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예능과 현실 사이 (3)
“음 … 다시 볼입니다. 카운트는 투 볼 투 스트라이크”
“지금 64개를 던지고 있는데 볼이 29개거든요. 이런데 무슨 투구가 되겠습니까.”
이곳은 뉴욕의 홈구장 햄스턴 스퀘어 가든, 시즌 7번 째 등판에 나선 리차드 케이시는 시카고를 맞아 어려운 경기를 치렀다.
최고 구속은 101마일이 찍힐 정도로 좋지만 포수가 요구한 방향과 전혀 다른 길로 새는 공,
첫 이닝부터 솔로 홈런을 허용하며 불안하게 출루하더니, 2회 1사 이후에는 안타 – 볼넷 – 적시타 – 볼넷 – 적시타를 반복하며 추가 실점, 3회도 넘기기 전에 투구 수는 70개에 육박했다.
흔히 스포츠를 하려면 운동 신경이 좋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도 운동 신경의 일부분이다.
똑같은 자세에서 공을 던지고 치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일관성이 없는 투구폼에서 나오는 공은 타자 눈에 금세 띄기 마련, 특히 리차드 케이시는 여러 구종을 다양하게 구사하는 투수가 아니라 일관성을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하다.
100마일을 넘나드는 포심과 슬라이더, 단순하지만 확실한 무기로 타자를 압도하는 스타일, 제구만 잡히면 그날은 언터쳐블에 가깝다.
작년 포스트시즌에서도 증명된 구위, 하지만 오늘 시카고 타자들은 일관성 없는 케이시의 투구를 철저히 구별해냈다.
‘나도 저 꼴 되면 안 되는데’
모토니시는 긴장한 얼굴로 경기를 지켜봤다.
이번 시리즈 마지막 경기에 선발 등판이 잡혀 있는 입장, 투구 스타일만 따지면 모토니시는 리차드 케이시와 비슷하다.
구속으로 찍어누르는 게 가능했던 NPB와 달리 선구안이 살아 있는 메이저리그 타자들, 내일 경기는 잘 해낼 수 있을까.
어쨌든 겨우 겨우 3회를 넘긴 리차드 케이시는 더그아웃으로 물러났고, 뉴욕의 3회 말 반격이 시작됐다.
“자, 이제 뉴욕의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선두 타자는 8번 타자 모토니시 사부로, 올 시즌 타율 0.225, 홈런 4개, 12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제 경기에서 투 런 홈런을 치면서 11경기 만에 장타를 추가했죠. 그나마 희망이 보이는 건 최근 14경기에서 삼진 17개를 당하는 동안 볼넷도 11개를 골라냈다는 겁니다.”
“어쨌든 볼넷이 많아졌다는 건 조금씩 적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기본적인 파워는 확실한 선수라 계속 기회를 받고 있는 거겠죠.”
모토니시는 초구, 낮은 공을 골라냈다.
내 약점이 낮은 공이라는 걸 알고 있는 배터리, 여기까진 극복해 냈지만 몸 쪽 빠른 공은 여전히 적응을 못하고 있다.
메이저리그 선발 투수의 평균 신장은 194cm, 이것만 보면 높은 타점에서 공이 날아온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실제로 보면 생각보다 낮은 곳에서 공이 날아온다.
190이 넘는 선수가 마운드에 올라섰는데 공을 놓는 지점을 굳이 높게 잡을 이유가 있나. 그렇게 안 해도 타자 눈엔 하늘에서 공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문제는 제구와 무브먼트, 커터와 삼진 위주의 투구가 중시되면서 투수들의 릴리스 포인트는 점 점 낮아졌다.
옆으로 휘고 뒤틀리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공, 특히 몸쪽으로 바짝 붙었다가 스트라이크 존으로 빨려 들어가는 무빙 패스트볼에 모토니시는 혀를 내둘렀다.
몇 번을 봐도 적응이 안 되는 공, 히팅 포인트를 전혀 잡지 못했다.
[딱~!!]
“바깥쪽, 파울입니다. 카운트는 투 볼 투 스트라이크”
“낮은 공은 어느 정도 극복을 한 것 같은데, 좌우를 흔드는 투구에는 여전히 약점을 보이네요. 이제는 선구안이라는 개념을 재정립할 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박한우 위원은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예전엔 타자들에게 빠른 볼과 비슷하게 날아오는 체인지업, 슬라이더를 구별해 내는 능력이 요구됐다.
문제는 홈런이 늘어나면서 투수들의 대응책도 바뀌었다는 것,
슬라이더는 제대로 던지면 삼진을 보장하지만 실투가 되면 스트라이크 존 바깥 쪽으로 도망치질 못한다. 결국 맞을 수 밖에 없는 운명, 홈런 시대에 맞춰 투수들은 스트라이크 존에서 확실히 도망칠 수 있는 구종을 던지기 시작했다.
사무국이 무릎 근처까지 내려갔던 스트라이크 존을 끌어올린 건 우연일까. 이제 타자들에겐 바깥쪽 공을 공략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해졌다.
바깥쪽 공을 계속 공략해 온 이인영에겐 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다른 타자들에겐 큰 시련으로 다가온 스트라이크 존 변화,
온갖 역경을 극복해 온 역전의 용사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과제를 이제 막 발을 들인 애송이가 극복할 수 있을까.
이상과 현실의 차는 명확했다.
딱~!
밀어쳤지만 힘이 실리지 않으면서 유격수 정면, 땅볼로 물러난 모토니시는 동료들의 타격을 지켜봤다.
‘나만 못 치는 거 아닌데 뭐 … 아닌가?’
바깥쪽 공에 애를 먹는 건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
하지만 2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스캇 햄프리는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를 만들어냈다. 다음 타자 몬테로도 바깥쪽 공을 잘 골라내며 볼넷, 이인영이 타석에 들어섰다.
[딱~!]
“파울입니다. 역시 이번 타석도 공격적으로 나오고 있네요.”
“잘 보시면 중심이 작년에 비해 낮아졌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빠른 공에 좀 더 반응을 하겠다는 뜻이죠.”
이인영의 타격 폼은 작년에 비해 약간 달라졌다.
방망이를 세우는 특유의 자세는 작년과 같지만 타격 할 때 중심을 낮춰 몸을 빠르게 회전하는 자세로 바뀌었다.
3할 5푼, 30홈런 이상을 밥 먹듯이 치는 선수가 유행에 맞춰 변화를 택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박한우 위원은 언제나 변화하고 노력하는 자세를 높게 평가했다.
‘이 친구는 나이를 거꾸로 먹나?’
포수 마스크를 쓴 산체스는 곁눈질로 상대를 살폈다.
이인영은 한 때 필라델피아에서 같은 유니폼을 입은 선수, 그때는 전문가들에게 스윙이 너무 느려 빠른 공에 대처할 수 없다는 악평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선수가 20대 시절보다 스윙이 빨라졌다면 믿겠는가. 아무리 봐도 신기한 녀석, 조금 더 바깥쪽으로 공을 뺐다.
따악~!!
“와아아아~!!”
허리를 낮추면서 빠르게 돌아나온 스윙, 2루 주자 험프리가 홈으로 들어오면서 뉴욕은 추격을 개시했다.
바깥쪽으로 공 2개 반 이상을 뺐는데 이걸 때려버리다니, 산체스는 물론이고 안타를 허용한 투수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러니까 3할 5푼을 치지.’
한편, 모토니시는 대타자의 기술에 혀를 내둘렀다.
일본에서도 저런 타격을 하는 선수가 없었던 아닌데, 일본엔 저렇게 빠르고 무브먼트가 심한 공을 던지는 투수가 없다.
어지간한 타자는 땅볼이 될 공을 외야로 날려 보내다니, 타격은 저런 사람이 하는 건가. 감히 따라갈 자신이 없었다.
‘더는 못 하겠다. 나에겐 불가능한 일이야.’
이날, 모토니시는 타격을 포기했다.
타격을 너무 좋아해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일, 경기가 끝난 후 감독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그럼 이제부터 투구에만 집중하겠다는 건가?”
“네.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제가 할 수 없다는 걸 말이죠.”
앤더슨 감독은 모토니시의 뜻을 받아들였다.
어제 홈런을 치긴 했지만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기엔 너무 부족한 기술, 그리고 단장이 처음부터 투수력을 보고 데려온 선수다.
37.66까지 올랐던 평균자책점도 최근 활약으로 9.00까지 떨어졌고, 투구에만 집중한다면 가능성이 보이는 선수, 모토니시가 타격을 포기한 덕분에 뉴욕은 더 많은 야수 유망주를 활용할 수 있게 됐다.
“정말 타격을 포기하시는 겁니까?”
“예, 지금까지 제가 했던 짓은 야구가 아니라 장난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다음 날, 모토니시는 일본인 기자들 앞에서 입장을 분명히 했다.
투타겸업 선언 덕분에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누구 말대로 예능을 할 생각이 아니라면 살아남는 길을 택해야 할 때, 하루를 쉬고 시리즈 마지막 등판을 준비했다.
* * *
[이인영, 타구 스피드 더 좋아졌다]
[34세에 회춘?]
시카고와의 3연전 중 2번째 경기가 끝났다.
여론의 관심사는 이인영의 시즌 12호 홈런, 117마일(188km)로 날아간 타구는 햄스턴 스퀘어 가든 좌중간을 가로질렀다.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물론 영상으로 경기를 지켜본 세계 각지의 야구팬들도 입을 다물지 못한 한 방, 전성기를 지나도 이상하지 않은 선수가 이런 타격을 하고 있으니, 전문가들은 시간을 반대로 달리는 선수라며 극찬을 표했다.
“저도 사람입니다. 파워가 약간 떨어지는 것 같아서 자세를 조금 수정했는데 좋은 결과가 나온 것 뿐입니다.”
여론의 칭찬이 쏟아졌지만 반응은 겸손했다.
확실히 이인영은 뉴욕에 입성하면서 약간 아쉬운 장타력을 보였다.
40홈런을 넘겼지만 타자에게 유리한 홈구장 덕을 본 게 사실, 월드시리즈에서도 결정적인 한 방을 날렸지만, 포스트 시즌 12경기를 치르면서 홈런은 1개 밖에 때려내질 못했다.
이대로 방치하면 내년 시즌에는 장타력이 크게 떨어질지도 모를 일, 그래서 변화를 택했을 뿐이다.
나도 사람인데 나이를 안 먹겠나.
변화가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지만 노력한 만큼 따라온 결과, 지금 활약에 만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제가 나이는 먹었지만 그만큼 기술은 더욱 무르익었다고 자신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활약 기대해주십시오.”
이 인터뷰는 한국 팬들의 웃음과 서운함을 유발했다.
슈퍼 루키로 칭송 받던 선수 입에서 나이가 먹었다는 말이 나오다니, 그 만큼 세월이 흘렀다는 건가.
이 위대한 선수의 활약을 앞으로 몇 년이나 지켜볼 수 있을지, 미국 여론도 이인영의 마지막을 예측했다.
[이 선수의 에이징 커브는 다른 선수들보다 느리고 완만하다. 앞으로 6년을 부상 없이 뛴다고 가정하면, 대략 432홈런으로 커리어를 마칠 것으로 예상 된다.]
이인영은 지금까지 한국과 미국에서 518홈런을 때려냈다.
한국에서 때려낸 절반을 떼어낸다고 해도 432홈런이면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만한 성과다.
뭣보다 7년 연속 3할 4푼 이상 – 단축 시즌으로 치러진 2028 시즌을 제외하면 6시즌 모두 200안타를 돌파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전성기와 비슷한 활약은 기대하기 어렵겠지만 어쨌든 한 시대를 대표하는 선수로 부족함이 없는 조건, 하지만 이인영은 전문가들의 성급한 예측은 신경쓰지 않았다.
내가 메이저리그에서 500홈런 채울지 누가 아나. 내 미래는 내가 써내려가는 것, 남들의 예측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자, 모토바시 사부로 선수가 시즌 6번째 등판에 나섭니다. 올 시즌 승패 없이 평균자책점 9.00, 27이닝 동안 볼넷 11개, 탈삼진은 31개를 잡아내고 있습니다.”
“그나마 최근 3경기 성적은 봐줄만 하죠. 거기다 본인이 야수를 포기했기 때문에 좀 더 나은 활약을 해 줄 것으로 예상합니다.”
모토바시는 이 날 평소 잘 쓰지 않는 스플리터를 제 2구종으로 택했다.
그런데 사실 스플리터는 투심과 거의 비슷한 공이다.
다만 실밥 바로 옆쪽을 잡아서 손가락 끝이 가죽면으로 오게 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 일본에서 뛰던 시절 모토바시는 자신이 스플리터를 던진다고 생각했지만 미국에 오면서 그게 투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뭘 어떻게 던져야 하는지 이제는 알겠어.’
깨달음은 변화로 이어졌다.
스트라이드를 좁힌 만큼 구위가 따라온다는 잭 브라이드 코치의 조언을 받아들였고, 덕분에 상체의 흔들림이 적어지면서 볼넷도 줄었다.
문제는 스트라이드가 짧아진 만큼 타자들이 느끼는 체감 구속이 줄어들었다는 것, 이 단점을 보완해 줄 수 있는 게 스플리터처럼 움직이는 투심이었다.
“자네 투심은 이 지점까지는 빠른 볼과 거의 비슷하게 움직인다고, 슬라이더 대신 투심을 좀 더 활용해 보게.”
“알겠습니다.”
주무기였던 슬라이더를 줄이고 투심을 장착하면서 일어난 변화, 진짜 야구를 하게 된 모토바시는 확실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