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263화 (263/309)

263화. 거짓말은 안 한다 (14)

“자, 이제 10회 초 뉴욕의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세인트루이스는 리카르도 마르티네스 선수를 올리는군요. 이번 월드시리즈에서 한 경기 등판, 승패 없이 2이닝 무실점을 기록했습니다.”

“뉴욕은 몬테로 선수 타석부터 시작되거든요. 최근 타선이 가라앉아 있지만 기대가 되는 건 사실입니다.”

월드시리즈에서 팀 타율 0.245, wRC+89 에 그치고 있는 뉴욕, 정규시즌(0.278, wRC+119)에 비하면 타선이 가라앉아 있다.

그래도 메이저리그 최강의 공격력을 보유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몬테로는 최근 8타석에서 안타가 없지만 앤더슨 감독은 대타를 기용하지 않았다.

나는 막연한 기대감을 앞세우는 건가.

누군가 그렇게 묻는다면 정규시즌에서 20홈런 이상을 때려준 선수를 함부로 교체할 수 있냐는 답을 할 뿐, 이번에는 해줄 거라고 믿었다.

따악~!!

“그렇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아니!! 이제 끝이야!!”

몬테로는 바깥쪽 공을 밀어쳐 1루를 선점했다.

다음 타자는 이인영, 뉴욕 선수들은 쐐기를 박는 한 방을 기대한 반면 세인트루이스 진영은 불안에 휩싸였다.

“자, 여기서 다시 투수를 교체하는데요. 리카르도 선수가 내려가고 앤드류 제닝스 선수가 마운드에 오릅니다.”

“흔히 좌우 놀이라고 하죠. 존 월터 감독이 그런 투수기용을 하는 감독은 아닌데, 지금은 어쩔 수 없습니다. 맞으면 끝이니까요.”

올 시즌 이인영은 좌완 상대로 0.359를 기록했다.

좌우놀이가 의미가 없는 성적, 다만 좌투 상대 OPS(0.914)가 우완을 상대(1.19)했을 때보다 떨어진다.

장타를 맞을 확률을 조금이라도 낮춰보겠다는 의도, 이인영은 평소처럼 바깥쪽 공을 노리고 타석에 들어섰다.

초구는 볼, 바깥쪽만 노리는 투수보다 상대하기 쉬운 게 또 있을까. 상황은 진지한데 침대 위에 누운 것처럼 편안한 얼굴, 믿음직한 모습에 뉴욕 진영은 더욱 기대를 걸었다.

“발을 풀어봅니다. 쉽게 던지질 못하네요.”

“이인영 선수가 3년 연속 월드시리즈를 치르고 있는데, 16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꾸준하게 활약을 했는지 기록으로 보여주고 있죠.”

세인트루이스 배터리는 신중히 사인을 주고 받았다.

여기서 볼넷으로 내보내면 오늘 홈런이 있는 마이크 서튼을 상대해야 되는데 어느 쪽이든 부담이 되는 건 마찬가지, 일단 카운트를 잡는 게 낫지 않을까.

이인영은 그 의도를 꿰뚫었다.

따아악~!!

제대로 걸린 타구는 좌측 담장 너머로 날아갔다.

홈런을 직감한 1루 주자 몬테로는 두 팔을 번쩍 든 채 2루로, 세인트루이스의 좌익수 윌리 화이트는 마지막까지 추격의 고삐를 놓치지 않았다.

“안 돼!!”

“이쪽으로 온다!!”

“저리 가!! 저리 가라고!!”

담장 근처를 기웃거리던 홈팬들은 폭탄이라도 날아든 것처럼 혼비백산, 그 사이 화이트는 담장 앞에서 날아올랐다.

담장 위를 넘어가는 타구를 걷어낸 슈퍼 캐치, 몬테로는 급히 1루로 향했지만 세인트루이스 야수진의 중계플레이에 비명횡사 당했다.

역전 홈런이 병살타로 둔갑하는 기가 막힌 순간, 프로 경력 13년에 접어든 이인영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단체 멘붕에 빠진 뉴욕 진영, 대기 타석에 서 있던 마이크 서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 … 마이크 서튼 선수가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섭니다… 저희가 꿈을 꾼 게 아닐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건 그렇고 몬테로 선수의 주루는 이해가 안 되네요. 2루까지 가는 건 그렇다고 쳐도, 지금은 3루까지 갈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동안 좋은 주루플레이를 보여줬던 선수라 너무 안타깝습니다.”

얄굳게도 여기서 마이크 서튼이 좌중간을 가르는 2루타를 날렸다.

이번에는 윌리 화이트가 손을 쓸 수 없는 타구, 몬테로만 죽지 않았어도 역전이 됐을 텐데 후속타자가 범타로 물러나면서 뉴욕의 우승은 다음 기회로 미뤄졌다.

이어지는 세인트루이스의 10회 말 공격, 뉴욕은 에드워드 칼슨을 마운드에 올렸다.

ALCS에서 부진했지만 지금까지 뉴욕의 뒷문을 지켜준 든든한 존재,

하지만 테드 반디의 기적 같은 9회 말 동점 홈런 – 10회 초 뉴욕의 불운이 겹치면서 분위기는 세인트루이스 쪽으로 넘어간 상황, 경력 8년에 접어든 베테랑도 이런 위기를 넘기는 건 쉽지 않았다.

선두 타자 윌리 화이트에게 안타를 맞으면서 무사 주자 1루, 다음 타자 호세 라스웰을 삼진으로 잡았지만 다시 볼넷을 내주면서 1사 주자 1 – 2루 위기에 몰렸다.

“자, 이제 카를로스 호이트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오늘 3타수 2안타 볼넷까지 얻어내면서 순도 높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선 도망가면 안 됩니다. 더 공격적으로 던져야 돼요.”

임선우 위원의 말대로 에드워드 칼슨은 초구를 잡아냈다.

94마일 빠른 볼, 한 번 뺄 만도 한데 칼슨은 2구를 몸쪽으로 붙여 파울을 유도했다.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여기서 베테랑의 진가가 발휘됐다.

“납작한 커브!! 들어 왔다는 판정입니다!! 삼진!!!! 카를로스 호이트를 얼려 버립니다!!!!”

“이야~ 여기서 바로 승부를 하네요. 호이트 선수는 하나 정도 빼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은데, 마지막까지 스트라이크 존을 공격합니다. 역시 전사라는 별명이 부끄럽지 않은 선수에요.”

특별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햄스턴 구단주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공격적인 투구로 카운트를 잡는 칼슨, 칭찬에 인색한 햄스턴 구단주가 직접 전사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다.

ALCS에서 무너졌던 신뢰를 회복하는 활약, 칼슨은 다음 타자까지 삼진으로 잡아내며 세인트루이스의 희망을 잠재웠다.

이제 11회로 이어지는 월드시리즈 4차전, 한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간 양 팀은 승기를 잡지 못했다.

그렇게 경기는 12회 초, 천국 앞에서 미끄러진 영웅이 타석에 들어섰다.

‘여기서 이기면 난 빚 없는 거다.’

타석에 서기 전, 이인영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한 선수에 6억 달러를 투자한 뉴욕, 3년 안에 우승을 달성하기 위해 승부수를 던졌다. 여기서 그 목적을 이룬다면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2년 뒤에 옵트 아웃을 실행할 수 있겠지.

서로 윈 윈 했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누구도 아닌 날 위해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세인트루이스 배터리는 벤치 사인을 기다렸다.

상대는 마땅한 공략법이 없는 타자,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감독의 판단에 의지했다.

‘나도 모르겠어.’

존 월터 감독은 판단을 보류했다. 공략법이 있다면 벌써 지시를 내렸겠지, 이번에도 운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돼!! 이게 볼이라고?!!”

“이봐 심판!! 제대로 보라고!!”

초구는 볼, 사방에서 팬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세인트루이스 벤치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 반면 이인영은 태연하게 다음 공을 기다렸다.

“자, 다시 한 번 보시죠. 지금은 무릎에서 약간 높은 코스 같기도 한데, 어쨌든 판정의 권한은 주심에게 있는 거니까요.”

“작년 시즌 스트라이크 존 넓이가 평방 478인치였는데, 올 시즌은 468인치로 줄었거든요. 지금 공은 올 시즌 기준으로 안 잡아주는 게 맞습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올 시즌 무릎 아래까지 낮췄던 스트라이크 존을 끌어올렸다.

지속적으로 스트라이크 존을 확장시켜 왔던 정책에 제동을 건 것,

그런데 왜 10회 말, 카를로스 호이트는 납작한 커브에 루킹 삼진 아웃 판정을 받은 건가.

세인트루이스 입장에선 억울할 수도 있는 판정, 하지만 모든 걸 애제자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박한우 위원은 볼이 맞다며 태세전환에 나섰다.

회심의 초구가 볼 판정을 받으면서 절벽에 몰린 세인트루이스, 다음 공은 바깥쪽으로 던져 스트라이크 콜을 끌어냈다.

바깥쪽은 확실히 후한 주심, 하지만 이것도 기복이 있는 편이라 배터리는 결정을 내리질 못했다.

‘그래, 다시 한 번 던져보자.’

선택은 바깥쪽 떨어지는 유인구, 체인지업에 회전이 걸리면서 가운데로 말려들어갔다.

따아악~!!!!

공이 손가락에 채일 때부터 예감했던 비극, 투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이인영은 멀어지는 타구를 바라보며 배트를 내던졌다.

이번엔 누구도 잡을 수 없는 포물선, 결정적인 한방이 나오면서 분위기는 뉴욕으로 기울었다.

야구를 종교처럼 떠받드는 세인트루이스 팬들에겐 받아들이기 어려운 장면, 9회 말 동점 홈런을 날린 영웅도 할 말을 잃었다.

‘나는 같은 선수에게 두 번이나 막히는 건가.’

5년 전, 테드 반디는 필라델피아 유니폼을 입은 이인영에게 월드시리즈에서 한 번 막힌 경험이 있다.

그때는 코흘리개 신인이었지만 이제는 팀을 대표하는 선수, 오늘도 패배한다면 나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켜준 팬들을 위해서라도 여기서 주저앉을 순 없었다. 이어지는 세인트루이스의 12회 말 공격, 테드 반디의 등장에 홈팬들은 다시 기대를 걸었다.

“낮은 공, 아 … 잡아주는데요? 사방에서 야유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박한우 위원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지금 공은 뭔가 문제가 있는 거 아닙니까?”

“제가 이끄는 팀이 이런 판정을 받았다면 당장 뛰쳐나갔겠죠. 하지만 지금은 웃으면 되는 겁니다. 웃으세요.”

오늘도 기대를 저버리지는 뻔뻔하고 유쾌한 해설, 반면 테드 반디의 귀는 붉게 물들었다.

왜 우리에게만 이런 불리한 판정을 내리는 건지, 그대로 돌아서서 주심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었지만 일단 참았다.

2구는 빗맞으면서 파울, 3구 낮은 공을 걷어 올렸지만 내야를 벗어나지 못했다. 조금 더 가까워진 패배, 더그아웃으로 향하던 테드 반디는 꾹 눌렀던 감정을 뿜어냈다.

“자네는 안 돼!!”

“아직 경기 끝난 거 아니라고!!”

세인트루이스 코치진은 미쳐 날뛰는 테드 반디를 막아섰다.

이러다 동점타가 나올지 누가 아나, 테드 반디가 빠지는 건 치명적, 대신 존 월터 감독이 주심과 말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별 다른 성과는 없었고 세인트루이스는 홈에서 뉴욕의 통산 30번째 우승을 지켜봐야 했다.

4전 전패를 당했으니 딱히 할 말은 없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주심의 판정, 몇 몇 팬들이 그라운드 난입을 시도하다 경찰에 체포되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건 말건 뉴욕은 축제 분위기, 결승 홈런을 쳐 낸 이인영은 통산 2번 째 월드시리즈 트로피를 높게 들어올렸다.

“리(Lee), 올해도 월드시리즈 우승을 달성하셨는데 소감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뉴욕은 이날을 위해 제게 6억 달러 계약을 안겨줬습니다. 그리고 저는 팬들에게 3년 안에 우승을 하지 못하면 그 계약은 의미가 없다는 말을 했죠. 이렇게 우승을 달성했으니 마음 놓고 옵트 아웃을 실행할 수 있겠네요. 그게 가장 기쁩니다.”

1루 관중석에서 환호를 보내던 뉴욕 팬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보통 이런 자리에선 팬들이나 가족, 구단 관계자, 그리고 동료들에게 감사를 표하지 않나?

그런데 옵트 아웃을 운운하다니, 질문을 던진 캐스터도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당신은 벌써부터 뉴욕과의 이별을 준비하는 겁니까?”

“제가 평생 계약을 맺은 사람은 아내뿐입니다. 올해 우승 했다고 제가 앞으로도 뉴욕에 남을 거라는 생각했다면 오산입니다.”

여러모로 충격적이었던 월드시리즈 우승 소감,

햄스턴 구단주는 그토록 원하던 우승을 달성했지만 또 다른 고민을 안고 한해를 마무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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