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거짓말은 안 한다 (10)
따악…!!
계속되는 ALCS 5차전, 5대 0으로 앞서가며 우세를 점했다.
오늘 경기만 이기면 2009년 이후 23년 만의 월드시리즈 진출, 이날을 손꼽아 기다려온 뉴욕 관계자들은 클럽하우스에 샴페인을 실어 날랐다.
너무 일찍 분위기를 내는 건 아닌가라는 시선이 없는 건 아니지만, 오늘 리차드 케이시는 6회까지 무실점 - 삼진 8개를 잡아내며 호투 중, 거기다 뉴욕의 불펜이 약한 것도 아니라 패배라는 단어가 떠오르질 않았다.
‘조금 일찍 내릴까?’
한편, 특별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플레어티 단장은 생각에 잠겼다.
케이시는 투구 수만 관리해주면 제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선수, 오늘도 6회까지 91개를 던지며 제 역할을 다 하고 있다.
7회까지 올리는 건 무리수, 일찌감치 불펜을 투입해 경기를 마무리 할까 했지만 더그아웃에선 전혀 다른 얘기가 오갔다.
“7회에도 던질 수 있습니다.”
“정말인가?”
“그럼요. 오늘은 힘이 넘친다고요.”
개릿 앤더슨 감독은 케이시의 자신감을 믿었다.
1차전에서도 6이닝 동안 제 몫을 다 한 케이시, 오늘도 압도적인 구위로 보스턴 타선을 찍어누르고 있다.
어중간한 불펜을 투입하느니 감이 좋은 케이시를 내버려두는 게 낫겠지,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 불펜을 비워두진 않았다.
“자, 지금 뉴욕의 불펜이 보이는데요. 에드워드 칼슨과 존 비글리가 몸을 풀고 있습니다.”
“칼슨은 리그 정상급 셋업맨인지만 비글리 선수는 올해 22살 어린 투수거든요. 여기서 케이시가 흔들리면 칼슨이 올라올 것 같습니다.”
보스턴 현지 중계석이 힘 없는 해설을 이어가는 동안, 기적이 벌어졌다.
선두 타자 안톤 포드의 2루타, 저메인 슬라븐의 1타점 적시타가 터지면서 스코어는 5대 1,
앤더슨 감독은 급히 에드워드 칼슨을 투입했지만 후속 타자 에릭 브라운의 2루타 – 조슈아 파머의 연속 안타가 터지면서 뉴욕은 수세에 몰렸다.
관리가 필요한 케이시를 7회에도 올린 건 어쩔 수 없다고 쳐도 믿었던 에드워드 칼슨의 붕괴는 바람직하지 않은 시나리오, 앤더슨 감독은 고심을 거듭했다.
“뭐라고 하나?”
“비글리로 교체하라는데요.”
플레어티 단장의 선택은 비글리, 22살 밖에 안 된 어린 투수가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겠나.
비글리가 나이에 비해 좋은 구위를 가진 건 사실, 하지만 앤더슨 감독은 루키보다 베테랑을 신뢰했다.
[따악…!!]
“자!! 이 타구는 … 다시 한번 우중간을 가릅니다!! 1루 주자는 2루를 돌아 3루로!! 중견수가 공을 더듬는 사이 득점!! 타자 주자는 3루까지 들어갑니다!! 보스턴의 대 반격!! 20세기 최다 우승팀의 저력을 보여줍니다!! 스코어 5대 3!! 보스턴이 턱 밑까지 추격을 개시합니다!!”
“폭스로브 스타디움의 굴곡진 외야가 이런 결과를 불러오네요. 사실 이게 1루 주자가 홈까지 들어올 타구는 아니었거든요.”
5연속 안타가 나오면서 급격히 뒤바뀐 흐름, 불펜에서 몸을 풀던 비글리는 서둘러 마운드에 올랐다.
상황은 노 아웃 주자 3루, 만용으로 팀을 위기에 몰아넣은 앤더슨 감독은 초조한 얼굴로 경기를 지켜봤다.
‘이런 게 야구 아니겠어.’
비글리는 후속 타자 세 명을 모두 범타 처리하는 기염을 토했고, 이인영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앤더슨 감독이 약간 고집을 피운 건 사실이지만, 이런 상황에선 누구나 베테랑 에드워드 칼슨을 믿었을 거다.
사람은 미래를 알 수 없는데 모든 걸 결과로 증명해야 하는 게 인생, 그래서 출세와 성공이 어려운 것 아니겠나.
우승을 하려면 약간의 운도 필요한 것, 이인영은 잠깐 사이 늙은 감독을 위로했다.
“걱정하지 말라고요. 아직 5대 3이니까.”
앤더슨 감독은 진심으로 웃질 못했다.
5대 3이면 방심할 수 없는 스코어, 거기다 뉴욕은 이번 이닝에 불펜을 2명이나 기용했다. 타선에 비하면 약간 떨어지는 불펜, 8회 초 공격에서 타선이 성과를 내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보스턴은 클로저 조셉 크렌돌을 올려 8회를 지워버렸고, 앤더슨 감독은 비글리를 8회에도 투입하는 모험을 택했다.
“스윙!! 크게 휘두릅니다. 비글리 선수가 오늘 구위가 괜찮은데요?”
“비글리 선수의 주무기는 최고 96마일 빠른 볼이거든요. 그런데 이게 가끔 종으로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투심으로 구별하기도 하는데, 아직 어린 선수라 정보가 조금 부족합니다.”
일부 전문가들의 말대로 비글리는 투심을 적극 활용했다.
빠른 볼이 커터처럼 휘는데 굳이 슬라이더를 던질 필요는 없지 않나.
투심을 익히면서 검지 위치를 살짝 바꿔줬는데 싱커처럼 떨어지는 무브먼트가 만들어졌고, 플레이터 단장에게 실력을 인정받아 포스트 시즌 로스터에 합류했다.
다만 정규 시즌 성적은 승리 없이 2패 - 평균자책점 3.77로 그저 그랬던 편, 내가 감독이라도 칼슨을 쓰지 않겠나.
실력은 결과로 인정받아야 하는 법, 자신 있게 공을 던졌다.
‘뭐가 이렇게 많이 휘어?’
초구를 지켜본 윌리엄 맥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커터는 타고난 신체조건, 특히 손가락 힘이 받쳐주질 못하면 던지기 어렵다.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평균 신장은 191cm, 이런 신체조건을 가진 선수들 사이에서도 수준급 커터를 던지는 선수는 손에 꼽을 정도다.
비글리는 그 범위에 겹치는 구위를 가진 선수, 뉴욕의 벤 자일스 포수는 다음 공도 빠른 볼을 요구했다.
7회에는 투심을 간간이 섞었지만 이런 구위라면 빠른 볼만 던져도 문제없겠지, 기대대로 비글리는 빠른 볼 세 개로 윌리엄 맥키를 돌려세웠다.
이제 심리적으로 몰리는 쪽은 보스턴, 지은 죄가 있는 에드워드 칼슨도 초조한 얼굴로 경기를 지켜봤다.
여기서 비글리가 무너지면 나도 책임을 피하기 어렵겠지, 이겨도 비난은 감수하겠지만 나 때문에 팀이 졌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딱…!!]
“파울입니다. 카운트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사실 저는 불펜 투수가 2이닝 이상 던지는 건 권장하고 싶지 않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 불펜 투수가 소모품 취급 받는 건 당연하지만, 최근에는 투구 관리를 해주는 편이거든요. 거기다 비글리 선수는 올 해 22살 아닙니까. 7회의 호투만으로도 충분했는데 8회까지 올려야 했을까요?”
비글리는 첫 타자를 삼진 처리했지만 후속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냈다.
거기다 다음 타자는 7회 말 대반격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안톤 포드, 앤더슨 감독은 서둘러 마운드로 향했다.
“계속 던질 수 있겠나?”
“문제없습니다.”
비글리는 감독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규시즌에선 내 의지가 아니라 감독의 뜻이 강판을 좌우했다.
이런 말을 듣는다는 건 팀의 핵심 전력으로 인정받았다는 뜻, 메이저리그 승격 후 멀티 이닝을 책임진 경험은 없지만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의지는 굳건해졌다.
말없이 엉덩이를 쳐주고 내려가는 감독, 비글리는 있는 힘을 모두 끌어 모았다.
‘지금은 위험했다.’
안톤 포드는 뛰쳐나가는 방망이를 거둬들였다.
생각보다 많이 가라앉는 공, 건드렸다면 병살타가 됐겠지. 무브먼트만 뛰어난 게 아니라 구속도 빠른 편이라 타이밍을 뒤에 두면 좋은 타구를 날리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한편, 투심을 먼저 보여준 뉴욕 배터리는 커터 성 빠른 볼로 파울을 유도, 슬라이더와 비슷한 궤적이라 우타자 입장에선 꽤 까다로웠다.
“스윙!! 헛칩니다!! 카운트는 원 볼 투 스트라이크!!”
“병살도 좋지만 여기서는 삼진으로 가는 게 확실하죠. 결심이 선 것 같습니다.”
포수 사인에 고개를 끄덕이는 투수, 1루에서 멀어지는 주자, 한 시도 놓을 수 없는 긴장감이 그라운드를 휘감았다.
“됐어!!”
결과는 헛스윙 삼진, 비글리는 1루 쪽 더그아웃으로 달려갔고 이내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아직 2아웃, 민망함에 귀가 후끈해졌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미소를 짓지 못했다.
이제 타석에는 저메인 슬라븐, 보스턴은 대타 카드를 꺼내 들었다.
슬라븐이 앞선 타석에서 적시타를 쳐냈지만 그래봤자 하위타자 아닌가. 여기서 출루가 돼야 에릭 브라운으로 이어지는 타순, 보스턴은 이 결단에 모험을 걸었다.
‘날 못 믿겠다는 거야?’
벤치에 앉은 슬라븐은 말없이 서운함을 억눌렀다.
뉴욕은 22살짜리 애송이에게 운명을 맡겼는데, 나는 7년 동안 보스턴의 일원으로 활약한 선수 아닌가.
거기다 앞선 타석에서 적시타까지 때려냈는데 이런 대우를 하다니, 솔직히 섭섭했다.
[따악…!]
“유격수 정면!! 잡아서 2루에…!! 아웃입니다!! 비글리 선수가 8회까지 막고 내려가는군요!! 저희는 광고 후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결국 득점 없이 끝난 보스턴의 8회 말 공격,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낸 비글리는 격한 환대를 받으며 더그아웃에 입성했다.
본인도 놀란 활약, 마음의 짐을 덜어낸 에드워드 칼슨도 루키와 가벼운 포옹을 나눴다.
“미안하다. 내가 제대로 못 던져서 네가 고생하는 구나.”
“무슨 소리, 네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야.”
두 선수는 훈훈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칼슨이 없었다면 팀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나. 거기다 칼슨이 무너진 덕분에 내가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사실, 머리 털 나고 가장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낸 비글리는 편안한 마음으로 남은 경기를 지켜봤다.
뉴욕은 9회 초 공격에서 천금 같은 1점을 추가, 보스턴은 9회 말 마지막 공격에서 1점을 냈지만 최후의 발악은 거기서 끝났다.
이렇게 ALCS는 4승 1패로 종료, 더그아웃에서 뛰쳐나온 뉴욕 선수단은 한 덩이로 뭉쳐 승리를 자축했다.
오늘의 영웅은 누가 뭐라 해도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낸 존 비글리, 샴페인을 뒤집어 쓴 루키는 환한 얼굴로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무사 3루에서 마운드에 올라왔는데 떨리진 않았습니까?”
“아니라고 한다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저는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한 루키입니다. 팀이 필요한 상황에서 마운드에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범적으로 생긴 얼굴답게 모범적인 답변, 이인영은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시간을 8회로 돌려보죠. 당신은 투 아웃을 잡고 더그아웃으로 달려가던데, 역시 그 상황을 빨리 넘기고 싶었던 건 아닙니까? 앞으로 뉴욕의 핵심 불펜으로 활약하려면 그런 상황과 자주 마주해야 할 텐데, 어떤 마음가짐으로 경기에 임하실 생각입니까?”
“어 … 음 … ”
“애한테 그런 질문 하지 말아요. 아직 어리잖아요.”
이때 이인영이 지원사격을 나섰다.
사람이 긴장하면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너무 짓궂은 거 아닌가. 우리 집 애 괴롭히지 말라며 감싸고돌았다.
마침 잘 나타난 ALCS MVP, 기자들의 관심은 이인영 쪽으로 기울었다.
“뉴욕을 23년 만에 월드시리즈 진출로 이끄셨는데, 월드시리즈에서도 좋은 활약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뉴욕에겐 23년 만의 월드시리즈 진출이지만 제겐 3년 연속 월드시리즈입니다. 솔직히 특별한 사건 같지도 않네요.”
기자들은 헛웃음을 지었다.
남들은 평생 한 번도 겪기 어려운 월드시리즈를 4번이나 겪은 선수, 특별하지도 않다는 말이 농담처럼 들리질 않았다.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건가. 이인영은 여유는 가지고 경기에 임하겠지만 자만심은 경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