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예능과 현실 사이 (2)
“떨어지는 공, 따라 나옵니다.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전혀 컨택이 안 되네요. 첫 타석과 똑같은 패턴인데 전혀 따라오질 못하고 있습니다.”
4월 25일, 뉴욕은 미네소타의 홈구장 크레이폴드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치렀다.
모노티시 사부로는 이날 우익수 겸 6번 타자로 출장, 4월 13일까지 타율 0.268, 홈런 3개로 그럭저럭 괜찮은 활약을 보였지만 이후 부진에 빠지며 타율이 0.221까지 하락했다.
문제는 헛스윙이 너무 많다는 것, 작년 시즌 일본에서도 타율 0.335를 기록했지만 332타석에서 삼진을 84개나 당했다.
MLB에서는 더욱 심각, 컨택률은 66%(메이저리그 평균 79%) 밖에 안 되고 특히 몸 쪽 높은 공에 헛스윙률 49.7%를 기록하고 있다.
힘 있는 타자에게 몸 쪽 승부를 잘 하지 않는 NPB 투수들과 달리 몸 쪽 승부를 두려워하지 않는 메이저리그 투수들, 거기다 더 빠르고 크게 휘는 구위에 모토니시는 정신을 못 차렸다.
몸 쪽에 빠른 공을 붙이고 바깥쪽 낮게 떨어지는 변화구, 똑같은 패턴에 도대체 몇 번을 당하는 건가.
앤더슨 감독도 더는 못 봐주겠다는 표정, 결국 모토니시는 바깥쪽 빠른 볼에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57타석에서 삼진만 23개, 하루 이틀도 아니라 코치들도 그러려니 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건 내가 생각했던 결과가 아닌데.’
모토니시는 풀이 죽은 얼굴로 경기를 지켜봤다.
24살에 도전장을 던진 메이저리그 무대, 나는 너무 서둘렀던 걸까.
NPB에서 다승왕이나 홈런왕, 이렇다 할 타이틀도 차지하지 못했는데 의욕만 앞세운 건 아닌지, 그렇다고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약점이 있으면 보충해서 극복해면 되는 일, 동료들의 활약을 지켜보며 답을 찾아갔다.
“자, 이제 벤 자일스 선수의 타석입니다. 오늘 첫 타석에서 2루타, 7경기 연속 안타 행진을 이어갔습니다.”
“자일스 선수는 확실히 한 단계 성장했죠. 이제는 투수들도 낮은 공 구사를 꺼리고 있습니다.”
작년 시즌, 마이크 서튼이 지명타자로 나서면서 벤 자일스가 주전 포수 자리를 차지했다.
안정적인 수비에 공격도 나쁘지 않은 활약(타율 0.273, 홈런 12개), 하지만 자일스는 시즌 막판에 낮은 공에 약점을 보였고 포스트 시즌에서도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했다.
수비가 좋은 선수는 벤치멤버로 남을 뿐, 살아남기 위해선 공격력을 갖춰야 했고 자일스는 오프 시즌 동안 나름대로 해법을 찾아 나섰다.
‘그래, 나 낮은 공 못 쳐. 그래서 뭐 어쩌라고?’
자일스는 낮은 공을 무리하게 치기보다는 선구안을 가다듬는 길을 택했다.
약점은 드러내고 강점을 살려주는 방법을 택한 것, 최근 메이저리그는 473평방 인치까지 확대한 스트라이크 존을 줄였고, 낮은 공을 잘 안 잡아주는 쪽으로 변화했다.
그런데 굳이 무리하게 낮은 공을 공략해야 하나.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자일스는 지금까지 홈런 없이 타율 0.333으로 순항하는 중, 앤더슨 감독도 자일스의 활약에 만족감을 보였다.
“낮은 공!! 골라냅니다. 카운트는 투 볼 원 스트라이크”
“이런 걸 보면 메이저리그 타자들이 대단하긴 합니다. 따라 나올 법도 한데 골라내거든요. 임선우 위원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도 메이저리그에서 선수생활을 할 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파워만 좋은 게 아니라 컨택 능력 선구안도 정말 뛰어나거든요. 제가 KBO나 NPB의 수준을 비하하는 게 아니라, 이곳에서 주전으로 뛰는 선수들은 그냥 레벨이 다릅니다.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에요.”
[따아악~!!]
“자!! 말씀 드리는 사이!! 걷어낸 타구가!! 우측 높은 곳으로!! 사라집니다!! 벤 자일스의 시즌 1호 홈런!! 21경기 만에 터져 나옵니다!! 스코어 2대 2 동점!! 뉴욕이 경기를 원점으로 돌려놓습니다!!”
우익수가 반응도 하지 못한 벼락같은 홈런,
시즌 첫 번 째 장타 맛을 본 자일스는 동료들과 기쁨의 하이파이브를 주고받았다.
슬럼프에 허덕이는 애송이의 기를 죽이는 한 방, 모토니시도 축하 대열에 합류했지만 진심으로 웃지 못했다.
팀이 잘 나가도 내가 못하면 어두워 보이는 세상, 나만 혼자 다른 곳 세상에 있는 것 같아 마음은 편치 않았다.
자일스의 홈런으로 균형을 맞춘 뉴욕은 기세를 몰아 반격에 나섰고, 2사 주자 만루에서 이인영이 타석에 들어섰다.
올해 미국 나이로 33살이 된 선수, 이제 하락세를 타야 할 나이인데 작년과 전혀 변한 게 없다.
21경기에서 타율 0.332 – 32안타 – 6홈런 - 18타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한가. 앤더슨 감독은 치면 좋고 못 치면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마음을 비웠다.
“바깥쪽 볼입니다. 카운트는 노 볼 원 스트라이크”
“첫 타석보다 더 먼 곳으로 던지고 있네요. 역시 장타를 의식하는 걸까요?”
“이인영 선수는 장타에 얽매이는 선수가 아닙니다. 득점권이라도 밀어쳐서 짧은 안타를 만들어 내거든요. 이런 타격 성향 때문에 배터리가 바깥쪽 공도 마음 놓고 던질 수가 없는 거죠.”
박한우 위원의 말대로 미네소타 배터리는 타격 그 자체를 의식했다.
이인영은 메이저리그에서 손꼽히는 컨택 능력을 지닌 선수, 올 시즌도 컨택률 92.3%로 메이저리그 전체 1위다.
쌍끌이 어선처럼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오는 공은 다 잡아버리니, 득점권 상황에서 만나면 배터리 입장에선 지옥, 유인구를 던져도 골라내는 선구안까지 갖췄으니 상대하기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그래도 반드시 잡아야 하는 상대, 각오를 다진 투수는 승부를 걸었다.
따아악~!!
몸 쪽 높은 92마일 빠른 볼, 타구를 쫓던 중견수는 추격을 포기했다.
크레이폴드 스타디움 센터 담장을 넘어가는 대형홈런, 시즌 7호 아치를 만루 홈런으로 장식한 이인영은 홈을 밟은 동료들과 손뼉을 마주쳤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기며 더그아웃에 입성하는 스타, 모토니시는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사람이 너무 빛나 보인다고 해야 하나, 나는 선풍기만 돌리는데 저 사람은 보란 듯이 몸 쪽 공을 담장 너머로 날려 보내고 있으니, 립 서비스라도 저런 선수와 비교됐다는 게 창피했다.
어쨌든 그럭저럭 흘러간 하루, 이날 3타수 무안타 삼만 2개를 당한 모토니시는 자기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다음에는 잘 할 수 있을 거라며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 풀이 죽은 거울 속의 얼굴에 한숨을 쉬었다.
“너 이러다 올해 100세이브 하는 거 아니냐?”
“그러다간 내 팔이 버티질 못 한다고”
남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뉴욕 선수단은 농담을 나눴다.
오늘 뉴욕은 이인영의 만루 홈런으로 6대 2까지 도망갔지만 막판에 불펜이 불을 지르면서 7대 4까지 추격을 허용했다.
뒷문을 책임진 선수는 존 비글리, 작년 포스트 시즌에서 두각을 드러낸 비글리는 삼진 2개를 곁들이며 시즌 11세이브를 거뒀다.
팀이 21경기를 치렀는데 벌써 11세이브, 뉴욕은 올 시즌 2점 차 승부에서 8승 무패, 100% 승률을 달성했다.
탈삼진에 특화된 커터를 제대로 활용하면서 특급 마무리로 거듭난 비글리 덕분, 이때 마이크 서튼이 농담에 끼어들었다.
“지금 많이 올려둬, 앞으로는 세이브 올리기 힘들 테니까.”
“왜?”
“메이저리그 최고의 타자들이 여기에 있잖아. 이번 달 같은 호황기는 다시 오지 않을 거야.”
“적당히 치라고 내가 눈에 띌 기회가 줄어드니까.”
비글리는 자연스럽게 동료들과 대화를 주고받았다.
동료들이 잘 치는 것도 기뻐할 일이지만 그럼 내가 눈에 띌 기회가 없지 않나.
메이저리거 2년 차에 접어든 신인이지만 월드시리즈 우승에 기여하면서 뉴욕의 일원으로 인정받은 비글리, 반면 활약도 없고 말도 안 통하는 모토니시는 무리에 어울리지 못했다.
“너 오늘 3타수 무안타지?”
이때, 가슴을 사정없이 후벼 파는 폭언이 날아들었다.
누구나 했더니 그 선수, 통역을 맡은 트래비스 이시이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너 3일 연속 3타수 무안타다. 뭐 느끼는 거 없어? 그렇게 하라고 감독이 6번에 기용하는 줄 알아?”
통역의 해석에 모토니시는 입을 다물었다. 웃고 떠들던 동료들도 입을 다물면서 정적이 흐르는 클럽하우스, 눈치를 살피던 잭 브라이드 코치가 앞으로 나섰다.
“이 친구도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고, 너무 그렇게 몰아세우지 말게”
“무슨 노력을 해요? 같은 패턴에 삼진 20개 당하는 게 노력입니까?”
낮은 공에 계속 헛스윙을 하는 모토니시, 메이저리그 스트라이크 존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안다면 절대 그렇게 스윙을 하면 안 된다.
하위 타선에 박혀 있으면 모르겠는데 6번에서 득점권 기회는 다 날려먹고 있으니, 그 여파로 불펜 투수들이 많은 등판을 소화하고 있다.
그렇다고 투구를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2경기 선발 등판을 치렀지만 평균자책점은 37.66, 타석에서는 2할 초반에 삼진 머신, 도대체 뭐 하자는 건가.
타격이든 투구든 하나라도 제대로 하라며 열을 냈다.
“공이 안 맞으면 가서 비디오라도 돌려봐 멍청아!! 투타겸업? 사람들 웃기고 싶으면 넌 장소를 잘 못 찾은 거야. 여긴 네 생각처럼 만만한 곳이 아니라고, 알았어?!!”
만루 홈런도 쳤는데 오늘 따라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이인영, 큰소리에 놀란 앤더슨 감독도 감독실에서 뛰쳐나왔다.
“아니, 도대체 무슨 일인가?”
“당신이 저 자식한테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한 것 뿐입니다.”
이인영은 모토니시를 한 번 쳐다보고 샤워실로 향했다.
이렇게까지 사람을 몰아세워도 되는 건가. 자존심이 상한 모토니시는 클럽하우스에서 나가버렸고, 통역도 급히 뒤를 따라났다.
“도대체 뭐야 그 녀석!! 뭐냐고?!!”
인적이 드문 곳에 처박힌 모토니시는 울분을 토했다.
나도 나름대로 노력을 하고 있는데 저렇게 대 놓고 무안을 줄 것까진 없지 않나. 정말 내게 개인적인 감정이라도 품은 건 아닐지, 하지만 통역 트래비스 이시이는 그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겉으로는 저래도 널 은근 신경 쓰고 있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브라이드 코치한테 너 신경 좀 쓰라고 조언한 사람이 리(Lee)거든, 널 정말 미워하면 그런 소리도 안 했을 거라고”
모토니시는 그제야 브라이드 코치가 왜 내게 신경을 써줬는지 이해했다.
그리고 냉정히 따져보면 투구 – 타격 모두 엉망 아닌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똑같은 패턴에 당하는 건 노력이 아니라는 말도 가슴에 박혔다.
‘나는 왜 계속 삼진을 당하는 거지?’
하다 보면 좋아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는 버렸다.
열심히만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무대, 일본의 천재 야구선수라는 칭찬에 익숙해 져 있던 모토니시는 자신을 냉정하게 되돌아 봤다.
던지는 공은 가운데로 몰리고 타석에선 낮은 공에 연신 따라 나오는 방망이, 이날부터 비디오 분석실에서 구단 직원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사실 비디오 분석은 일본야구와 거리가 먼 분야다.
분석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더그아웃에서 너무 먼 곳에 있고, 심지어 DVD를 보려면 선수가 노트북을 직접 들고 다녀야 했다.
일부 구단은 휴대폰을 통해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그건 정말 일부 구단에 한정된 일, 그리고 문제점이 있으면 코치가 지적을 해주니 선수들이 직접 자신의 타격이나 투구를 지켜보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좋다.
뭣보다 모토니시는 일본에서 프로 생활을 하는 동안 이렇다 할 부진이 없었고 잠깐 부진해도 바로 털어냈다.
하지만 차원이 다른 메이저리그, 살아남기 위해선 지금까지 내가 했던 노력이 아니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