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거짓말은 안 한다 (8)
“이봐, 우리는 사이좋은 편이지?”
“광고 같은 연출하지 마”
ALCS 1차전을 앞두고 뉴욕 선수단은 각자의 방식대로 몸을 풀었다.
밥 레지슨과 벤 자일스의 충돌 사건으로 팀원 간의 사이가 원만치 않다는 게 발각된 뉴욕, 여론을 의식했는지 스캇 햄프리는 친구라고 생각하는 동료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이인영의 반응은 냉정, 평소처럼 행동하면 되지 3루석에 앉은 카메라 기자들 앞에서 무리한 연출하는 게 더 어색한 거 아닌가.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막장 집안이라도 잘 굴러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 돼, 어차피 이길 놈은 이긴다고”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넌 너무 냉정한 것 같아. 살면서 눈물을 흘린 적은 있어?”
“있지. 나도 인간이니까.”
이인영은 지나간 시간을 되짚었다.
나도 사람인데 눈물을 흘린 적이 없겠나.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때마다 더 강해졌다.
눌물을 흘려서 강해진 게 아니라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강해졌다고 해야 되나. 이번 시즌도 웃을 일만 만들겠다고 다짐했고, 그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너는 좀 많이 울어야겠다.”
“왜?”
“옆에 있으면 젖비린내가 풀풀 나거든, 좀 더 강해져라.”
스캇 험프리는 동료의 놀림에 인상을 구겼다.
나도 이제 어엿한 풀타임 메이저리거인데 애송이 취급을 하다니, 하지만 남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강해진다는 말은 공감이 됐다.
* * *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곳은 ALCS 1차전이 열리는 뉴욕 햄스턴 스퀘어 가든입니다. 저는 캐스터 이명한, 해설에는 박한우 – 임선우 위원께서 도움을 주시겠습니다. 임선우 위원님”
“예”
“팬 여러분들을 위해 이번 시리지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간략하게 설명해주시죠.”
“네, 이번 시즌도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는 뉴욕과 보스턴의 독무대였다고 할 수 있죠. 두 팀 모두 정규시즌에서 100승을 넘겼고, 무려 21경기를 맞붙었습니다.”
긴 설명이 필요 없는 뉴욕과 보스턴의 라이벌리, 올해는 유독 많이 붙었고 시즌 전적은 11승 10패(뉴욕 우세) 거의 대등했다.
보스턴은 최근 20년 동안 월드시리즈 우승만 5번을 차지했지만 뉴욕은 제로, 보스턴 여론은 올해도 뉴욕은 ALCS에서 떨어질 운명이라며 선전포고를 날렸다.
대응 사격을 날려야 하는 뉴욕, 100마디 말보다 승리가 더 의미가 있지 않겠나. 뉴욕 팬들은 ‘redden the black’을 연호하며 분위기를 고양시켰다.
보스턴은 뉴욕에 비해 흑인 선수 비율이 높은 편,
강성 뉴욕 팬들은 붉은 색 유니폼을 보스턴 흑인 선수를 향해 피에 물든 검둥이 같다는 조롱을 퍼부었다.
‘이 정도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
이인영은 아무 일 없다는 표정으로 1루에 들어섰다.
미국 사회에서 인종차별은 범죄지만 경기를 하다면 인종차별적 발언이 자주 귀에 걸린다.
인종차별을 하지 말자는 건 사회적 약속, 억눌려 있던 욕구가 스포츠를 통해 터져 나온다고 해야 하나. 이에 대한 선수들의 대응 방식은 천차만별, 메이저리그 경력 7년 차에 접어든 이인영도 대응 메뉴얼을 갖췄다.
오늘은 홈경기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면 그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 보스턴의 1회 초 공격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타석에는 에릭 브라운, 올 시즌 타율 0.311 – 홈런 26개 - 79타점을 기록했습니다.”
“보스턴은 정말 유망주가 많은 것 같습니다. 매년 주축 선수가 바뀌는 것 같아요.”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돈을 안 쓴다는 거죠. 뉴욕과는 확실히 차별화 된 전략을 택하고 있습니다.”
뉴욕이 화끈한 투자로 전력을 끌어 모으는 것과 달리 보스턴은 유망주 중심으로 팀을 운영하는 편, 이번 오프 시즌에도 FA 자격을 얻은 선수 3명을 전부 내보냈다.
이것 때문에 구두쇠 구단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어쨌든 최근 20년만 따져보면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했다.
보스턴 팬들도 구단의 전략에 불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돈 쓰고 우승도 못하는 뉴욕보다는 낫지 않나.
곳곳에 자리 잡은 보스턴 팬들은 우리가 뉴욕보다 낫다며 외로운 투쟁을 이어갔다.
딱~!!
유격수 쪽으로 굴러가는 타구, 에릭 브라운은 1루로 튀어 나갔고 이인영은 특유의 긴 다리를 쭉 뻗으며 송구를 낚아챘다.
판정은 세이프, 뉴욕 팬들은 야유를 퍼부었지만 이인영은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판정을 받아들였다.
‘아무리 봐도 동양 쪽은 아닌데 말이야.’
이인영은 곁눈질로 브라운을 살폈다.
올 시즌 지겹도록 봤지만 보면 볼수록 신기한 외모, 피부가 까무잡잡해서 아프리카계 흑인이나 중동계로 오해 받는데, 아버지는 필리핀 – 어머니는 하와이 원주민이다.
누가 이 선수를 동양계 미국인이라고 생각하겠나. 세대를 거듭할수록 변화한다는 유전자의 위대함을 실감했다.
“너 얼마 전에 아들 낳았다며?”
“그런데?”
“어떻게 생겼어? 피부색은?”
느닷없는 질문에 브라운은 발끈했다.
그렇잖아도 피부색과 이국적인 외모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한 트라우마가 있다.
거기다 일부 몰지각한 홈 팬들까지 날 검둥이라고 부르는데 아들을 두고 피부색을 논하다니, 지금 해보자는 거냐며 발끈했다.
“아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물어본 것뿐이잖아? 뭘 그렇게 화를 내?”
별 거 아니라는 식으로 웃어넘기는 태도가 더욱 신경을 자극, 브라운은 옐로우라는 말은 입에 담지 못했다.
나도 필리핀계인데 상대방을 천박한 동양놈이라고 욕해봤자 얼굴에 침 뱉기 아닌가. 한소리 더 할까 했지만 무시해 버렸다.
“천박한 자식!!”
“야구 좀 한다고 잘난 척하지 말라고!!”
“누가 널 미국인이라고 생각하겠어, 이 잡종아!!”
하지만 경기 내내 계속되는 뉴욕 팬들의 야유와 폭언, 평소 이런 일을 잘 참고 넘겼던 브라운도 이번에는 참지 않았다.
ALCS 1차전은 4대 2 뉴욕의 승리로 종료, 브라운은 이인영의 인종차별적 행동을 걸고 넘어졌다.
“그는 스스로 백인이라는 착각에 빠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오늘 경기 중 제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네 아들의 피부색은 어떠냐고 말이죠.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아마 절 자극해서 심리적으로 흔들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그의 작전은 아주 성공적이었습니다. 제가 약간 흥분했던 건 사실이니까요.”
예전부터 심리전으로 상대의 멘탈을 흔들었던 이인영, 그런데 이번엔 정도가 심한 것 아닌가.
천박한 팬들은 몰라도 품위 유지가 절대적인 메이저리거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 자체가 논란이 될 수 있는 일, 기자들은 사실 확인에 나섰고 이인영은 입장을 밝혔다.
“제가 말실수를 한 것 같은데, 딱히 브라운을 폄하 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럼 무슨 뜻으로 한 말이죠?”
“유전자의 위대함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어디서 주워들은 상식이지만, 인간의 유전자는 바이러스에 대항하기 위해 진화와 변화를 거듭해 왔다고 들었다.
그래서 부모가 특정 바이러스에 취약해도 그 자식은 바이러스에 저항력을 가질 수 있는 것,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이인영은 해맑은 얼굴로 해명에 나섰다.
“저는 한국인이고 아내도 한국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아들은 저와 별 다를 게 없더라고요. 그런데 브라운은 필리핀계고 그 아내는 백인 아닙니까? 그럼 그 아들은 아버지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지 않았을까요? 그게 궁금했을 뿐입니다.”
“정말 그것뿐이었습니까?”
“예, 그것뿐입니다.”
기자들은 바로 기사를 냈다.
이인영의 말이 사실이라면 브라운은 쓸데없이 민감하게 반응한 것 아닌가. 그렇다고 쳐도 오해의 소지가 될 수 있는 발언, 보스턴 여론은 이인영이 인종차별을 한 사실을 그럴 듯한 말로 해명한 것뿐이라며 공격에 나섰다.
‘그럼 그렇게 생각하던가.’
이인영은 별 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브라운 아들이 어떻게 생긴지 궁금해서 물어본 것 뿐, 그걸 인종차별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보스턴의 핵심선수 브라운이 흥분했다면 그것도 나름 괜찮은 일, 아무 일 없었다는 얼굴로 ALCS 2차전을 맞이했다.
“네 아들 피부색은 어때?!!”
“너처럼 검둥이냐?!!”
“뭐라고 답 좀 해 보라고!! 우리가 물어보잖아!!”
꼬투리를 잡은 뉴욕 팬들은 오늘도 브라운의 신경을 건드리는 중, 심리적으로 흥분한 브라운은 자기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고 보스턴은 뉴욕 원정에서 2패를 당하고 홈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네가 당할 차례다]
대대적인 인종차별 공격을 예고한 보스턴 여론, 이인영은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보스턴에 입성했다.
반성이라는 걸 모르는 뻔뻔한 태도, 사방에서 네 아들은 어떻게 생겼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내 얼굴 봐, 내 아들 나 닮았다고 했잖아?’
이인영은 보란 듯이 손가락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켰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철 멘탈, 그 모습에 앤더슨 감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구단주 앞에서도 할 말 하는 담력을 지닌 선수, 이 정도는 놀랍지도 않았다.
“자, 이제 이인영 선수의 타석으로 이어집니다. 이번 ALCS 성적은 8타수 3안타, 홈런 없이 1타점, 변함없는 활약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거하게 한 건 터뜨렸죠. 논란이 될 수 있는 발언이었는데, 박한우 위원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 …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아랍인처럼 생긴 친구가 있었거든요. 다들 네 부모님 한국인이냐고 물어봤는데 그 친구가 아빠 엄마 다 한국인이라고 화를 내더군요. 이번 사건도 비슷한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살다 보면 때로는 악의 없이 상대방을 자극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내 애재자가 정말 상대를 자극하기 위해 그런 발언을 했을까. 박한우 위원은 내가 알고 있는 이인영 선수는 그렇지 않다고 변호에 나섰다.
“이인영 선수는 의외로 순진한 면이 있습니다. 그런 점 때문에 건방지다 예의가 없다 이런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악의적으로 그런 말을 선수는 아니라고 자신합니다.”
문제는 보스턴 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네가 아무리 노력해 봤자 우리와 같은 백인은 될 수 없을 거라는 조롱이 쏟아졌다.
‘이건 내가 의도했던 게 아닌데 … ’
한편, 브라운은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너는 평생 노력해도 백인이 될 수 없다니, 그게 왜 나한테 하는 말처럼 들리는 걸까.
잘하면 환호를 받지만 못하면 검둥이 소리를 듣는 신세, 이게 정말 내가 원했던 상황인가.
분명한 건 저 선수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기 플레이를 한다는 것, 브라운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이인영은 좌중간을 가르는 호쾌한 장타를 터뜨렸다.
1루를 지나 여유 있게 2루에 입성, 유격수 브라운은 그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장면, 눈치를 살피던 브라운은 슬쩍 입을 열었다.
“아직도 내 아들 피부색이 궁금하냐? 오늘도 날 자극해 보지 그래?”
“됐어. 인터넷으로 찾아봤거든.”
돌아온 답은 의외였다.
이인영은 브라운이 SNS에 올린 아들 사진을 검색, 눈처럼 흰 피부를 확인했다. 아빠와는 전혀 다른 외모, 궁금증이 해결됐으니 할 말도 없었다.
‘정말 그게 전부였어?’
브라운의 멘탈은 한 번 더 붕괴 됐다.
정말 나는 악의 없는 질문에 쓸데없이 흥분한 건가.
왠지 내가 바보가 된 것 같은 느낌, 그러건 말건 이인영은 2루에서 멀어지며 투수의 심기를 건드렸다.