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262화 (262/309)

262화. 거짓말은 안 한다 (13)

“어서 날 1인자로 만들라고.”

비글리가 자일스 포수와 사인을 주고받는 동안 이인영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역사를 살펴보면 군사 – 정치 – 외교를 다 책임진 사기적인 군주도 있었지만 유명한 신하의 도움을 받아 명군에 오른 사람도 있다.

스포츠 세계에도 적용되는 원리, 이인영은 지금까지 한국시리즈 1회 우승 - 월드시리즈 2회 우승을 맛봤지만 본인이 주역이 된 건 4년 전 겪은 월드시리즈 뿐이다.

동료가 잘해야 내가 득을 보는 법, 구위로 찍으라는 눈빛을 날렸다.

[딱~!!]

“다시 파울입니다. 오~ 지금은 98마일이 나왔습니다.”

“비글리 선수가 공식 최고 구속은 96마일이지만 마이너리그 기록을 살펴보면 최대 100마일, 평균 96마일까지 던진 적이 있습니다.”

“딜리버리를 손보면서 일어난 현상이죠. 실제로 구속을 약간 포기하고 무브먼트와 디셉션에 신경을 쓰면서 성적이 더 좋아졌습니다.”

비글리는 마이너리그 시절부터 빠른 볼을 한복판으로 밀어 넣는 투구를 했다.

가운데로 던져도 우타자 바깥쪽으로 휘기 때문에 많은 삼진을 잡을 수 있었던 것, 하지만 빠른 볼 비율이 워낙 높은 데다 별다른 특징이 없는 딜리버리 때문에 간파당하기 쉽다는 지적도 받았다.

특히 빠른 볼을 가운데로 밀어 넣는 전략은 손가락에 힘이 덜 걸리면 그대로 실투성 공이 된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메이저리그 승격 후에도 꾸준히 지적받은 문제, 하지만 비글리는 자신의 장점을 꾸준히 밀고 나갔다.

제구가 조금 떨어져도 구위는 정상급, 전문가들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내 장점을 살리는 방향으로 가는 게 정상, 맞더라도 밀어붙이는 배짱을 보여줬다.

“집중해!! 집중!!”

앤더슨 감독은 외야진에 추가 주문을 넣었다.

비글리는 삼진에 특화된 선수라 땅볼 비율이 높지 않은 편, 올 시즌 평균자책점 3.77을 기록 했지만 수비 무관 평균자책점은 3.00으로 나쁘지 않았다.

내야진보다 외야진의 도움이 필요한 투수, 지켜보는 팬들도 이 승부가 땅볼로 끝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와아아아~!!!!”

결정구는 바깥쪽 높은 빠른 볼, 헛스윙 삼진을 이끌어 낸 비글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셔널리그 최강의 타자를 잡아낼 정도면 내 구위가 먹힌다는 뜻, 자신감을 얻은 루키는 후속 타자들도 깔끔하게 정리하고 이닝을 마쳤다.

필승 계투 에드워드 칼슨이 구위 하락으로 고전하는 상황에서 비글리의 깜짝 활약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마찬가지, 기세를 잡은 뉴욕은 1차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무려 24년 만에 맛보는 월드시리즈 1승, 자리에서 일어난 햄스턴 구단주는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선수단에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빌어먹을 … 너무 오래 걸렸어 … 너무 오래 걸렸다고 … ”

49살에 구단을 인수하고 3년 만에 맛 본 월드 챔피언, 그때까지만 해도 월드시리즈 우승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1승을 추가하기까지 이렇게 많은 시간이 걸릴 줄이야.

세상에 무서울 게 없고 오만한 성격으로 악명이 높은 햄스턴도 이날만큼은 경건한 마음을 유지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 기자들 앞에서 1승 정도로 기뻐할 때가 아니라는 입장을 유지했다.

“오늘의 승리는 누구 덕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의 투자 덕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때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기자가 공격적인 질문을 던졌다.

햄스턴 구단주는 아랫사람에게 욕을 입에 달고 살아온 인간, 20년도 더 지난 사건이지만 연봉 값을 못한 선수에게 인신공격에 가까운 악담을 퍼부어 소송에 휘말린 적도 있다.

비공식적인 사건이지만, 자기에게 밉보인 선수가 8실점을 해도 강판 하지 못하도록 감독에게 압력을 넣었다는 소문도 있을 정도, 어쨌든 구단을 위해 투자는 아끼지 않지만 선수들을 승리를 위한 소모품 취급한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이런 사람에게 월드시리즈 우승이라는 영광이 돌아가도 되는 걸까.

이번 승리가 선수들의 활약 덕분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의문, 그 의도를 파악한 햄스턴 구단주는 비아냥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는 알겠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왜냐고? 내 입이 걸레라면 너는 걸레에서 떨어져 나오는 먼지를 받아먹고 사는 떨거지니까. 나는 너 같은 놈에게 밥줄이 될 기사거리를 줄 생각이 없어. 그러니까 내 앞에서 꺼지라고”

“저는 기자로서 이런 질문을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너희들의 권리 따윈 신경 안 써. 그러니까 이 X 같은 인터뷰를 끝낼 거야.”

오늘도 한 건 크게 저지른 햄스턴 구단주, 권위적인 태도에 다른 일부 여론은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인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 사람을 악인이라고 특정하고 질문을 던지는데 누가 기분 좋게 인터뷰에 응하겠나. 이인영은 구단주가 문제가 아니라 질문을 던진 기자들의 태도를 지적했다.

“혹시 당신은 구단주의 눈치를 보는 겁니까?”

분위기 파악 못 하는 기자, 이인영은 피식 웃으며 맞대응했다.

“상대를 기분 좋게 하는 것도 능력입니다. 나쁘게 말하면 아부라고도 하죠. 하지만 적당한 아부는 살다 보면 필요한 능력입니다. 당신처럼 사사건건 따지고 들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죠. 아침에 밥을 차려준 아내 앞에서 음식 맛이 어떻다 저렇다 따지면 당신에게 이득이 될 게 있겠습니까? 내일 아내 앞에서 음식 맛이 없다고 투정해 보세요. 아마 햄스턴 구단주의 욕설은 애교로 들릴 걸요?”

정곡을 찌르는 발언,

1승을 하고 나름 기분 좋게 인터뷰에 나선 구단주에게 그런 식으로 질문을 하면 누가 좋아하나.

원인 제공을 하고도 오히려 뻔뻔하게 구는 인간들, 기세를 잡은 이인영은 쐐기를 박아버렸다.

“질문을 하는 게 기자의 권리라고요? 우리가 언제나 당신들이 원하는 답을 해줄 거라는 착각은 하지 마세요. 질문을 하는 게 당신들의 권리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권위적이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햄스턴 구단주를 욕하기 전에 본인부터 돌아보길 바랍니다. 아시겠습니까?”

거의 대변인에 가까운 발언, 햄스턴 구단주는 어느 때보다 큰 감동을 느꼈다.

내 심정을 이렇게 잘 정리해서 대변해 주다니, 측근에게 그 친구가 여자였다면 당장 청혼했을 거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자기야, 내가 해 준 아침 맛없었어?”

“아니 왜?”

“그런데 왜 인터뷰에서 그런 말 했어? 솔직하게 말해 봐.”

하지만 구단주의 대변인은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그냥 예를 든 것뿐인데 아내의 오해를 사게 된 것, 이인영은 말이 그런 것뿐이라고 둘러댔다.

“그럼 이거 먹어 봐.”

“그래, 얼마든지”

이인영은 태연하게 아침 밥상을 비워냈다.

맛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정도면 되는 거 아닌가. 경기장에선 입이 거친 편이지만 가정의 평화를 위해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맛있어?”

“왜 자꾸 그런 걸 물어봐 기자들처럼”

“맛이 없구나….”

“아~ 정말… 당신의 정성이 최고의 반찬이야.”

어쩌다 내가 이런 얼굴 뜨거워지는 말까지 하게 된 건지, 어쨌든 이인영은 아내를 다독여 가정의 평화를 지켜냈다.

1차전 승리 덕분에 가벼운 마음으로 나서는 출근길, 그런데 구단 직원이 클럽하우스 근처에서 뭔가를 슬쩍 찔러줬다.

“이거 뭡니까?”

“보스의 성의입니다.”

이인영은 봉투를 슬쩍 열어봤다.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내용물, 이걸 받아도 되는 건가. 당신이 입만 다물면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 속삭임에 이인영은 입을 꾹 닫았다.

* * *

“자, 이제 9회 말 세인트루이스의 정규 이닝 마지막 공격입니다. 마운드에는 존 비글리, 지옥의 종소리가 귀에 울려 퍼지는 것 같군요.”

“세인트루이스 입장에선 그렇겠죠. 어쨌든 이번 월드시리즈 최고의 슈퍼스타라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시간은 흘러 10월 27일, 뉴욕과 세인트루이스의 4차전 경기가 열렸다.

앞선 3경기를 모두 잡아낸 뉴욕은 우승까지 1승을 남겨둔 입장,

1차전 구원 등판을 시작으로 3차전에서 세이브를 기록한 비글리는 4차전까지 마무리를 책임지는 영광을 누렸다.

현재 상황은 2대 1 뉴욕의 아슬아슬한 리드, 2시간 40분 동안 자리를 지킨 홈팬들은 기적이 일어나길 간절히 기도했다.

1차전 2대 0, 2차전 4대 2, 3차전 3대 1, 이번 월드시리즈는 유독 점수가 나지 않고 있다.

간발의 차로 매번 승리를 놓친 세인트루이스는 말 그대로 환장할 입장, 이번 시리즈에서 11타수 1안타 부진에 빠진 테드 반디는 각오를 다지고 타석에 섰다.

“스윙!! 크게 헛칩니다.”

“비글리 선수의 커터는 대단하네요. 이번 월드시리즈에서 헛스윙율이 무려 57.1%입니다.”

“빠른 볼을 슬라이더처럼 쓰기 때문에 탈삼진율이 높을 수밖에 없죠. 테드 반디 선수도 전혀 공략을 못 하고 있습니다.”

2구는 커트가 되면서 파울,

털모자를 뒤집어 쓴 어린 팬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다음 공은 심장이 떨려서 못 볼 지경, 그래도 옆에 앉은 아빠는 아들을 다독였다.

“괜찮아. 테드가 그동안 안타를 못 친 건 지금 홈런을 치기 위해서였으니까.”

“정말이요?”

“그래”

“정말이요? 약속할 수 있어요?”

아들의 추궁에 아버지는 답을 하지 못했다.

내가 타석에 선 것도 아닌데 아들에게 그런 약속을 해도 되는 건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아들의 눈빛 공격에 할 말을 잃었다.

따아악~!!!!

“와아아아~!!!!!”

그런데 이때 기적이 벌어졌다.

시리즈 내내 완벽한 제구를 보여준 비글리의 빠른 볼이 가운데로 몰렸고, 테드 반디는 이걸 놓치지 않았다.

11타수 1안타 부진에 허덕이던 선수가 동점 홈런이라니, 세인트루이스 홈팬들이 열광에 빠진 동안 비글리는 마음속으로 욕설을 수십 번 내질렀다.

“자 다시 보시죠. 99마일, 빠른 볼이었는데 가운데로 몰렸어요.”

“비글리 선수가 1차전에서도 갑자기 구속을 끌어올려 타이밍을 뺏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는데, 정황상 지금은 실투 같아요. 회전이 덜 걸렸습니다.”

빠져야 할 공이 가운데로 몰리면서 일어난 참사, 기왕 벌어진 일인데 어쩌겠나.

앤더슨 감독은 침묵에 빠진 벤치를 다독였고, 특별석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던 햄스턴 구단주도 대수롭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ALCS부터 철벽투구로 팀 승리를 지켜준 선수, 오늘 한 경기 무너졌다고 탓 할 수 있겠나.

기자들은 날 선수들을 소모품 취급하는 냉혈한으로 몰고 있지만, 비즈니스가 원래 그런 거 아닌가.

다른 구단도 쓸모없는 선수는 쳐내고 냉정하게 사업을 운영하는데, 왜 나만 욕을 먹어야 하는 건가. 뭣보다 비글리는 팀의 미래를 위해 관심을 주고 지켜봐야 하는 선수, 야구는 비즈니스지만 햄스턴 구단주는 품어야 할 선수와 쳐내야 할 선수는 확실히 가렸다.

“스윙!! 비글리 선수가 잭 브라이드를 삼진으로 돌려세웁니다.”

“지금처럼 바깥쪽으로 휘어 들어갔어야 했는데 말이죠. 하아~ 그 실투 하나가 경기를 이렇게 끌고 갑니다.”

비글리는 나머지 타자들을 모두 삼진 처리하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하지만 테드 반디에게 맞은 홈런은 어떤 변명으로도 지울 수 없는 실책, 비글리는 동료들의 위로도 외면하고 더그아웃 뒤쪽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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