜진 씨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수술을 권했다.
한국 시절부터 자주 문제를 일으킨 발목, 만성으로 이어지면 정말 큰 일 아닌가. 다칠 거면 차라리 3~ 4개월 전에 다칠 것이지, 왜 포스트 시즌 앞두고 이런 불행이 벌어진 걸까.
수술과 출전을 사이에 두고 이인영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나 뛴다고 하면 화 낼 거야?”
“자기가 뛰고 싶어 하는 마음도 이해는 하는데, 다치지만 마. 다치면 나 정말 화낼 거야.”
“말은 이렇게 하고 나중에 펑펑 우는 거 아니야?”
“어휴~ 진짜 말 안 들어.”
아내의 따끔한 손찌검에 이인영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무모한 짓이라는 걸 알고도 뛰어야 하는 운동선수, 내 수술에 응원과 박수를 보내줄 팬들이 몇 명이나 있겠나.
아픈 것 자체가 죄, 일단 당장은 문제없다는 진단도 받았겠다, 예정대로 ALDS 출전을 강행했다.
상대팀은 막판 뒤집기가 보여준 미네소타, 8월 19일까지 와일드카드 레이스에서 8경기, 지구 순위 경쟁에서 시카고에 6경기 뒤지고 있었지만 9월에 22승 3패를 거두며 대역전극을 이뤄냈다.
여기서 뉴욕까지 잡아내고 ALCS에 진출한다면 역사에 남을 기적, 물론 뉴욕은 기적의 희생양이 될 마음 따윈 없었다.
“자, 1회 초 미네소타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타석에는 로니 레만스키, 올 시즌 타율 0.303, 홈런 27개, 79타점을 기록했습니다.”
“대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던 선수죠. 포스트시즌에서도 그 기세가 이어질 수 있을지 지켜보겠습니다.”
뉴욕의 선발은 리차드 케이시, 지난 7월 24일, 케이시는 미네소타 원정에서 홈런 2개를 맞았고 그 중 하나는 레만스키에게 허용했다.
좌측으로 타구를 날린 레만스키는 홈런 타구를 감상, 화가 난 케이시는 다음 타석에서 98마일 빠른 볼로 레만스키의 손목을 날려버렸다.
레만스키는 헬멧을 바닥에 내리 꽂으며 불만을 표출, 소리를 지르거나 마운드로 달려 나가지는 않았지만 양 팀 선수들이 달려 나오면서 심각한 분위기가 연출된 적이 있다.
메이저리그는 한 번 당한 건 반드시 갚아주는 무대,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따아악~!!
3구 타격, 홈런을 직감한 레만스키는 느긋한 스텝을 밟으며 1루로 향했다.
한편 뉴욕의 중견수 몬테로는 무리하게 타구를 쫓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 예상대로 타구는 펜스를 직접 때렸고, 뉴욕은 신속한 중계 플레이로 레만스키를 1루에 묶었다.
얄팍한 자존심이 불러온 결과, 1루에 안착한 레만스키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야 이 멍청아!! 지금 네가 산책할 때야?!!”
“너도 알잖아!! 난 저 자식한테 갚아줘야 할 게 있다고!!”
“승리로 갚아줘야 할 거 아냐?!! 홈런 치고 감상하는 게 복수냐?!!”
1회 초 공격이 끝나고, 미네소타 벤치는 레만스키의 안이한 태도에 분개했다.
평소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던 선수가 여기서 쓸데없는 멋을 부리다니, 결국 미네소타는 1회 초에 득점을 내지 못했다.
레만스키의 분노는 이해했지만 우리가 지금 집중해야 하는 건 승리, 그제야 레만스키는 동료들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내가 잠시 이성을 잃었나 봐. 다시는 이러지 않을 게”
“그래, 그러면 된 거야.”
평소 불성실 했던 것도 아니고 98마일 빠른 볼에 손목이 날아갈 뻔 했는데 본인은 얼마나 화가 났겠나. 그래도 지금은 승리가 우선, 재정비를 마친 미네소타는 1회 말 수비에 나섰다.
“무리해서 뛰진 말게.”
“알았다고요.”
한편, 뉴욕 진영에선 미네소타 진영과 전혀 다른 말이 오갔다.
산책주루로 질타를 받은 레만스키와 달리 이인영은 발목 부상을 안고 뛰는 입장, 설렁설렁 뛴다고 누가 이 선수를 욕할 수 있겠나.
철 없는 어린 아이를 밖으로 내보내는 기분, 앤더슨 감독은 불안한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자!! 이인영 선수가 ALDS 첫 타석을 맞이합니다!! 올 시즌 타율 0.347, 48홈런 139타점!! 올해도 역사에 남을 위대한 시즌이었습니다.”
“제가 눈이 높아진 탓일까요. 원래 이 정도는 했던 선수라 딱히 대단하다는 느낌은 들지가 않네요.”
“그런데 세부적으로 보면 올 시즌이 제일 좋았습니다. 필라델피아 시절처럼 50홈런을 넘긴 것도 아니고, 4할 타율에 도전했던 것도 아닌데 말이죠.”
팀에 가장 많은 득점을 안겨주는 선수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그 의문점에서 시작된 연구, 타자가 해야 할 일은 볼넷을 거르고 2루타나 홈런을 치는 건가.
타자를 평가할 때 오랫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타율, 그런데 간혹 3안타를 쳐도 득점이 안 나오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곤 한다.
즉 타자가 해야 할 일의 본질은 안타가 아니라 득점을 내는 것, 이런 기반으로 통계전문가들은 타자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 연구 결과로 나온 지표가 RC/27, 9회가 끝나는 27아웃을 기준으로 이 선수는 몇 점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이인영은 올 시즌 RC/27 12.23점을 기록했다.
이 선수에게 27아웃을 책임지면 12점 이상이 나온다는 뜻, 올 시즌 메이저리그에서 10점 이상을 넘긴 선수는 아무도 없다.
눈에 보이는 타격 지표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선수, 타석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상대 팀에 엄청난 압박을 가했다.
따악~!!
“와아아~!!”
가볍게 밀어낸 타구는 좌중간에 떨어졌다.
역대 6번째로 포스트시즌 통산 100안타 대열에 올라서는 순간, 하지만 이인영은 발목 쪽에 약간 통증을 느꼈다.
3일이나 쉬웠고 그동안 괜찮았는데 오늘은 유독 통증이 심한 편, 일단 참고 뛰었지만 3회 초, 수비를 하다 탈이 나고 말았다.
‘발이 안 움직인다.’
따라가서 잡아야 되는데 발이 안 따라주면서 타구를 놓치고 말았다.
평소라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앤더슨 감독은 그라운드에 뛰어들었다.
줄줄이 뛰어드는 구단 직원, 설마 했던 일이 벌어진 걸까. 뉴욕 선수들도 어두운 얼굴로 상황을 살폈다.
“괜찮나?”
“괜찮아요. 걸을 수 있어요.”
이인영은 부축을 거부하고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솔직히 걷는 것도 버겁지만 아픈 척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입장, 건재한 모습에 팬들은 안도의 박수를 보냈지만 더그아웃 뒤로 물러선 이인영은 코치진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나 X 된 것 같아요.”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자네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선수잖아. 그리고 이 정도 부상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잭 브라이드 코치는 애써 불안감을 감췄다.
괜찮은 척 했지만 절대 괜찮지 않은 주축 선수의 이탈, 이 와중에도 이인영은 팀 승리를 걱정했다.
치료를 받으면서도 시시각각 경기 진행을 확인, 다행히 뉴욕은 5대 1 승리를 거뒀고 경기가 끝난 후, 플레어티 단장은 기자들 앞에서 그동안 숨겼던 사실을 털어놨다.
“리(Lee)는 지난 8월 말에 발목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 동안 잘 버텨왔지만 결국 탈이 난 것 같습니다.”
“부상은 심각한 가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일단 수술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3개월만 지나면 예전처럼 활약할 수 있을 겁니다.”
플레어티 단장은 여론의 우려에도 선을 그었다.
그동안 솔선수범하며 팀을 이끌어온 이인영, 그 기운을 받았는지 뉴욕 선수단엔 누구처럼 게으름이나 요령을 피우는 선수가 없다.
패배를 모르고 달려온 미네소타를 가볍게 꺾은 게 그 증거, 이인영의 이탈은 뼈아프지만 야구를 대하는 그 선수의 열정은 앞으로도 선수들과 함께 할 거라며 우승을 자신했다.
“음 … 이거 안 되겠는데요.”
“뭐가 또 문제가 있습니까?”
“발목에 미세 골절이 발견됐습니다. 시즌 복귀는 생각보다 늦어질 수도 있을 것 같군요.”
하지만 정밀 진단 결과, 이인영의 몸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예전엔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부상이 발견 된 것, 발목에 골절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출장 따윈 하지도 않았을 거다.
도대체 검사를 어떻게 했길래 이런 결과가 나온 건지, 화가 머리끝까지 난 햄스턴 구단주는 팀 닥터를 해고해버렸다.
이건 명백한 인재(人災), 멍청한 의사의 진단 때문에 우리는 최고의 선수를 내년 6월까지 볼 수 없게 됐다며 한탄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 이인영은 SNS를 통해 담담한 심정을 밝혔다.
내년 6월까지는 건강하게 돌아오겠다는 것, 내년에 받을 연봉 6천만 달러 중 1천만 달러를 자진 반납했다.
내년 시즌에 최소 40~ 50경기를 날려 먹게 됐는데 6천만 달러를 어떻게 다 먹나. 양심이 있으면 약간 뱉어내야겠지, 이렇게 그라운드와 잠시 이별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