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258화 (258/309)

258화. 거짓말은 안 한다 (9)

“자, 이제 3회 초 2대 0으로 앞선 뉴욕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이인영 선수, 오늘 첫 타석에서는 득점으로 이어지는 2루타를 기록했습니다.”

“제가 말씀을 드릴 기회만 잡고 있었는데요. 이인영 선수는 안타가 나오는 구멍을 아는 것 같습니다.”

“하하~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웃지마세요. 제가 이 자료 찾으려고 논문까지 뒤적거렸습니다.”

박한우 위원은 오늘도 애제자를 향한 분석을 멈추지 않았다.

투수는 빠른 공을 던지는 사람이지, 빠른 타구를 잡는데 익숙한 포지션이 아니다.

거기다 마운드라는 한정된 공간에 갇혀 있으니 수비 범위도 좁은 게 사실, 박한우 위원은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몇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평균 신장은 191cm, 이걸 기준으로 했을 때 투수가 공을 잡는 최고 지점은 높게 잡아도 2.8m, 생각보다 높지 않다.

타구 각도가 10도만 되도 투수 키를 넘길 수 있다는 뜻, 가장 좋은 건 담장을 넘기는 거지만 그게 언제나 가능한 건 아니다.

“저는 내야에 낮은 담장이 있다고 생각하고 쳐요. 가장 좋은 건 투수 머리 위를 넘기는 거죠.”

이인영은 타격의 비결을 묻는 은사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

타자가 넘겨야 하는 게 펜스 뿐인가.

투수 – 내야수 - 외야수 모두 나의 안타를 막아서는 방해꾼, 그중 가장 만만한 담장은 투수다. 투수 머리 위만 넘겨도 안타가 나올 확률은 대폭 증가, 박한우 위원은 사실 확인을 위해 직접 통계를 매겼다.

“47타수 32안타?!!”

결과는 놀라웠다.

시즌 전체 타수에 비하면 얼마 안 되는 기록이지만, 투수 머리 위를 넘긴 타구의 타율은 무려 0.680, 그냥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메이저리그 타자들이 담장을 넘기는 일에 몰두할 때, 이 녀석은 투수 머리 위를 노렸단 말인가?

마침 센터 쪽으로 날아가는 타구가 나왔다.

투수가 잡기엔 어림도 없는 높이, 유격수와 2루수도 추격을 포기했고 좌익수가 원 바운드로 타구를 처리했다.

빈 공간을 기가 막히게 찾아가는 타구, 1루에 안착한 이인영은 옅은 미소를 띤 얼굴로 코치에게 배팅 글러브를 넘겼다.

‘오늘은 아주 좋군.’

다른 선수들은 플라이볼 4개가 나오면 그날 경기는 성공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인영의 취향은 조금 달랐다.

가장 높은 타율이 나오는 구간은 센터 쪽과 우중간, 그중에서도 센터 쪽이 안타가 나올 구멍이 많다.

특히 보스턴의 홈구장 폭스로브 스타디움은 비대칭 구조 때문에 중견수가 커버해야 할 범위가 굉장히 넓다.

이런 배경 때문에 수준급 중견수가 필요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누구든 그 자리에 갖다두면 돌 글러브에 바보가 되어 버린다.

이런 구장에선 센터 쪽을 노리는 스윙이 효과적, 이인영은 자신이 뭘 해야하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경기에 나섰다.

폭스로브 스타디움 통산 성적(37경기)은 0.426 - 홈런 8개 - 23타점, 저승사자 뺨치는 존재감에 보스턴 팬들은 공포를 넘어 혐오감까지 느꼈다.

“자네 오늘 컨디션 좋아 보이는데?”

“컨디션이 좋은 게 아니라 이 구장이 제 취향에 맞을 뿐이에요.”

“취향?”

“그래요. 내가 여기서 뛰었다면 4할을 2번은 쳤을 걸요?”

이인영은 1루 코치와 농담을 주고 받았다.

사실 농담이 아니라 진심, 여기만큼 내 취향에 맞는 구장이 있나. 마음 같아선 홈 구장을 여기로 바꾸고 싶을 정도, 이후에도 안타 행진은 계속 됐다.

[따악~!!]

“투수 키 넘겼고!! 유격수가 몸을 날리지만 잡지 못합니다!! 그 사이 1루 주자는 3루까지!! 이인영 선수는 오늘 3타수 3안타 입니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투수 쪽으로 보내면 거의 틀림없거든요. 안타가 나올 구멍이 어딘지 알고 있는 선수입니다. 이러니까 메이저리그에서 3할 5푼 이상을 치는 거죠. 이유 없는 결과 없습니다.”

“하하~ 역시 박한우 위원님의 이인영 선수 사랑은 알아줘야 합니다.”

경기를 시청하고 있는 팬들도 박한우 위원의 말을 이해했다.

그렇게 수많은 경기를 봤는데 우리는 왜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까. 역시 전문가는 전문가, 6회 초에 추가점을 낸 뉴욕은 4대 0으로 앞서나갔다.

정규시즌은 거의 대등한 경기를 펼쳤는데 포스트 시즌에서는 압도적으로 밀리는 상황, 홈 팬들은 응원의 목소리를 높일 의지마저 꺾여버렸다.

이날 이인영은 4타수 4안타 2타점 경기를 펼치며 팀 공격을 주도, 기자들은 순도 높은 타격 능력에 관심을 보였다.

“당신은 안타를 주머니에 넣어둔 사탕처럼 뽑아내더군요. 뭔가 비결이 있는 겁니까?”

“저는 타격을 할 때 투수의 머리를 노리죠. 그게 비결입니다.”

질문을 던진 기자 뿐만 아니라 다른 기자들도 움찔했다.

의도적으로 투수를 맞추겠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현실화 된다면 끔찍한 일 아닌가. 하지만 이인영은 태연한 얼굴로 설명을 이어갔다.

“당신들도 통계에 관심이 있다면 알겠지만, 안타가 될 확률이 가장 높은 방향은 센터 쪽과 우중간 사이입니다. 그중에서도 확률이 높은 건 센터 쪽이죠. 그래서 투수 키를 넘긴다는 생각으로 스윙을 합니다. 뜻대로 되면 안타는 거의 확실하죠.”

이인영은 뉴욕 홈구장이 폭스로브 스타디움이었다면 나는 올 시즌 4할을 쳤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미 기록으로 증명된 사실, 보스턴 팬들은 내년에 당장 펜스를 조정해야 한다고 발끈했다.

예전부터 말이 많았던 기형적인 구조, 외야수들이 수비에 어려움을 겪는 건 둘째 치고 요주의 인물의 집중 타깃이 되고 있지 않나.

그런데 이때, 뉴욕의 햄스턴 구단주가 입을 열었다.

“그 쪽이 그렇게 나온다면 우리가 홈구장 구조를 바꾸면 된다.”

집에서 얻어터지나 집 밖에서 얻어터지나 결과는 같을 거라는 뜻, 어쨌든 3패에 몰린 보스턴은 최후의 발악에 나섰다.

보통 시프트를 걸 땐 중견수를 내야로 끌어다 쓰는 게 원칙, 하지만 보스턴은 이인영을 막기 위해 듣도 보도 못한 시프트를 들고 나왔다.

“자 … 이건 뭔가요. 이게 맞는 비유인지 모르겠는데 장난감으로 어질러진 방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명한 캐스터께서 정확히 말씀하셨네요. 이런 난장판도 없습니다.”

센터 쪽으로 빠져나가는 구멍은 유격수가 막고 유격수 자리는 3루수가 커버, 그 사이 2루수는 우익수와 중견수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양질의 안타가 나올 가능성을 차단하겠다는 건데, 그럼 좌측으로 밀어치면 되는 거 아닌가.

이인영은 태연한 얼굴로 공을 기다렸다.

“몸 쪽, 배트 돌지 않았다는 판정입니다.”

“이인영 선수는 몸쪽 공도 밀어칠 수 있는 기술이 있거든요. 지금도 보시면 두 손이 배트 헤드보다 앞에 있잖아요.”

“뭔가 이유가 있는 겁니까?”

“손목을 일찍 덮어버리면 몸 쪽 공을 반대 방향으로 밀어낼 수가 없죠. 이인영 선수가 노리는 방향은 좌측입니다. 잘 보세요.”

보스턴 배터리는 벤치와 계속 신호를 주고 받았다.

몸쪽으로 던져도 좌측으로 밀어내는 스윙을 하고 있는데, 이대로 가도 괜찮은 건가.

투구와 상관없이 자기 뜻대로 타구 방향을 날릴 수 있다는 건 굉장한 능력, 이인영은 타석에 들어선 것 만으로도 보스턴 진영에 스트레스를 선사했다.

따악~!!

“앗!!”

3구도 몸 쪽, 이인영은 이걸 기어이 좌측으로 밀어냈다.

2아웃 이후에 나온 안타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결과, 보스턴 진영은 무슨 수를 써도 저 선수는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늘 이인영을 제외하면 뉴욕 타선의 컨디션이 형편 없다는 것,

보스턴의 선발 제이슨 그림슬리는 7이닝 동안 무실점, 삼진 11개를 잡아내며 팀에 귀중한 첫 승을 안겼다.

[그림슬리는 리(Lee)를 제외한 모든 타자들에게 삼진을 잡아냈다]

팀은 패배했지만 이인영은 여기서도 존재감을 알렸다.

다른 선수들은 다 삼진을 당했는데 본인의 기록지만 깨끗, 이어지는 5차전에서도 특별대우는 계속됐다.

“아 … 다시 볼이군요. 이인영 선수는 오늘 두 타석 모두 볼넷입니다.”

“누군가 그랬죠. 어느 축구 선수를 막으려면 태클이나 반칙을 하는 수 밖에 없다고요. 지금 이인영 선수가 딱 그 입장입니다. 볼넷 외엔 방법이 없어요.”

“그건 그렇고 4차전부터 뉴욕 타선이 갑자기 가라앉는데요. 여기서 뭔가 보여줘야 합니다.”

다음 타자 마이크 서튼은 가볍게 스윙을 돌리며 타석에 섰다.

이번 ALCS 성적은 13타수 2안타, 올 시즌 3할 2푼이 넘는 고타율과 30홈런을 기록했지만 포스트 시즌에서는 이렇다 할 활약이 없다.

서튼이 터져줘야 활력을 찾는 타선, 개릿 앤더슨 감독은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바깥쪽 공을 공략하지 못하면서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 평소에는 이런 공도 잡아당겨 안타를 만들었지만 오늘은 그 날이 아니었다.

바깥쪽 떨어지는 공에 맥 없이 헛스윙, 뉴욕은 6회까지 1득점 빈공을 이어갔다.

‘너희들도 할 수 있어, 안 해서 문제지만’

이인영은 말 없이 그라운드와 더그아웃을 오갔다.

메이저리그 레벨에 올라 선 선수들이 밀어치는 능력이 없겠나. 누구나 할 수 있는데 안 하니까 문제, 공격이 안 풀리는데 언제까지 풀스윙을 고집하겠나.

7회 초, 선두 타자로 나선 스캇 험프리는 센터 쪽을 노렸다.

‘이상하네. 나는 왜 안 되지?’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97~ 8마일을 던지는 투수를 상대로 밀어치는 타격이 쉬운가.

바깥쪽만 노리는 제구형 투수라면 통하겠지만 여기는 메이저리그, 밀어치는 타법은 한계를 드러냈다.

따악~!!

반면 이인영은 보란 듯이 97마일 빠른 볼을 좌측으로 밀어냈다.

손목 힘이 얼마나 강하면 저렇게 때려낼 수 있는 건지, 대기 타석에 들어선 마이크 서튼은 저건 내가 할 수 있는 짓이 아니라고 못 박았다.

“스윙!! 크게 돌려봅니다.”

“지금도 손목이 너무 빨리 돌았어요. 뭘 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마음대로 안 되고 있습니다.”

마이크 서튼은 타석에서 오른 발을 뺀 채 숨을 골랐다.

헛스윙이 됐지만 타이밍이 늦은 것보다는 나은 결과, 기죽지 않고 빠른 볼을 노렸다.

위험을 감지한 배터리가 볼을 빼면서 카운트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한 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흐름에 팬들은 마른 침을 삼켰다.

“아~!!”

“그렇지!! 좋았어!!”

빠른 볼이 통하면서 카운트는 원 볼 투 스트라이크, 양 팀 벤치의 희비는 엇갈렸고 뛰쳐나갈 자세를 잡고 있던 이인영은 1루로 돌아왔다.

“투수 머리를 노려라. 머리를 … ”

자기도 모르게 흘린 혼잣말,

보스턴의 1루수 제이슨 카메론은 마음 속으로 그렇게는 안 될 거라고 맞받아쳤다.

그 사이 보스턴 배터리는 사인 교환을 완료, 마이크 서튼은 루킹 삼진만은 면하겠다는 생각으로 배트를 돌렸다.

[따악~!!]

“투수 키를 넘겼고!! 그대로 베이스를 빠져 나갑니다!! 이인영 선수는 2루를 돌아 3루까지 들어갑니다!! 1사 주자 1 – 3루!! 마이크 서튼이 불리한 볼카운트에서 안타를 만들어 냅니다!!”

“하하~ 이인영 선수 보세요. 지금 웃을 상황이 아닌데 말이죠.”

3루에 안착한 이인영은 서튼을 향해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키는 세리머니를 날렸다.

안타가 나올 구멍을 잘도 찾았다는 칭찬의 의미, 물론 헤드 샷을 당할 뻔한 투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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